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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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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669회 작성일 10-04-28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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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
조연으로 빛난 반주 전문 피아니스트
88세 세상 떠날 때까지 수많은 독주·성악가 뒤에서 그들의 연주·노래 뒷받침
"내가 너무 크게 쳤나"며 은퇴무대서도 '겸손' 드러내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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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든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엔 오히려 조연에 머물면서 어떤 주인공들도 이루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해내는 인물이 있다. 약방의 감초와 같은 조연은 비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않지만 든든한 조력자로서 주연을 더욱 빛나게 한다.

1967년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클래식 역사상 가장 이채로우면서도 더없이 기품 있고 따뜻한 연주회가 열렸다. 40여 년 동안 오로지 다른 연주자를 돋보이게 해준 한 반주자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한 음악회였다. 이름 하나만으로도 클래식 애호가들을 설레게 하는 불세출의 스타들이 앞다투어 이 무대에 등장했다. 세계적인 성악가들은 자신을 위해 평생 반주를 해준 그를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소리로 '반주'를 해주었다. 마지막 순간 노신사가 천천히 무대로 걸어 나왔고 관중들은 홀로 무대에 선 그를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곧이어 직접 피아노독주로 편곡한 슈베르트의 가곡 '음악에 붙임'이 연주됐고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그의 연주는 연주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1899~1987·사진)가 바로 이 연주회의 주인공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도 청년시절에는 화려한 독주자의 길을 동경했다. 하지만 스무 살 때 한 지휘자의 권유로 반주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음악 역사상 최초의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은퇴할 때까지 40여 년의 긴 세월을 오로지 반주자로서의 외길을 걸었다. 그가 반주자로 데뷔할 당시만 해도 프로그램과 음반에조차 반주자의 이름이 인쇄되지 않을 만큼 그 지위는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실력을 갖춘 반주자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했다. 반주자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마치 십자군의 기사처럼 잘못된 관행과 싸워야 했고 그러기 위해 모든 수치심을 버리고 애써 당당하게 무대에 나서야 했다. 그 결과 제럴드 무어라는 이름은 그 어떤 독주자에 못지않은 당당함을 얻게 됐고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은 그의 반주로 연주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가 자신들의 연주를 그 누구보다 빛내주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무어는 기존의 단순한 반주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협연자의 경지로 반주 예술을 끌어 올렸다.

기악의 반주뿐만 아니라 성악, 특히 가곡의 반주는 단지 노래를 받쳐 줄 뿐만 아니라 노래를 끌어내고 빛을 발하게 하는 구실을 한다. 최고의 성악가들이 다투어 무어의 반주를 받고자 원했던 까닭은 그가 이러한 반주의 원리에 투철하였기 때문이며 또 그만큼 탁월한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그가 어느 젊은 예술가와 새로 리사이틀을 열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새로운 별이 떠오르는군"이라고 말했다.

반주가 유명한 성악가들의 노래에 누를 끼치지는 않는지 항상 염려하던 인물. 자신의 은퇴 무대에서 "내가 너무 크게 쳤나요?"라고 말해 관객의 폭소를 자아낸 인물. 반주자라는 직업의 가치와 중요성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 여든여덟 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무어는 수많은 독주자 뒤에서 그들의 연주가 빛을 발하도록 뒷받침했다. 그 누구보다 훌륭한 기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묵묵히 다른 사람들을 빛내는 조연에 만족하는 삶을 산 것이다. 그의 삶은 진정한 예술이란 '겸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깨닫게 해 주었다. 단 한 번의 독주회도 가지지 않고 오직 반주자로서 평생을 보낸 그는 비록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아닐지 몰라도 가장 훌륭한 음악가임에는 틀림없다.

부산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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