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와트의 신비로운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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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551회 작성일 11-01-0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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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지은 거대한 왕국 앙코르와트. 현대인들의 무지와 오만으로 상처 입은 앙코르 유적지는 역사나 미학을 모르는 무지렁이에게도 울림이 크다. 쓰러져가는 사원 귀퉁이에 앉아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부처를 보면 어느새 역사의 ‘비밀의 문’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밀림 속 사원, 서구의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다
1850년 6월 프랑스 뷰오 신부가 캄보디아에서 본국에 전령을 보냈다. 캄보디아 똔레삽 호수 근처에서 거대한 유적지를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 소식을 간단히 무시해버렸다. 어떻게 캄보디아 같이 작은 나라에서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더 큰 사원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뷰오 신부가 미쳤다고 했다. 열병에 걸려 헛소리한다는 핀잔도 받았다. 뷰오 신부는 몇 해 뒤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뷰오 신부의 말이 사실로 확인된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861년이다. 프랑스 학자 앙리무어가 캄보디아의 밀림을 탐험하다 우연히 거대한 성곽을 발견했다. 문 앞에는 거대한 석상들이 서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알듯 말듯한 신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상들이 보였다.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규모였다.
사원 너머에 사원이 있고, 여기저기 사원이 흩어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사원이 수백 년 동안 감쪽같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누가 이런 사원을 만들었는가? 화려하고 정교한 벽화는 누가 언제 왜 그린 것인가? 앙코르와트를 꼼꼼하게 눈여겨본 앙리무어는 프랑스에 돌아와 탐험기를 책으로 냈다. 그의 책이 출간되자마자 서구의 고고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학자들은 말문이 막혔다.
베일에 가려진 거대한 왕국
앙코르와트 사원 하나만 보자. 7톤짜리 기둥 1천8백개, 돌로 된 방은 2백60개나 된다. 슈퍼컴퓨터로 설계하는 데만 2년이 걸린다는 사원은 불과 37년 만에 지어졌다. 요즘 건축가들도 고개를 흔든다.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유적지는 어떻게 건설됐을까? 현지인들은 천연덕스럽게 신들이 지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런 거대한 왕국이 어떻게 감쪽같이 사라졌을까?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었다.
앙코르 유적을 세운 캄보디아인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도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 전염병 때문이라는 학자도 있고,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앙코르인들을 다 죽이고 떠났다는 학설도 있다. 베트남과 라오스, 몽골, 태국의 잇단 침략에 수도를 옮겼다는 학설이 있지만 1백만 명의 대이동이라면 인접 국가가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인접국의 역사에도 나올 법한데 아직 어떠한 단서도 없다. 전염병이라면 유골이라도 남아 있을 법한데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앙코르와트가 발견된 지 올해로 1백5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앙코르 유적지에 대한 역사는 베일에 가려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특수 레이더 장비로 비행기에서 항공 촬영한 데이터를 종합 분석, 선사시대의 앙코르 문명 흔적들이 드러났다고 발표했지만 이 역시 추측일 뿐이다.
그렇다고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3세기 원나라 사신 주달관이 이 나라를 여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학자들은 앙코르 왕국이 9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앙코르 유적지 일대의 인구는 무려 1백만 명. 당시 파리나 런던이 10만~20만 명에 불과했다니 얼마나 그들의 문화가 화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주달관이 쓴 기행문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왕궁의 중앙에는 황금탑이 우뚝 서 있고, 주변은 12개가 넘는 작은 탑과 돌로 만든 수백 개의 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략) 외국에서 온 상인들마다 앙코르 제국은 참 부유하고도 장엄한 나라라며 감탄했다.”
아마도 유럽의 학자들은 이 부분에서 혼이 쏙 빠진 모양이다. 황금탑이 있다니 먼저 차지하는 놈이 임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실 당시의 고고학자들은 문화재 컬렉션이란 명목으로 약소국의 문화재를 훔쳐갔다. 19세기 말 실크로드의 둔황석굴 탐험에 나선 헝가리 출신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미국의 워너 같은 탐험가 역시 문화재를 빼돌리는 데 앞장선 약탈자였다(한국의 국립박물관이 실크로드 벽화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일본 오타니가 둔황석굴에서 훔쳐와 서울에 놓아둔 것들이다). 앙리 무어도 진랍풍토기를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앙코르 왕국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불상의 미소 속에서 미스터리를 풀다
앙코르 유적지의 관문은 앙코르 톰이다. 성문으로 이어진 다리에는 27개의 석상이 서 있는데 뱀이 도망가지 못하게 누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모습에 사람들은 기가 죽는다. 이걸 보고 뷰오 신부는 악마의 성을 보았다고 했다. 그만큼 음산하고 으스스하다.
