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발레시어터내한공연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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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저 댓글 0건 조회 2,114회 작성일 12-02-22 20:25본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단의 순위 매기기는 참으로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각자의 관점과 취향에 따라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특히 러시아 마린스키-키로프와 미국 아메리칸 발레시어터를 놓고는 한 치의 양보가 없다. 다행히 작품별로 우열을 가를 수는 있을 것인데, 자유분방한 희극성이 중요한‘돈키호테’는 아무래도 미국발레단의 공연이 보다 흥겹다. 1940년 개인발레단으로 출발한 아메리칸 발레시어터는 현재 가장 풍부한 스타 군단으로 유명하다. 발레라는 예술이 엄청난 경제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왕정에서는 왕실 소속으로, 공산주의에서는 국가의 제도로, 자본주의에서는 부의 상징적 명물로 존재하므로 이 발레단이 뉴욕에 상주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의 내한공연(7월 31일~8월 3일 세종문화회관)은 이번이 두 번째다. 12년 만이라 첫 내한 때의 어린 주역 팔로마 헤레라가 이제 원숙한 고참이 되어 나타났다. 파트너 호세 마뉴엘 카레뇨 역시 그 세월의 흔적을 몸에 새기고 등장해 예술과 삶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주역 수잔 재프, 줄리 켄트의 빈자리를 채운 신인들이 세대교체를 알렸다. 발레 무용가의 생명이 워낙 짧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주역의 변동사항을 파악하고 그 기량을 확인하는 마니아 역할도 보통 노력으로는 어렵다. 언어보다 확실한 표현력을 지닌 극적인 묘사 돈키호테’는 1740년부터 발레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발레에서 대사를 사용했고 오늘날과 같은 토슈즈나 튀튀도 없었으니 ‘발레’라는 명칭을 지닌 종합예술로 추측된다. 이번 공연의 뿌리는 1869년 마리우스 프티파가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한 안무다. 1871년 이후 알렉산더 고르스키가 몇 차례 개작했고, 그 작품을 다시 1978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에서 개작한 계보를 지녔다. 이번 무대 역시 바리시니코프 버전과 얼마간 달랐는데, 특히 돈키호테의 역할을 강조해 줄거리의 이해를 쉽게 했다. 1992년 이래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케빈 멕킨지와 공동연출자 수잔 존스의 해석본이다. 이런 각색의 이유는 발레‘돈키호테’의 주인공이 돈키호테가 아니라 주막집 딸 키트리와 이발사 바질이라는데 있다. 반쯤 정신을 놓은 듯 행동하는 노인 돈키호테는 풍차에 돌진해서 환영을 보는 것 이외에는 별 역할이 없었다. 소설과 발레를 연결시키는 대표적 소품이 풍차인 동시에 기절하면서 시작되는 동화적 발레장면이 키트리네 주막과 아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에 동원되는 셈이다. 그러나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의 이번 공연에서는 돈키호테의 방랑 목적이 첫 장면에서부터 뚜렷이 제시된다. 아름다운 여인 둘시네아의 환상을 보고 그녀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동기를 강조하고, 그 과정에서 키트리와 바질의 결혼을 적극 성사시키는 인물로 부상한다. 