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니체티 -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사랑의 묘약><돈 파스콸레>와 같은 오페라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사랑을 널리 받고 있다. > 알고봐야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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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니체티 -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사랑의 묘약><돈 파스콸레>와 같은 오페라는 오늘날까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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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518회 작성일 11-11-1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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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etano Donizetti (1797~1848) - 가에타노 도니제티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그가 작곡한 많은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오페라는 롯시니와 베르디를 연결하는 오페라의 발전에 다리를 놓았다. 작품들 중 특히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Lucia di Lammermoor>(1835)<연대의 딸 La fille du régiment>(1840) <라 파보리타 La favorita>(1840) 등이 유명하다. 그의 오페라 세리아(:비극적 혹은 기타 진지한 주제에 의한 이탈리아 정통 오페라)에는 독특한 극적 중량감과 감정적 내용이 잘 표현되고 있으며, 희가극에서도 특유의 재치와 명랑함이 돋보인다. 시(市) 전당포 관리인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나 바이에른의 신부 요한네스 지몬 마이어(베르가모의 주요한 성당인 산타마리아 마지오레의 음악감독이자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가)에게 음악을 처음 배웠다. 합창단원으로서는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그의 잠재된 음악 재능을 높이 산 마이어 신부가 그를 볼로냐에 있는 리체오 필라르모니코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이곳에서 푸가와 대위법을 철저히 공부했으며, 아버지의 소원대로 교회음악 작곡가가 되기 위해 상당히 많은 양의 종교음악을 작곡해보기도 했지만 천성은 오페라 등 극음악에 적합했다. 최초의 성공작은 <보르고냐의 엔리코 Enrico di Borgogna>로 1818년 베네치아의 테아트로 산 루카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이후 12년 동안 작곡한 31개가 넘는 오페라들은 대부분 나폴리에서 공연되었는데 현재 거의 공연되지 않는 상태이다. 1830년 <안나 볼레나 Anna Bolena>를 밀라노에서 공연함으로써 전 유럽 도시와 이후 대서양을 넘어 미국에까지 그의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년 후 그는 당시 최대의 극작가 펠리체 로마니의 대본에 의한 매력적인 희가극 <사랑의 묘약 L'elisir d'amore>으로 또 한번 대성공을 거두었다. 역시 로마니가 대본을 쓴 <루크레치아 보르자 Lucrezia Borgia>(1833)가 또다시 성공하면서 밀라노의 라 스칼라 가극장 등 이탈리아 여러 곳에서 명성을 굳혔다.
오페라 작곡가 롯시니와 벨리니가 그보다 먼저 파리로 간 것처럼 그 역시 이탈리아에서 성공한 후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공연한 <마리노 팔리에로 Marino Faliero>는 실패작은 아니었지만 몇 주 전에 발표된 벨리니의 <청교도 I Puritani>로 인해 그늘에 가린 감이 없지 않다. 이후 그는 뛰어난 비극 오페라<람메르무어의 루치아 Lucia di Lammermoor>(1835. 9. 26)를 작곡하기 위해 나폴리로 돌아갔다. 1828년 로마의 한 친한 친구의 누이 비르지니아 바셀리와 결혼했고, 나폴리에서 가정을 꾸몄다. 1837년 그녀가 아들을 사산하고 죽자 아내를 무척 사랑했던 그는 평생 동안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명의 자식이 태어났으나 1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가족들의 사인은 매독이었는데, 이 병은 훗날 도니체티에게도 죽음을 가져다주었다. 도니체티는 나폴리에서 계속 작품 활동을 하다가 1838년 시 검열관들이 <폴리우토 Poliuto>의 공연을 금지하자(그리스도교 순교를 다룬 이 작품은 종교적 주제가 공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금지되었음) 다시 파리로 갔다. 파리는 벨리니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롯시니가 은퇴한 후였기 때문에, 도니체티에게 있어 좀 더 활동하기 쉬운 무대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몇 가지 성공작을 재공연 했지만 빅토르 위고의 희곡에 바탕을 둔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자 Lucrezia Borgia>는 위고의 반대로 공연되지 못했다. <폴리우토>는 외젠 스크리브의 프랑스 대본으로 <순교자 Les Martyrs>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고, 이보다 2개월 앞서 오페라 코미크 <연대의 딸>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 작품의 인기는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예뉘 린드, 아델리나 파티, 마르첼라 젬브리히, 엠마 알바니 등 당시의 뛰어난 소프라노 가수들이 주역을 맡았다. 같은 해에 파리 오페라 극장은 도니체티의 첫 그란데 오페라 <라 파보리타>를 공연했다.