하지만 성내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처음에 나오는 사원이 바욘 사원이다. 바욘은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가 지은 사원. 처음엔 힌두사원이라고 알려졌지만 나중에 불교사원으로 밝혀졌다. 자야바르만 7세는 스스로를 관음부처로 생각했다고 한다. 54개의 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36개만 남아 있다. 탑마다 4면으로 관음부처의 얼굴을 새겼다. 관음불은 모두 2백16개나 된다.
각기 다른 표정을 가진 부처의 모습이 때로는 편안하고 때로는 섬뜩하다. 사원 어느 곳에 있든지 웃는 듯, 노려보는 듯한 기묘한 표정의 부처상들이 여행자들을 바라본다. 아무리 찾아봐도 두 눈을 가리지 않고서는 부처의 눈길을 피할 곳이 없다. 알듯 말듯한 불상의 미소 속에 사원의 미스터리를 풀 열쇠가 숨어 있는 듯하다.
바욘 사원은 벽화도 정교하다. 태국 남부와 라오스, 베트남 일부까지 진출한 크메르인들은 붉은빛이 도는 홍토로 기초를 다진 뒤 사암을 깎아 피라미드형 사원을 올리고 왕궁을 만들었다. 홍토를 물과 섞으면 바위처럼 단단해진다. 면도날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이 바위 벽돌을 정교하게 쌓았고, 벽마다 신화와 역사를 새겼다. 내용은 전쟁과 삶 같은 것도 있고, 힌두 신화도 있다. 마라야나 같은 인도의 대서사시도 벽화로 남아 있다.
바욘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는 앙코르와트는 이 일대 유적의 하이라이트다. 동서로 약 1,500m, 남북으로 약 1,300m의 터에 높이 65m의 중앙탑이 서 있다. 앙코르는 성, 와트는 사원이란 뜻이다.
파괴의 상처로 얼룩진 神의 걸작
앙코르와트는 규모도 크지만 건축학적으로 완성도도 높다. 앙코르와트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좁다. 어른 발 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두손 두발을 다 써야 한다. 왜냐고 물었더니 인간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게끔 설계했다는 것이다. 사원에서는 아직도 예불을 드리는 승려가 있다. 관광객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예불에 열중인 승려도 있고, 관광객의 물음에 진지하게 답하는 승려도 있다.
앙코르는 한눈에 다 볼 수 없다. 아침저녁 느낌이 다르다. 앙코르와트엔 아예 새벽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전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사원 귀퉁이에 앉아 여명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앙코르와트를 바라본다. 천년 유적지에서 사원을 바라보는 신비는 큰 감동이다.
앙코르와트 외에도 이 일대엔 무려 1천여 개의 사원이 있다고 한다. 각기 느낌이 다르다.
타 프롬도 필수 코스다. 앙코르와트보다 타 프롬이 더 아름답다는 여행자들도 많다. 조각이 아름답다거나, 신전이 화려해서가 아니다. 타 프롬은 유네스코조차 복원작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무너지고 있는 사원이다. 기둥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기울었고, 신화 속 주인공들이 새겨진 조각상들이 부서지고 깨져서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게다가 스펑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나무가 뿌리로 유적지를 친친 동여매고 있다. 비록 성한 곳 하나 찾을 길 없지만 사원에 들어서니 전투가 막 끝나고 난 파괴된 신전에 서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이런 신비한 모습 때문에 영화 ‘툼 레이더’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눈길을 주는 곳마다 파괴의 상처가 또렷해서 괜히 가슴이 뭉클해진다.
반테이 스레이도 아름다운 사원이다. 반테이 스레이는 앙코르와트나 앙코르톰과 20km 정도 떨어져 있는 까닭에 1910년에 발견됐다. 다른 사원들은 검은 돌로 이뤄진 데 반해 반테이 스레이는 붉은빛을 띠고 있다. 반테이 스레이는 ‘여인의 성’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사원에 새겨진 여신상들이 너무 정교하고 아름답기 때문. 특히 한쪽으로 머리를 쓸어내린 압살라 여인상은 ‘앙코르의 보석’이라고 불린다. 반테이 스레이에 홀딱 빠진 앙드레 말로는 몰래 조각상을 훔쳐가려다 붙잡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지금은 잿빛 유니폼을 입은 여경들이 다 무너진 창틀에 걸터앉아 사원을 지키고 있다. 씁쓸하다.
