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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플라이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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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동생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모차르트의 재래라고 불리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파울은 오른팔에 총을 맞는 바람에 오른팔이 없는 피아니스트가 된다. 작곡가 라벨은 그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그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곡을 작곡해 주었는데 이 곡이 바로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라장조'이다. 파울의 연주로 초연된 이 곡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인간 승리의 표본이 되었다. 여기에 영향을 받아 많은 작곡가들이 왼손만을 위한 피아노곡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는 후대의 한 피아니스트에게 커다란 행운이 된다.
미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1928~)는 전형적인 천재이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이 불과 열 살이던 소년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직접 이탈리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려가 피아노를 가르쳤을 만큼 어린 플라이셔의 능력이 굉장했다. 슈나벨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화제를 불러 모을 만큼 그의 앞날은 창창대로였다. 열여섯 살에 뉴욕 필하모니와 협연을 하고 다음해엔 카네기 홀에서 독주회를 연 그는 스물네 살에 세계 3대 피아노콩쿠르 중의 하나인 벨기에의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우승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연주를 하고 세계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유수 오케스트라들과 협연하는 등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30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플라이셔는 손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한다. 피아니스트에겐 생명이랄 수 있는 오른손의 넷째와 다섯째 손가락의 움직임이 현저한 이상을 보였다. 증상은 점점 심해져 나중에는 관객들이 알아차릴 정도였고 결국 이로 인해 그는 서른여섯이란 젊은 나이에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접는다.
충격과 절망에 빠진 그는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인생의 참뜻을 깨닫고 피아노 연주자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음악활동을 재개한다. 교육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피바디 음대와 커티스 음대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냄으로써 그는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아닌 최고의 피아노 교수로 변신에 성공한다. 이론가로서 오른손 마비를 극복하기 위한 연주법과 음악이론으로 인정받고 지휘자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진정한 대가로 거듭난다. 이에 음악계는 그를 살아있는 사람 중 유일하게 미국 클래식음악 명예의 전당에 올림으로써 그의 노고에 경의를 표했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플라이셔는 다시 피아니스트로 재기를 꿈꾼다. 그에겐 아직 왼손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왼손만을 위한 수많은 피아노곡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라벨이 플라이셔에게 남겨준 행운이었다.
플라이셔는 잊혀져 가던 곡들을 차례로 발굴하여 연주함으로써 그 곡들이 지닌 가치를 재조명해냈다. 한편으로 그는 오른손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온갖 치료법을 시험하고 몇차례 재기의 콘서트를 열기도 한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던 그를 하늘은 끝내 버리지 않았다. 최첨단 현대 의학 덕분에 처음에는 병명조차 몰랐던 오른손 증상의 원인과 병명이 밝혀졌다. 병명은 '이긴장증'이란 신경계통질환으로 판명되었고 첨단 신경과치료를 받은 결과 오른손은 결국 연주가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벌써 예순일곱. 연주를 그만둔 지 무려 30년이 넘은 때였다. 여느 연주자라면 은퇴할 나이에 새로운 음악 인생을 연 그는 더욱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치며 음악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레온 플라이셔. 이들은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굽힐 줄 모르는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부산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