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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체코 음악을 대표하는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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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5월 12일, 체코 수도 프라하의 스메타나 홀은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찼다. 객석에는 체코 민주화의 영웅이자 대통령인 하벨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화 이후 다시 열리는 '프라하의 봄' 음악제 개막연주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드디어 일흔여섯 살의 노구를 이끌고 지휘자 라파엘 쿠벨릭(1914~1996)이 등장했다. 서른네 살의 창창한 나이에 조국을 떠난 지 무려 42년. 머나먼 이국땅에서 방랑자처럼 떠돌았던 그가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어 조국 땅을 밟은 것이다. 서른두 살에 제1회 프라하의 봄 음악제 개막을 자신의 손으로 열어젖혔던 그의 눈에서 참았던 회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피 흘리며 어렵게 얻은 자유의 소중함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순간이었다. 객석을 가득 메운 모든 체코인들의 가슴 속에도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20세기 체코음악을 대표하는 지휘자 쿠벨릭의 아버지 얀 쿠벨릭은 매우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쿠벨릭은 불과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지휘자로 데뷔하여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스물두 살 약관의 나이에 체코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체코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가 되자 세계음악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쿠벨릭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하지만 이는 길고 긴 망명과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본 달콤한 시간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가 공산화되고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자 자유를 추구하던 쿠벨릭은 런던공항에서 극적으로 망명에 성공하여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이후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방랑자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 정착한 곳은 영국이었다. 이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스위스 국적을 취득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는다. 하지만 역마살을 타고난 때문인지 어느 한 곳에서도 제대로 머물러 있지 못했다. 시카고에서도 음악적인 견해로 인해 3년 만에 사임하고 또다시 정처 없이 보따리 장수를 시작한다.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유럽으로 돌아와 영국 코벤트가든 왕립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어 많은 열정을 쏟아 부었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그 후 쿠벨릭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가 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무려 11년 동안 왕성한 음악활동을 펼치며 수많은 녹음과 연주여행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무른 곳이었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를 사임한 후엔 또다시 여기저기를 떠돌며 객원지휘만 했을 뿐 더 이상 책임 있는 자리를 맡지 않았다.
42년의 망명생활 끝에 쿠벨릭이 다시 돌아간 곳은 결국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체코였다. 젊은 시절 조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떠난 후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다시금 조국의 품에 안긴 것이다. 1990년 체코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그는 고국에 돌아와 그 옛날 자신을 진정한 지휘자로 만들어준 체코 필의 총감독을 다시 맡아 생의 마지막을 불태우며 조국의 음악발전에 힘쓰다 여든두 살의 나이로 타계한다.
명쾌하고 스피디하면서도 부드럽고 세련된 멋을 풍기는 명지휘자 쿠벨릭은 평생토록 자유로운 예술혼을 추구하였고 이에 정치적 망명도 불사한 '자유인'이었다. 이념으로 엇갈려 거칠기만 했던 역사의 풍랑 속에 자신을 내던져 여기저기 부딪치며 살아 왔지만 그는 자신만의 예술혼을 지키고자 처절하게 노력하였고 또한 자신의 조국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뜨거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부산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