상식이 조각조각 해체되는 거대한 미로
앙코르 유적지에 가면 현대인들의 무지와 오만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일본인들은 바욘 사원을 복원한다며 무작정 해체했다가 조립을 잘못 하는 바람에 원형을 훼손, 비가 줄줄 샌다. ‘멍청한’ 일본인들이 다보탑을 무작정 해체했다가 원형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것과 똑같다(현재 다보탑은 원형 그대로가 아니라고 한다. 다 조립하고도 부속 돌덩이가 남아버렸다니 할말이 없다). ‘예술의 나라’란 자부심이 대단한 프랑스인들은 어이없게도 앙코르와트 사원 천장에 시멘트를 발랐다. 앙코르 천장을 무도회장처럼 꾸몄다. 지금도 일본과 독일 등 각국에서 복원작업을 하고 있지만 크메르인들의 뛰어난 건축술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어쨌든 앙코르 유적지는 미로(迷路)다. 거대한 사원 앞에 서면 상식(常識)이 조각조각 해체되고 힌두 전설이 새겨진 벽화와 마주하면 역사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신화의 세계에 빠져들고 만다. 비록 역사가나 미술학자들이 찬사를 보내는 유적지라도 보통사람들에겐 큰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 많지만 앙코르 유적지는 역사나 미학을 모르는 무지렁이에게도 울림이 크다. 사원에선 시간의 끈을 놓치고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오가며 헤매게 된다. 신화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를 이어주는 ‘비밀의 문’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앙코르 유적지는 아마도 신이 만들어놓은 퍼즐인 모양이다. 다 쓰러진 사원 귀퉁이에 앉아서 멍하니 조각상을 보고 있거나 꼼꼼하게 책을 읽으며 해답을 얻으려고 해도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없다.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부처와 압살라 여신이 “한 번에 산 하나밖에 담을 수 없는 인간의 작은 눈으로 세상을 다 봤다고 하는가?”라고 묻는 것 같다.
밀림 속 사원, 서구의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다
1850년 6월 프랑스 뷰오 신부가 캄보디아에서 본국에 전령을 보냈다. 캄보디아 똔레삽 호수 근처에서 거대한 유적지를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 소식을 간단히 무시해버렸다. 어떻게 캄보디아 같이 작은 나라에서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더 큰 사원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뷰오 신부가 미쳤다고 했다. 열병에 걸려 헛소리한다는 핀잔도 받았다. 뷰오 신부는 몇 해 뒤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뷰오 신부의 말이 사실로 확인된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861년이다. 프랑스 학자 앙리무어가 캄보디아의 밀림을 탐험하다 우연히 거대한 성곽을 발견했다. 문 앞에는 거대한 석상들이 서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알듯 말듯한 신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상들이 보였다.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규모였다.
사원 너머에 사원이 있고, 여기저기 사원이 흩어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사원이 수백 년 동안 감쪽같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누가 이런 사원을 만들었는가? 화려하고 정교한 벽화는 누가 언제 왜 그린 것인가? 앙코르와트를 꼼꼼하게 눈여겨본 앙리무어는 프랑스에 돌아와 탐험기를 책으로 냈다. 그의 책이 출간되자마자 서구의 고고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학자들은 말문이 막혔다.
베일에 가려진 거대한 왕국
앙코르와트 사원 하나만 보자. 7톤짜리 기둥 1천8백개, 돌로 된 방은 2백60개나 된다. 슈퍼컴퓨터로 설계하는 데만 2년이 걸린다는 사원은 불과 37년 만에 지어졌다. 요즘 건축가들도 고개를 흔든다.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유적지는 어떻게 건설됐을까? 현지인들은 천연덕스럽게 신들이 지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런 거대한 왕국이 어떻게 감쪽같이 사라졌을까?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었다.
