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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는 1756년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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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656회 작성일 11-11-1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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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모차르트는 1756년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로서도 활동한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3남 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천재적 재능을 보였던 모차르트는 이미 5세 때 소곡(小曲)을 작곡하였다. 이후 모차르트의 아버지와 함께 유럽 곳곳을 다니면서 음악생활을 하게 된다. 26세인 1782년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수 알로이지아 웨버의 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하였다. 결혼 이후 몇 년간은 그의 전성기로 많은 걸작이 작곡되었다. 오페라에서는 <후궁(後宮)으로부터의 도주(1782)>, <피가로의 결혼(1786)>, <돈 조반니(1787)>, <여자는 모두 이런 것(1790)>, <마적(魔笛, 1791)>, <황제 티투스의 자비(1791)>등이 작곡되었고, 교향곡 분야에서도 <제35번> 이후의 가장 대중적인 6곡, 현악4중주곡 에서는 <하이든 세트>라고 일컬어지는 6곡을 포함한 10여 곡이 작곡되었다. 그러나 차츰 그는 아버지와의 불화, 낭비벽과 사생활 문란 등으로 빚더미에 시달리는 등 빈곤한 삶을 살게 된다. 1791년 건강이 차츰 악화되던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12월 5일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의 장례는 다음날 슈테판대성당 내부의 십자가 소성당에서 거행되었는데, 최후까지 유체를 따라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공동묘지에 매장되어 유해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부인 콘스탄체나 조객들이 묘지까지 따라가지 않은 것은 악천후 때문, 콘스탄체가 충격으로 실성해서 등등.. 여러 설이 많다. 1855년 시 당국이 모차르트 무덤 자리의 조사에 나섰으나 확증은 못 찾은 채 추정 위치인 지금의 성 마르크스묘지 자리에 1859년 기념비를 세웠고, 1891년 이 기념비를 베토벤, 슈베르트 등이 잠든 빈 중앙묘지의 특별 명예묘지 구역 으로 옮긴 뒤, 이 자리에는 1902년에 현재의 묘석을 대신 놓았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모차르트는 1768년에 빈에서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 <La finta semplice(가장한 바보)>와 독일의 징슈필 <Bastien und Bastienne>를 작곡하였다. 이들 오페라는 J. C. 바흐의 오페라와 연주여행을 통해서 알게 된 이탈리아의 오페라에서 감동을 받아 작곡되었다. 이 작품들은 어린 시절에 작곡된 것이어서 구성이나 내용이 미흡하여 모차르트 오페라의 계열에 올리지는 못하지만 이미 이때부터 모차르트는 오페라에 대한 관심과 창작 열의를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오페라 부파(opera buffa), 그리고 징슈필(Singspiel)로 나눌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도 모차르트가 이탈리아의 오페라와 독일 오페라 모두에 능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7편의 오페라 세리아는 성공적인 오페라들은 아니다. 이 오페라들은 전시대의 바로크 오페라를 답습하고 있으며 오페라의 종합성과 음악의 진행 면에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보여 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1781년에 작곡한 오페라 세리아 <Idomeneo (이도메네오)>는 극적인 합창, 아리아와 중창, 발레, 그리고 오페스트라가 적절하게 조합된 우수한 오페라이다. <이도메네오> 이후 작곡된 오페라 세리아는 <La clemenza di Tito (티토의 자비)> 밖에 없다. 이 작품은 1791년 프라하에서 보헤미아의 왕 레오폴드 2세의 대관식을 위해서 위촉받아 작곡된 것이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부파에서 더욱 큰 업적을 이루었다.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조잡한 형태의 오페라 부파를 예술적 수준의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리고 나아가 고전 시대의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로 자리 잡게 하였다. 모차르트의 희극 오페라는 단순한 희극적 오락성을 넘어서서 인간의 내면까지 표현하고 있다. 오페라에 대한 모차르트의 철학은 글룩과는 달랐다. 그는 바로크 시대 오페라의 문제점이나 개혁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듯하며 오페라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극의 내용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에게는 글룩의 주장처럼 음악이 대본의 시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태어난 오페라들이 <Le nozze di Figaro (피가로의 결혼, 1786)>, <Don Giovanni (돈 조반니, 1787)>, <Cosi fan tutte (여자란 다 그런 것, 1790)> 등이다.

폰테(Lorenzo da Ponte)의 대본을 4막으로 구성한 <파가로의 결혼>은 18세기 이탈리아 양식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은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를 위하여 독창 아리아뿐만 아니라 중창을 이용하여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 중창은 성격 묘사 뿐 아니라 극의 진행과 통일성을 가져오게 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경쾌한 서곡에 이어서 등장하는 알마비아 백작(바리톤), 그의 하인 피가로(베이스), 피가로의 애인 수잔자(소프라노), 가정부 마르첼리나(메조소프라노), 의사 바르톨로(바리톤)가 벌이는 사랑 행각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음악으로 인간의 심리를 묘사한 모차르트의 통찰력과 천재적인 창작기법은 이 작품을 단순한 희극 오페라에만 머무르게 하지는 않는다. 프라하에서 대성공을 거둔 <피가로의 결혼> 덕분으로 다른 오페라를 위촉 받았는데 이 작품이 <돈 조반니>이다. 이 오페라는 무절제하게 엽색 행각을 벌이다 결국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돈 주앙(Don Juan)'의 이야기를 대본으로 하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은 타락한 인물이지만 대본가 폰테는 주인공을 낭만적인 인물로 다루면서 권위에 대한 거부와 형식적인 윤리에 대한 냉소를 보내고 자유주의와 개인저의적인 사상을 은밀하게 그리고 있다. <돈 조반니>도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가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희극적인 장면과 비극적인 사건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오페라 부파로 분류되지만 희극과 비극의 혼합이라는 면에서 드라마 지오코조(drama giocoso)라고 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희극 오페라 <여자란 다 그런 것>은 대표적인 오페라 부파이다. 이 작품은 고전주의의 단순하고 명료한 형식감을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음악 요소들로 표현하고 있다. 모차르트만이 가질 수 있는 뛰어난 선율적 감각이 이 오페라에서도 시종 일관된다.

주요작품

오페라
  •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K 492, 1785-86)
  • 돈 조반니(Don Giovanni K 527, 1787)
  • 마적(Die Zauberflöte K620, 1791)
  • 교향곡(<39번> <40번> <41번 쥬피터>
  • 레퀴엠,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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