다시 둘시네아를 찾아 떠나는 결말이 일반적이지만 이번에는 그의 방랑을 키트리가 만류해 함께 머물게 한다는 해피엔딩으로 돈키호테가 극의 전개에 적극 가담하는 해석이다.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의 고전발레 해석은 특히 극적인 묘사가 구체적이다. 바질이 이발사로 돈을 많이 벌겠으니 딸을 달라고 간청할 때, 가마쉬의 돈주머니에 넘어가 그의 편이 되는 아버지, 잠깐의 시선으로 질투를 유발하기, 다리를 펴고 접으며 장난치는 연인의 모습 등 극히 짧은 순간의 무언극이지만 언어보다 확실한 표현력을 지녔다. 마임의 주역들인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 가마쉬와 로렌조가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며 어떤 발레단에서도 보기 어려운 공감대를 연출했다. 1막은 화창한 날씨의 스페인 바르셀로나 광장이다. 주막집의 예쁜 딸 키트리가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서 춤을 추고 있다. 키트리를 사랑하는 이발사 바질도 보인다. 바질은 기타를 치며 키트리를 위한 세레나데를 부르지만 키트리는 일부러 다른 남자와 장난을 친다. 그 보복으로 바질도 다른 여자들과 어울린다. 그러나 이 질투 경쟁은 곧 멈추고 사람들이 몰려와 흥을 돋우자 행복한 커플은 즐거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때 키트리의 아버지 로렌조가 들어오다 바질이 딸과 팔짱 낀 모습을 보고 화를 내며 다가온다. “내 딸 앞에서 사라져!” “딸과 결혼하게 해주세요” 등의 내용이 담긴 마임극이 전개된다. 1막에서 키트리는 세 남자의 구애를 받게 되는데, 자신이 선택한 바질과 아버지가 좋아하는 부자 멋쟁이 가마쉬, 그리고 그녀를 둘시네아라고 믿는 돈키호테다. 2막은 바질과 키트리가 숲 속으로 도망간 장면이다. 날씨는 춥고, 거대한 풍차가 달빛을 받아 음침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행복에 젖어있다. 집시들이 다가와 변장할 옷을 준다. 또한 그들의 행방을 묻는 로렌조와 가마쉬를 속여 쫓아버린다. 곧이어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가 도착한다. 집시들은 돈키호테에게 예의를 차려 조그만 무대를 꾸미고 인형극을 보여준다. 극중 소녀가 곤경에 처하자 그 소녀를 둘시네아로 착각한 돈키호테는 갑자기 풍차가 거대한 괴물이라며 공격한다. 산초 판자가 말렸지만 이미 풍차 날개에서 땅으로 떨어진 후였다. 기절하면서 돈키호테는 꿈을 꾸게 된다. 둘시네아, 숲의 요정, 사랑의 요정이 등장하는 아름다운 숲속이다. 현실의 풍경과 대조적인 발레 장면을 만들기 위해 안무자들은 자주 주인공들을 기절시키거나 잠재우기 혹은 마약에 취하게 만드는데, 그런 연출기술의 전형이다. 3막은 바질의 자살 소동이 재미있고, 주인공들의 장기 자랑 2인무인 ‘그랑 파드되’가 멋지다. “따님과 결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어요” 라고 말한 바질은 긴 면도칼을 꺼내 가슴을 찌르고 쓰러진다. 바질의 가짜 자살소동을 알게 된 키트리는 슬퍼하는 척하며 눈치를 살핀다. 이를 고결한 사랑이라고 생각한 돈키호테는 로렌조에게 바질이 죽기 전에 결혼식을 치르라며 가마쉬에게도 진실한 사랑에 승복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마쉬가 발을 구르며 격노하자 돈키호테가 몸짓으로 “칼을 뽑아라, 이 바보 같은 녀석아!” 라고 소리친다. 돈키호테의 승리로 격투가 끝나자 바질은 거짓말처럼 소생한다. 드디어 작품의 절정인 결혼식 장면이다. 집시들, 신부들러리들, 남자의 친구들이 모였다. 로렌조 역시 이제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돈키호테에게 춤을 권한다. 그러나 둘시네아가 아닌 키트리와는 춤출 이유가 없다. 우아한 듀엣에 이어 바질은 남편이 된 기분을 강한 도약으로, 키트리는 발랄한 성격을 부채 흔들기로 표현한다. 