앙코르 유적을 세운 캄보디아인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도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 전염병 때문이라는 학자도 있고,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앙코르인들을 다 죽이고 떠났다는 학설도 있다. 베트남과 라오스, 몽골, 태국의 잇단 침략에 수도를 옮겼다는 학설이 있지만 1백만 명의 대이동이라면 인접 국가가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인접국의 역사에도 나올 법한데 아직 어떠한 단서도 없다. 전염병이라면 유골이라도 남아 있을 법한데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앙코르와트가 발견된 지 올해로 1백5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앙코르 유적지에 대한 역사는 베일에 가려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특수 레이더 장비로 비행기에서 항공 촬영한 데이터를 종합 분석, 선사시대의 앙코르 문명 흔적들이 드러났다고 발표했지만 이 역시 추측일 뿐이다.
그렇다고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3세기 원나라 사신 주달관이 이 나라를 여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학자들은 앙코르 왕국이 9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앙코르 유적지 일대의 인구는 무려 1백만 명. 당시 파리나 런던이 10만~20만 명에 불과했다니 얼마나 그들의 문화가 화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주달관이 쓴 기행문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왕궁의 중앙에는 황금탑이 우뚝 서 있고, 주변은 12개가 넘는 작은 탑과 돌로 만든 수백 개의 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략) 외국에서 온 상인들마다 앙코르 제국은 참 부유하고도 장엄한 나라라며 감탄했다.”
아마도 유럽의 학자들은 이 부분에서 혼이 쏙 빠진 모양이다. 황금탑이 있다니 먼저 차지하는 놈이 임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실 당시의 고고학자들은 문화재 컬렉션이란 명목으로 약소국의 문화재를 훔쳐갔다. 19세기 말 실크로드의 둔황석굴 탐험에 나선 헝가리 출신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미국의 워너 같은 탐험가 역시 문화재를 빼돌리는 데 앞장선 약탈자였다(한국의 국립박물관이 실크로드 벽화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일본 오타니가 둔황석굴에서 훔쳐와 서울에 놓아둔 것들이다). 앙리 무어도 진랍풍토기를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앙코르 왕국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불상의 미소 속에서 미스터리를 풀다
앙코르 유적지의 관문은 앙코르 톰이다. 성문으로 이어진 다리에는 27개의 석상이 서 있는데 뱀이 도망가지 못하게 누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모습에 사람들은 기가 죽는다. 이걸 보고 뷰오 신부는 악마의 성을 보았다고 했다. 그만큼 음산하고 으스스하다.
하지만 성내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처음에 나오는 사원이 바욘 사원이다. 바욘은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가 지은 사원. 처음엔 힌두사원이라고 알려졌지만 나중에 불교사원으로 밝혀졌다. 자야바르만 7세는 스스로를 관음부처로 생각했다고 한다. 54개의 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36개만 남아 있다. 탑마다 4면으로 관음부처의 얼굴을 새겼다. 관음불은 모두 2백16개나 된다.
각기 다른 표정을 가진 부처의 모습이 때로는 편안하고 때로는 섬뜩하다. 사원 어느 곳에 있든지 웃는 듯, 노려보는 듯한 기묘한 표정의 부처상들이 여행자들을 바라본다. 아무리 찾아봐도 두 눈을 가리지 않고서는 부처의 눈길을 피할 곳이 없다. 알듯 말듯한 불상의 미소 속에 사원의 미스터리를 풀 열쇠가 숨어 있는 듯하다.
바욘 사원은 벽화도 정교하다. 태국 남부와 라오스, 베트남 일부까지 진출한 크메르인들은 붉은빛이 도는 홍토로 기초를 다진 뒤 사암을 깎아 피라미드형 사원을 올리고 왕궁을 만들었다. 홍토를 물과 섞으면 바위처럼 단단해진다. 면도날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이 바위 벽돌을 정교하게 쌓았고, 벽마다 신화와 역사를 새겼다. 내용은 전쟁과 삶 같은 것도 있고, 힌두 신화도 있다. 마라야나 같은 인도의 대서사시도 벽화로 남아 있다.
바욘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는 앙코르와트는 이 일대 유적의 하이라이트다. 동서로 약 1,500m, 남북으로 약 1,300m의 터에 높이 65m의 중앙탑이 서 있다. 앙코르는 성, 와트는 사원이란 뜻이다.
