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1908~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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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LM 댓글 0건 조회 1,610회 작성일 12-07-20 00:30본문
카라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음악가’로 그를 꼽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끔은 전혀 엉뚱한 곳에 걸려 있는(예를들어 ‘버드와이저’나 ‘코카콜라’의 포스터가 걸릴 자리에) 그의 포스터를 접하고 놀란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점이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다. 20세기 클래식의 상업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자기 현시욕과 재물욕이 유난히 강했던 기회주의자가 음악에 집중할 새가 있었겠냐는 것이 그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자기 자신마저도 상품으로 만들어 팔아치운 ‘자본주의 시대의 파우스트’로서의 짙은 의혹인 것이다. 따라서 그가 20세기 후반, 음악의 몰개성화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라고 몰아붙인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어쨌든 그는 최고의 악단을 30년 이상 이끌어오면서 높은 완성도의 음반들을 양산해 고전음악의 저변이 확대된 결과를 낳았고, 그의 연주중에는 함부로 ‘싸구려’로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는 명연들이 역시 즐비하다는 의견이 그것이다. 어쨌든 푸르트벵글러-토스카니니의 시대 가 막을 내리자 번스타인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카리스마를 이끈 것이 카라얀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전시대의 ‘절대적 카리스마’와는 조금 다른 ‘다재다능의 카리스마’로.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 역시 신동으로 각광받은 그는 빈 국립음악원에서 프란츠 샬크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27년, 19세의 나이로 울름 시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나 5년 만에 밀려나고 만다. 그래서 카라얀은 1933년 나치 입당의 길을 선택했고,34년 아헨 오페라극장의 지휘자, 35년 음악총감독으로 임명되며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1937년과 38년에 빈 국립오페라극장과 베를린 필·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무대를 차례로 밟으 며 전쟁기를 맞이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의 행적은 그다지 거론되지 않는다. 별로 유쾌한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종전과 동시에 그는 위기를 맞이했다. 47년 해금되었지만 어느 무대도 그를 웃는 낯으로 반기지 않았다. 미궁에 갇힌 그의 손에 면죄부를 쥐어준 것이 EMI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였다. 당시 구성된 레코딩 전문악단인 필하모니아를 카라얀에게 맡겼던 것이다. 49년부터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된 것도 그가 숨통을 틀 수 있게 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지휘무대에 복귀한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푸르트벵글러가 죽은 것이다.
여러 가지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 되어 1955년 베를린 필에 입성한 그는 이듬해 종신예술감독까지 요구해 성취했다. 그리고 카라얀의 전성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도이치그라모폰 레이블을 통한 레코딩과 연주여행을 통해 세계 곳곳에 ‘카라얀 포스터’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80년대 들어 베를린 필과의 불화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음악계의 황제’로서의 그의 권력은 막강해져만 갔다. 음반뿐만이 아니라 영상물을 통한 음악산업을 육성하며 연출에도 직접 나섰다. 자연자작의 음반과 영상은 아직도 레코드가게의 진열장을가득 채우고 있다. 89년, 죽기 3개월 전에야 그는 ‘종신’이라는 타이틀을 반납하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음악은 후기 낭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세련된 다듬기’와 ‘지겨운 레가토’로 특징지워진다. 그래서 고전 레퍼토리보다는 낭만 이후의 레퍼토리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음반 중에서도 차이코프스키가 가장 큰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마지막 녹음이 된 브루크너 교향곡 7번(DG)도 명연 중에 하나. 그리고 말러 교향곡 9번(DG), 브람스 교향곡 1번(DG)도 대표적 명반이다. 더 이상 그의 명반을 꼽기는 힘들다. 그의 음반 타이틀 (영상물포함)은 모두 1천에 달하고 전세계적으로 약 1억 2천만장이나 팔렸다. 대중음악시장에서는 흔히 ‘많이 팔리면 뜬다’고 한다. 같은 논리라면 카라얀의 음반들 중 상당수가 ‘뜬 명반’인 것이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어쨌든 그는 최고의 악단을 30년 이상 이끌어오면서 높은 완성도의 음반들을 양산해 고전음악의 저변이 확대된 결과를 낳았고, 그의 연주중에는 함부로 ‘싸구려’로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는 명연들이 역시 즐비하다는 의견이 그것이다. 어쨌든 푸르트벵글러-토스카니니의 시대 가 막을 내리자 번스타인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카리스마를 이끈 것이 카라얀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전시대의 ‘절대적 카리스마’와는 조금 다른 ‘다재다능의 카리스마’로.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 역시 신동으로 각광받은 그는 빈 국립음악원에서 프란츠 샬크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1927년, 19세의 나이로 울름 시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나 5년 만에 밀려나고 만다. 그래서 카라얀은 1933년 나치 입당의 길을 선택했고,34년 아헨 오페라극장의 지휘자, 35년 음악총감독으로 임명되며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1937년과 38년에 빈 국립오페라극장과 베를린 필·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무대를 차례로 밟으 며 전쟁기를 맞이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의 행적은 그다지 거론되지 않는다. 별로 유쾌한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종전과 동시에 그는 위기를 맞이했다. 47년 해금되었지만 어느 무대도 그를 웃는 낯으로 반기지 않았다. 미궁에 갇힌 그의 손에 면죄부를 쥐어준 것이 EMI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였다. 당시 구성된 레코딩 전문악단인 필하모니아를 카라얀에게 맡겼던 것이다. 49년부터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된 것도 그가 숨통을 틀 수 있게 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지휘무대에 복귀한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푸르트벵글러가 죽은 것이다.
여러 가지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 되어 1955년 베를린 필에 입성한 그는 이듬해 종신예술감독까지 요구해 성취했다. 그리고 카라얀의 전성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도이치그라모폰 레이블을 통한 레코딩과 연주여행을 통해 세계 곳곳에 ‘카라얀 포스터’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80년대 들어 베를린 필과의 불화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음악계의 황제’로서의 그의 권력은 막강해져만 갔다. 음반뿐만이 아니라 영상물을 통한 음악산업을 육성하며 연출에도 직접 나섰다. 자연자작의 음반과 영상은 아직도 레코드가게의 진열장을가득 채우고 있다. 89년, 죽기 3개월 전에야 그는 ‘종신’이라는 타이틀을 반납하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음악은 후기 낭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세련된 다듬기’와 ‘지겨운 레가토’로 특징지워진다. 그래서 고전 레퍼토리보다는 낭만 이후의 레퍼토리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음반 중에서도 차이코프스키가 가장 큰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마지막 녹음이 된 브루크너 교향곡 7번(DG)도 명연 중에 하나. 그리고 말러 교향곡 9번(DG), 브람스 교향곡 1번(DG)도 대표적 명반이다. 더 이상 그의 명반을 꼽기는 힘들다. 그의 음반 타이틀 (영상물포함)은 모두 1천에 달하고 전세계적으로 약 1억 2천만장이나 팔렸다. 대중음악시장에서는 흔히 ‘많이 팔리면 뜬다’고 한다. 같은 논리라면 카라얀의 음반들 중 상당수가 ‘뜬 명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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