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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현대발레 - 서구유럽을 발칵 뒤집히게 만든 '발레 륏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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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1,854회 작성일 11-10-1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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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러시아 발레를 주도한 이는 크게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20세기 초반 ‘발레 륏스’를 창단하여 러시아 발레를 서유럽에 성공적으로 소개시킨 공연기획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이고, 또 한 사람은 20세기 중반 이후 볼쇼이 발레단을 통해 러시아 발레를 다시한번 세계 최고로 등극시킨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이다.
 
서구유럽을 발칵 뒤집히게 만든 '발레 륏스'
 
프티파의 고전적 공식이 지나치게 남용된 결과 진부한 것이 되어버렸을 때 이에 반기를 든 이는 젊은 안무가 미셀 포킨이었다. 1914년에 그는 발레가 극장예술로서 발전하려면 단순한 손놀림 뿐만 아니라 극적인 표현을 위해 몸 전체가 움직이는 보다 적극적인 동작을 써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보수 성향이었던 상트 피체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포킨느의 주장을 '급진적'이라해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기에 '새로운 예술'의 창조에 열을 올리고 있던 또 다른 이가 있었다. 바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 Diaghilev)이다. 혁신적인 무용가였던 포킨은 디아길레프와 손을 잡는다.

1909년 5월 18일은 러시아의 상트 피체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볼쇼이의 최고의 무용수들 35명으로로 구성된 러시아 발레팀(후에 '러시아 발레단'이란 뜻의 발레 륏스Ballet Russe가 된다)의 첫 파리 공연이 있던 날이었다. 무용수중에는 이미 유럽에 널리 명성을 날리고 있던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와 그녀의 맞수로서 탁월한 미모를 자랑하던 타마라 칼사비나(Tamara Karsavina) 그리고 남성 무용수중에는 당시 19세로서 뛰어난 점프 실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가 있었다.

남성무용수의 폭발적인 힘을 과시했던 <이고르 왕자>, 여성무용수의 꿈결같은 분위기를 보인 <레 실피드>, 이집트의 화려한 신비로움을 보여준 <클레오파트라> 등의 공연은 파리 시민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그동안 가꾸어왔던 러시아 발레가 화려하게 서구 무대에 첫 선을 보이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순간 이후 서유럽은 오히려 러시아로부터 발레를 역수입하게 된다.

발레 륏스를 만든 이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예술적 안목과 교육열이 상당히 높았던 계모 아래서 자란 그는 일찍부터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류를 해왔다. 1906년에는 파리에서 러시아 미술전을 열어 파리 에술계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주인공이었다.

그의 꿈은 풍부하고 아름다운 러시아의 예술과 음악을 서양에 소개하는 것이었다. "나는 러시아의 그림과 음악, 그리고 오페라를 파리에 소개했다. 오페라와 발레는 한발짝 차이다. 발레야말로 그 자체가 모든 예술을 전부 포괄하는 종합예술이다."라고 말한 디아길레프는 샤틀레 극장에서의 공연이 대성공을 거둔 후 그 시대의 최고 예술가들과 손을 잡고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대단히 새로운 발레 작품으로 유럽의 문화예술계 전체를 뒤흔들었다.

당시 발레 륏스와 활동하던 안무가로는 포킨느(1909~12, 1914), 니진스키(1913), 마신느(1915~20, 1925~8), 니진스카(1922~6), 발란신(1926~9). 작곡가로는 스트라빈스키, 라벨, 드뷔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사티, 레스피기, 프로코피에프, 나보코프. 무용수로는 파블로바, 깔사비나, 니진스카, 니진스키, 모드킨, 다닐로바, 두브로브스카야, 소콜로바, 돌린, 리파르, 발란신, 루빈스타인, 체케티. 디자이너로는 브노아, 박스트, 피카소, 마티스, 로랑생, 브라크, 미로, 보샹, 루오가 있었는데 이들은 지금까지 세계 예술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위대한 예술가들이다.

1929년 디아길레프가 죽고 난 뒤 발레 륏스는 해체됐지만 그의 후예들은 세계 각지로 나가 발레 륏스의 그 새로운 전통을 오늘도 잇고 있다. 발레 륏스의 후예들에 의해 오늘날 세계적인 발레단으로 성장한 단체를 예를 들면 프랑스의 파리오페라발레, 영국 로열발레, 몬테카를로발레, 미국의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와 뉴욕시티발레 등이 있다.
20세기 러시아 발레를 재창조한 유리 그리가로비치
 
1988년 서울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초대된 볼쇼이발레단은 당시 로얄석 티켓값이 10만의 고가였으나 발매 즉시 동이 날 정도로 큰 인기였다. 볼쇼이발레 공연티켓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볼쇼이합창공연'도 '볼쇼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서 볼쇼이발레 공연인줄 알고 그 티켓을 구입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볼쇼이라는 단어가 소련어로 '발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볼쇼이(Bolshoi)'는 '거대하다' 또는 '최고'라는 뜻이다. 이와같은 현상은 바로 유리 그리가로비치라는 안무자의 등장 때문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보통사람들의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사회주의 혁명이 터진다. 러시아 황실이 무너지고 국가명칭도 소비에트 연방으로 바뀌면서 수도 또한 상트 피체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지게 된다. 혁명가들은 '발레'가 황실의 후원아래 자란 귀족들의 예술이기 때문에 발레를 없애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한 러시아 작가의 중재로 겨우 발레는 그 존재를 유지한다.
 
1927년에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붉은 양귀비'란 발레 공연이 올려졌다. 그 발레의 주제는 소련 사회주의자들의 이상과 맞았기 때문에 이때부터 볼쇼이발레단은 정부의 많은 지원을 받으면서 빠른 성장을 하게된다. 하지만 오랜 전통을 가진 상트 피체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의 명성을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마린스키 극장에는 유능한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64년 37세의 젊은 유리 그리가로비치 (Yuri Grigorovich)가 200년 역사의 볼쇼이극장의 예술감독으로 등장하면서 러시아 발레의 주도권은 마린스키 극장에서 모스크바 볼쇼이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잘 생긴 외모, 총기 넘치는 눈빛, 탁월한 음악성과 카리스마에 사업적 수완까지 두루 갖춘 이 젊은 천재 유리 그리가로비치는 우리에게 <신데렐라 Cinderella>로 유명한 알렉산드르 고르스키(Alexandre Gorsky)나 카시얀 골레이조프스키(Kasyan Goleizovsky) 처럼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볼쇼이의 전통에 자신의 매우 세련된 창조력을 담은 놀라운 작품 들을 유럽인들에게 선사한다.

<백조의호수 1969년>나 <호두까기인형 1966년> 같은 예전의 작품이라도 그의 손을 거쳐간 것은 색달랐다. 그때까지 여성 무용수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남성 무용수들은 그리가로비치의 손에서 발레 공연의 주역들로 자리잡게 된다. 그중 '노예해방'을 다룬 <스파르타쿠스 Spartacus 1968년>는 남성 발레를 대표하는 발레 작품으로 뚜렷히 각인된다.

초기 현대발레 이후의 상황은 이 홈 라이브러리 '사조별 발레 역사 중 현대발레'를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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