파괴의 상처로 얼룩진 神의 걸작
앙코르와트는 규모도 크지만 건축학적으로 완성도도 높다. 앙코르와트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좁다. 어른 발 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두손 두발을 다 써야 한다. 왜냐고 물었더니 인간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게끔 설계했다는 것이다. 사원에서는 아직도 예불을 드리는 승려가 있다. 관광객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예불에 열중인 승려도 있고, 관광객의 물음에 진지하게 답하는 승려도 있다.
앙코르는 한눈에 다 볼 수 없다. 아침저녁 느낌이 다르다. 앙코르와트엔 아예 새벽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전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사원 귀퉁이에 앉아 여명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앙코르와트를 바라본다. 천년 유적지에서 사원을 바라보는 신비는 큰 감동이다.
앙코르와트 외에도 이 일대엔 무려 1천여 개의 사원이 있다고 한다. 각기 느낌이 다르다.
타 프롬도 필수 코스다. 앙코르와트보다 타 프롬이 더 아름답다는 여행자들도 많다. 조각이 아름답다거나, 신전이 화려해서가 아니다. 타 프롬은 유네스코조차 복원작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무너지고 있는 사원이다. 기둥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기울었고, 신화 속 주인공들이 새겨진 조각상들이 부서지고 깨져서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게다가 스펑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나무가 뿌리로 유적지를 친친 동여매고 있다. 비록 성한 곳 하나 찾을 길 없지만 사원에 들어서니 전투가 막 끝나고 난 파괴된 신전에 서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이런 신비한 모습 때문에 영화 ‘툼 레이더’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눈길을 주는 곳마다 파괴의 상처가 또렷해서 괜히 가슴이 뭉클해진다.
반테이 스레이도 아름다운 사원이다. 반테이 스레이는 앙코르와트나 앙코르톰과 20km 정도 떨어져 있는 까닭에 1910년에 발견됐다. 다른 사원들은 검은 돌로 이뤄진 데 반해 반테이 스레이는 붉은빛을 띠고 있다. 반테이 스레이는 ‘여인의 성’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사원에 새겨진 여신상들이 너무 정교하고 아름답기 때문. 특히 한쪽으로 머리를 쓸어내린 압살라 여인상은 ‘앙코르의 보석’이라고 불린다. 반테이 스레이에 홀딱 빠진 앙드레 말로는 몰래 조각상을 훔쳐가려다 붙잡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지금은 잿빛 유니폼을 입은 여경들이 다 무너진 창틀에 걸터앉아 사원을 지키고 있다. 씁쓸하다.
상식이 조각조각 해체되는 거대한 미로
앙코르 유적지에 가면 현대인들의 무지와 오만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일본인들은 바욘 사원을 복원한다며 무작정 해체했다가 조립을 잘못 하는 바람에 원형을 훼손, 비가 줄줄 샌다. ‘멍청한’ 일본인들이 다보탑을 무작정 해체했다가 원형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것과 똑같다(현재 다보탑은 원형 그대로가 아니라고 한다. 다 조립하고도 부속 돌덩이가 남아버렸다니 할말이 없다). ‘예술의 나라’란 자부심이 대단한 프랑스인들은 어이없게도 앙코르와트 사원 천장에 시멘트를 발랐다. 앙코르 천장을 무도회장처럼 꾸몄다. 지금도 일본과 독일 등 각국에서 복원작업을 하고 있지만 크메르인들의 뛰어난 건축술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어쨌든 앙코르 유적지는 미로(迷路)다. 거대한 사원 앞에 서면 상식(常識)이 조각조각 해체되고 힌두 전설이 새겨진 벽화와 마주하면 역사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신화의 세계에 빠져들고 만다. 비록 역사가나 미술학자들이 찬사를 보내는 유적지라도 보통사람들에겐 큰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 많지만 앙코르 유적지는 역사나 미학을 모르는 무지렁이에게도 울림이 크다. 사원에선 시간의 끈을 놓치고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오가며 헤매게 된다. 신화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를 이어주는 ‘비밀의 문’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앙코르 유적지는 아마도 신이 만들어놓은 퍼즐인 모양이다. 다 쓰러진 사원 귀퉁이에 앉아서 멍하니 조각상을 보고 있거나 꼼꼼하게 책을 읽으며 해답을 얻으려고 해도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없다.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는 부처와 압살라 여신이 “한 번에 산 하나밖에 담을 수 없는 인간의 작은 눈으로 세상을 다 봤다고 하는가?”라고 묻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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