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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피아니스트 어빈 니레지하치는 우여곡절 많은, 비운의 음악 인생을 살다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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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빈 니레지하치(1903~1987). 음악계에 등장했던 그 어떤 천재들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은 천재 중의 천재 피아니스트. 그를 모델로 삼아 펴낸 '음악 신동의 심리학'이라는 저서에서 저자 레베즈 박사는 '어린 시절의 니레지하치는 모차르트에 견줄 만하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이런 놀라운 신동이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던 니레지하치는 이제는 망각의 존재가 되고 말았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였고 여섯 살 때 스스로 작곡한 피아노곡을 연주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여덟 살에 영국 왕실의 초청을 받아 버킹검궁의 여왕 앞에서 연주회를 가졌고 열다섯 살 때 세계 최고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데뷔공연을 가진 신동의 대명사였다. 겉보기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순탄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명성이 높아지자 어머니는 그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오로지 피아노 연주만 강요하는 어머니 때문에 그는 철저히 세상과 단절됐다. 여기에 언제나 아들 편을 들어주던 아버지가 그의 나이 열한 살 때 세상을 떠나자 모자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한 니레지하치는 '리스트 이래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라며 관객과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그의 선풍적인 인기는 카네기홀 데뷔 공연으로 이어졌고 성공적인 공연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일류 피아니스트의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니레지하치 앞에 놓인 것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이 천재소년은 피아노 외에는 세상 물정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돈밖에 모르는 어머니에게 착취당하던 백치소년은 계약금이 얼마이며 그것이 누구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지 일절 알지 못했다. 악덕흥행업자들은 그의 이런 순진함을 악용했다. 이들은 악랄한 사기를 서슴지 않아 곳곳에서 선풍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키던 그였지만 주머니는 늘 텅 비어있었다. 때로는 굶주리고 때로는 지하철에서 새우잠을 자야 하는 신세였다. 세상의 환호는 받았지만 따뜻한 배려는 받지 못했다. 격찬은 받았어도 진심어린 충고는 받지 못했다.
또 하나의 불행한 일은 그가 광적으로 리스트의 곡에만 매달린 점이다. 선한 흥행업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리스트에만 집착하는 바람에 청중들은 그를 차츰 외면했다. 그럴수록 그는 악덕 흥행업자들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어떤 사기꾼은 그를 서커스단에 끌어들여 누구든 복잡한 음표들이 휘갈겨진 악보를 가지고 오면 즉석에서 이를 연주하게 하는 희한한 쇼에 출연시키기까지 했다.
자연히 그의 재능은 점차 소진돼 갔다. 니레지하치는 로스앤젤레스의 빈민가의 작은 방에 머물면서 피아노도 없이 생활했다. 가끔 할리우드 영화 스튜디오에서 연주하며 끼니를 때웠고 연주하지도 않는 피아노곡을 무려 700곡이나 작곡한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슬픔의 골이 깊어갔고 마침내 그는 음악계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미 몸과 마음이 황폐해져 있던 니레지하치는 끝내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피아노 앞을 떠난다. 그 후 그는 뉴욕의 부두에서 하역노동자로 일하거나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부랑아로 전락한다. 이 무렵 아무도 니레지하치를 왕년의 신동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나이 서른 살 때다.
니레지하치는 사랑에도 서툴러서 아홉 번이나 결혼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던 데다가 내성적이고 또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해 여성들에게 부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는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 줄 데가 없는 외로운 이방인이었다.
부산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