<마리아 파디야 Maria Padilla>는 도니체티의 동료이자 제자였던 바르톨로메오 메렐리가 라 스칼라 가 극장과 빈의 케른트네르토르 극장의 감독으로 일하면서 후원한 작품이며, 1841년 베르디의 <나부코 Nabucco>가 초연되기 불과 몇 주 전에 공연되었다. 역시 메렐리가 빈의 케른트네르토르 극장에서 공연할 생각으로 후원한 <샤모니의 린다 Linda di Chamounix>는 1842년에 공연되었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황후에게 헌정되었다. 이미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의 소개로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관심을 끌고 있던 상태였고, 롯시니의 <슬픈 성모 Stabat Mater>를 황제 앞에서 지휘한 적도 있었던 도니체티는 이제 오스트리아의 궁정 작곡가로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이 자리에 있으면서 그는 1년 중 6개월을 빈에서 보내고 나머지 6개월은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궁정작곡가로 임명되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그는 롯시니로부터 볼로냐에 있는 리체오 필라모니코 음악원의 원장직을 의뢰받았으나,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해 자신이 좋아하는 오페라 창작 작업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롯시니는 파리에서 언제나 도니체티의 인기를 북돋워주었고, 볼로냐에서 자신이 작곡한 <슬픈 성모>를 초연 하도록 했다. 도니체티는 파리로 돌아와 테아트르 이탈리앵 극장에서 흥겹고 재치 넘치는 희가극 <돈 파스콸레 Don Pasquale>를 공연했다. 그러나 도니체티는 이미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있었다. 1843년에 스크리브의 대본으로 만든 최후의 걸작 오페라인 <돈 세바스티앙 Don Sébastien>이 파리 오페라단에서 공연되던 당시에 이미 만성 두통과 이따금의 정신발작증으로 시달리던 상태였다. 그는 갑자기 늙어갔고 빼어난 용모와 마음의 평정도 잃었다.

<돈 세바스티앙 Don Sébastien>은 신문에 의해 시시한 작품으로 평가되었지만 실제로 오페라 청중에겐 성공적인 호응을 얻었다. 나머지 생애 동안 그는 절망적인 정신착란의 늪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들어 갔다. 그는 파리 근처의 개인 정신병원에 환자로 입원해 있으면서, 프랑스 경찰과 의사들을 애먹였다. 결국 그의 조카 안드레아(맏형의 아들)가 그를 고향 베르가모로 데려왔고, 그곳에서 삶을 연명하다가 1848년 4월 8일 죽었다. 그는 의지력·언어능력·신체조절능력이 상실된 채 대개의 매독환자처럼 정신발작 후유증의 제물이 되었다. 벨리니와는 달리 다른 작곡가들의 성공을 시기하는 법이 없이 언제나 넓은 아량을 지녔던 명랑하고 잘생긴 그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최후였다. 그는 프랑스의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주르날 데 데바 Le Journal des Débats>지에 자신의 음악에 대해 혹독한 평론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빈으로 떠난다고 하자 아주 기꺼이 총리 메테르니히 앞으로 소개장을 써줄 정도로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도니체티는 언제나 평론가들보다는 청중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평생 동안 그가 거둔 성공은 대단한 것이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을 받았다. 도니체티의 인기는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1914년경부터 베르디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걸작들의 빛에 가려져 그의 오페라는 연주 레퍼토리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950년대에 와서 도니체티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게 되었고, 이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사랑의 묘약><돈 파스콸레>와 같은 몇몇 오페라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사랑을 널리 받고 있다.
오페라
  •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 1832)
  • 람메르모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 1835)
  • 연대의 딸(La Fille du régiment, 1840)
  • 돈 파스콸레(Don Pasquale,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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