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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으로 독일 성악계의 황금기를 이끈 프리츠 분덜리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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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음으로써 독일 성악계는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어느 음악평론가의 말처럼 프리츠 분덜리히(1930~1966)의 갑작스런 사망은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 음악계를 일시에 슬픔으로 몰아넣었다. 해맑은 음성으로 20세기 중반 독일 성악계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그의 사인은 계단에서의 실족으로 인한 뇌진탕. 젊고 잘생기고 친근감 있고 낙천적이고 정열적이고 게다가 감미로운 목소리까지 타고난 분덜리히는 늘 수많은 팬들을 몰고 다녔다. 드레스 룸에는 금으로 장식된 개인거울이 있었고 케이크와 질 좋은 포도주와 꽃다발이 항상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가장 화려하게 만개한 순간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성악가로서 절정인 서른여섯 살의 젊은 나이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가난한 음악가의 집에서 태어난 분덜리히는 자연스럽게 노래를 듣고 악기를 배우며 음악과 친숙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생활고에 시달려 자살하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하면서 형편은 더욱 어려워진다. 어린 분덜리히는 빵가게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는 금세 소문이 나고 덕분에 지방의 극단에서 연기와 노래를 하며 성악가로서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비록 혼(Horn) 전공으로 프라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지만 성악적인 재질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발견한 교수가 전공을 바꿀 것을 권했고 비로소 정식으로 성악 공부를 시작한다.
스물네 살에 학교에서 제작한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타미노 역으로 출연하여 유명해진 분덜리히는 재학 중에 이미 오페라극장의 조연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졸업과 동시에 슈투트가르트 국립극장의 단원이 된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오페라 공연이 활발하게 열렸던 이 극장에서 그는 다시 타미노 역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스물아홉 살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 데뷔하여 순식간에 세계적인 리릭 테너로 이름을 얻었다. 세계 각지를 순회하며 짧은 시간 폭 넓은 연주활동을 하였고 곧 특별한 재능을 지닌 테너로서 명성을 확고히 한다. 특히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는 단연 발군의 존재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후 그는 점차 오페라보다는 콘서트와 독창회에서 많은 활동을 펼친다. 리릭 테너의 모든 레퍼토리를 석권하며 독일가곡과 종교음악으로 영역을 넓히고 음반도 다양하게 발표하는 등 바쁜 세월을 보낸다.
1966년 8월의 어느 날, 에든버러에서 독창회를 마치고 그는 불현듯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뮌헨에서 음반 녹음을 한 뒤 하이델베르크 근교의 친구네 별장을 찾는다. 사냥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였다. 별장 계단을 내려오던 그는 발을 헛디뎌 순간적으로 미끄러진다. 중심을 잃고 넘어진 그는 그만 돌계단에 머리를 찧는다.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세기의 테너'는 끝내 깨어나지 못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활약하던 세계적인 테너들 가운데 분덜리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성의 소유자였다. 보석 같이 찬란하고 맑은 음성과 깊이 있는 해석은 천부적이었다. 게다가 그의 발성과 표현은 대단한 서정미를 지니고 있었다. 오페라 '마술피리'의 타미노 역으로 데뷔해서 마지막 무대도 타미노 역으로 장식한 그는 거의 운명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모차르트와 인연이 많았다. 슈베르트·모차르트 등 독일과 오스트리아 작곡가들의 오페라와 종교음악 그리고 가곡에서 그가 들려준 음악은 가히 교과서적인 표준이 되었고 정서적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생기발랄하고 자연스럽게 뽑아내는 아름다운 노래와 함께 분덜리히는 아주 짧은 생애였지만 최고의 리릭 테너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아름다운 음악의 꿈을 심어준 인물이다.
부산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