고전발레의 명 기술인 32회전 푸에테가 절정을 알린 후 막 내릴 준비로 들어가는 구성이다. 품격으로 기예를 누르는 발레 연기의 정수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의 첫날(8월 1일) 공연은 간판스타 팔로마 헤레라와 호세 마뉴엘 카레뇨가 주역을 맡았다. 팔로마 헤레라는 회전기교에서도 안정감이 돋보이는 놀라운 능력을 과시했고 매우 빠른 리듬에 발끝으로 뛰다가 허리를 꺾어 도약하는 1막의 키트리 독무에서도 고유의 경쾌함을 유감없이 즐겼다. 호세 마뉴엘 카레뇨는 당당함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탁월한 균형감으로 여유로운 회전기를 구사하는 한편 순수하고 듬직한 바질 연기에서도 돋보였다. 품격으로 기예를 누르는 발레 연기의 정수를 보인 커플이다. 둘째 날 밤 주역 질리안 머피와 에단 스티펠은 절정기에 막 들어선 커플답게 귀여운 장난기를 앞세워 등장했다. 날듯이 공간을 이동하는 에단 스티펠의 도약에 객석의 탄성이 그치지 않았고 질리안 머피는 32회전 푸에테에서 신기에 가까운 기교를 보였다. 부채를 흔들며 스케이트 회전처럼 빠른 속도로 환호를 불러일으키니 발레기교의 절정을 넘어선 묘기였다. 32박자 동안 한 자리에서 한 다리로 굴러서기를 반복하는 회전기 푸에테는 발레리나들의 평생 과제이자 공포의 대상이다. 이 기량을 완수하는 발레리나들이 많아지면서 한 번에 두 바퀴나 세 바퀴까지도 섞는 경우가 흔해졌지만 질리안 머피처럼 부채를 들고 연속 회전하는 발레리나는 처음 보았다. 그 광경이 너무 놀라워 기예의 강도를 오히려 좀 낮추는 편이 조화롭겠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주역 이외에도 2막 2장 꿈속에 등장한 사랑요정이 경쾌한 춤집으로 발레 연기의 모범을 보였다. 화살을 쏘아 돈키호테가 둘시네아에게 구애하도록 만드는 역할로 금색 가발에 흰 타이즈 의상을 입은 귀여운 모습이다. 숙련된 발레리나만이 빠른 음악을 다양한 호흡으로 조절할 수 있는데, 바로 이 큐피드가 엇박과 정박을 오가며 몸짓을 늘이고 압축하는 춤의 신명을 만들었다. 투우사와 집시로 분장한 남성군무, 투우사의 우두머리 에스파다의 행진도 화려했다. 전 세계적으로 발레하는 남성이 적기 때문에 남성군무의 기량이 고루 뛰어난 단체를 최고로 보는 기준도 나쁘지는 않다. 단체의 명성과 조건이 좋은 남성들을 결집시킨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아메리칸 발레시어터는 다국적 단체다. 미국, 쿠바, 스페인, 프랑스, 이태리, 러시아, 일본, 중국, 한국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전공자들이 모여 있다. 언젠가 한국출신 주역이 탄생하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돈키호테’는 스페인을 배경으로 설정해 성공한 대표적 발레다. 탬버린, 기타, 부채, 투우사와 무희 등 스페인의 색채가 루드비히 밍쿠스의 흥겨운 발레음악과 결합된 스펙터클이다. 배역이 서민적이고, 민속춤이 많고, 들뜬 축제 분위기가 연속되어 각국에서 즐기는 작품이며 한국의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에서도 자주 공연하는 레퍼토리다. 그러나 희극의 특성을 간과하고 주어진 기량을 소화할 능력이 없다면 재미있고 친근한 발레‘돈키호테’의 이미지가 완전히 전복되는 기현상도 발생한다.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의 성공은 우선 작품 해석력이 섬세했고, 관객에게 무엇을 주어 무엇을 얻어낼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거기에 국제적으로 공인된 발레 스타들, 민감한 색감의 무대 장치와 의상, 전문 지휘자까지 고루 갖췄으니 세계최고를 다투는 발레단다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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