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적인 사랑을 가장한 복수?-벨리니의 <노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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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1,171회 작성일 11-10-26 15:48본문
기원전 50년, 고르소족이 로마에 침입했을 때 일입니다. 여자로서,그 종파의 고승인 노르마는 로마 총독 폴리오네와 사랑에 빠져 두 아들을 낳고 숨어서 그아이들을 키웁니다.
그러나 이 폴리오네가 마음이 변해 같은 사원에 있는 젊은 여승인 아달지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노르마는 어떻게 해서든 폴리오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지만 그의 마음이 아달지자에게만 가 있는 것을 알자, 두 사람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합니다. 자기자신을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쓴 것입니다. 그것을 본 폴리오네는 뒤늦게 그녀의 사랑에 감격해, 그녀를 따라 불구덩이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노르마의 아버지와 일동이 부르는 합창, " 두 사람의 희생으로 이 사원의 제단이 다시금 깨끗해지는 것 같다"로 막이 내립니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 가장 강렬한 것이 무엇인가,바로 남녀간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혼자 있으면 외로움과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피조물로서 인간이 짊어져야 할 원조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그 외로움과 열등감의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 노력 중에서 가장 강한 유혹이 남녀간의 사랑을 얻는 것입니다. 성이라는 신체적 쾌락 외에도,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내 존재의 외로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사랑에 도전을 받을 때, 다시 말해, 내 사랑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보다 더 치명적인 고통도 없습니다.다시금 외로움과 열등감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자기 존재가 무시되는 아픔 등으로 인해 가장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강력하게 떠오른 감정이 복수의 열망입니다. 노르마 역시 처음에는 그러했습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변심한 남자의 마음을 돌리려 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서는 그를 죽이려고도 합니다.
당연히 그남자는 노르마가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자기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에게까지 비수를 겨누리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노르마의 결정은 평범한 남자의 평범한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결국 그 사랑에 감복해 그녀의 뒤를 따릅니다.
그러나 과연 노르마의 행동이 진정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남자, 자기에게서 이미 마음이 떠난 남자의 행복을 빌어주되, 그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은 살아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괴로움을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은 아닌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기에는 그녀는 아이들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자포자기의 구렁텅이로 빠져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자신이 존재할 때 비로소 이 세상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은 세상을 죽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살하는 사람은 자기를 죽임으로써 자기를 버린 상대방에게 복수하고 세상에 복수하는 것입니다. 자살과 타살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도 그런 심리의 일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노르마의 죽음 역시 겉보기에는 희생적인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은,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의미를 상실한 우울증 환자의 자살이라고 한다면 너무 시니컬한 해석이 될까요?
그러나 이 폴리오네가 마음이 변해 같은 사원에 있는 젊은 여승인 아달지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노르마는 어떻게 해서든 폴리오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하지만 그의 마음이 아달지자에게만 가 있는 것을 알자, 두 사람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합니다. 자기자신을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쓴 것입니다. 그것을 본 폴리오네는 뒤늦게 그녀의 사랑에 감격해, 그녀를 따라 불구덩이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노르마의 아버지와 일동이 부르는 합창, " 두 사람의 희생으로 이 사원의 제단이 다시금 깨끗해지는 것 같다"로 막이 내립니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 가장 강렬한 것이 무엇인가,바로 남녀간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혼자 있으면 외로움과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피조물로서 인간이 짊어져야 할 원조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그 외로움과 열등감의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 노력 중에서 가장 강한 유혹이 남녀간의 사랑을 얻는 것입니다. 성이라는 신체적 쾌락 외에도,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내 존재의 외로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사랑에 도전을 받을 때, 다시 말해, 내 사랑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보다 더 치명적인 고통도 없습니다.다시금 외로움과 열등감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자기 존재가 무시되는 아픔 등으로 인해 가장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가장 강력하게 떠오른 감정이 복수의 열망입니다. 노르마 역시 처음에는 그러했습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변심한 남자의 마음을 돌리려 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서는 그를 죽이려고도 합니다.
당연히 그남자는 노르마가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자기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에게까지 비수를 겨누리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노르마의 결정은 평범한 남자의 평범한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결국 그 사랑에 감복해 그녀의 뒤를 따릅니다.
그러나 과연 노르마의 행동이 진정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남자, 자기에게서 이미 마음이 떠난 남자의 행복을 빌어주되, 그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은 살아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괴로움을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은 아닌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기에는 그녀는 아이들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자포자기의 구렁텅이로 빠져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자신이 존재할 때 비로소 이 세상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은 세상을 죽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살하는 사람은 자기를 죽임으로써 자기를 버린 상대방에게 복수하고 세상에 복수하는 것입니다. 자살과 타살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도 그런 심리의 일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노르마의 죽음 역시 겉보기에는 희생적인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은,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의미를 상실한 우울증 환자의 자살이라고 한다면 너무 시니컬한 해석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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