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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엽서 속 그곳! 노르웨이의 게이랑에르 피요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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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688회 작성일 11-01-1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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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피요르드는 늘 ‘월드 베스트 100 여행지’에 드는 곳이다. 피요르드는 남국의 바다와는 다른 멋이 있다. 스케일도 커서 자연이란 정말 장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노르웨이에는 많은 피오르드 해안이 있지만 관광객에게 알려진 것은 게이랑에르, 송네, 하당에르, 리세 이렇게 4대 피요르드다. 다 이야기할 수는 없고 이번엔 게이랑에르 피요르드만 둘러보자. 게이랑에르 피요르드의 출발점은 올레순이란 도시다. 올레순은 굉장히 아름다운 도시다. 굳이 피요르드 투어가 아니라도 여행해볼 만한 곳이다. 자, 올레순부터 들러보자.


건축물들이 멋스러운 아르누보의 도시 올레순(Ålesund)
아마 고교 시절 배운 아르누보란 미술 사조를 들어봤는지도 모르겠다. 아르누보는 1890~1910년에 유행했던 미술운동으로 영국에서 시작됐다. 꽃줄기와 포도덩굴, 곤충의 날개 장식같이 비대칭적 곡선을 많이 사용하며 건축뿐 아니라 유리 디자인, 가구 등 다양한 영역에 파고들었다. 그런데 올레순이 아르누보 시티가 된 데는 슬픈 스토리가 있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귀족과 신흥 자본가 사이에선 세계 여행이 붐을 이뤘다. 자본이 축적됐고 먹고 살 만하니 세상 구경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게이랑에르 피요르드도 당시에 꽤 유명한 관광 명소였다. 이미 150년 전부터 관광객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피요르드의 전초 기지였던 올레순은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도시는 활력이 넘쳤다. 불행이 시작된 것은 1904년 1월 23일 새벽 2시 15분 마가린 공장에서 불이 났다. 당시의 건축물들은 대개 나무였다. 불길은 바닷바람을 타고 나무 집들을 하나하나 삼키기 시작했다. 이튿날 오후 5시에 불은 꺼졌으나 1천여 채의 가옥 중 850채가 불에 탔다. 주민 1만2천 명 중 1만여 명이 이재민이 됐다. 소방서 옆에 살던 노파 한 사람만 사망했다. 인명 피해가 적은 게 그나마 기적이었다.

올레순이 잿더미가 됐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유럽 곳곳으로 퍼졌던 모양이다. 유럽 각국은 재빨리 구호의 손길을 내밀었다. 독일의 빌헬름 2세가 보낸 구호선은 화재 발생 이틀 만에 올레순에 도착했다. 대체 이 작은 마을을 돕기 위해 어떻게 유럽 각국이 발 빠르게 움직였을까?

“독일 황제는 게이랑에르 피요르드를 7번이나 방문했습니다. 게이랑에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죠.”

1900년대 초 이미 세계적인 여행지였던 올레순은 요즘으로 치면 해일에 희생된 푸케트와 비교할 수 있겠다. 유럽인들의 관심도 많았기에 원조도 빨리 이뤄졌던 것이다. 게다가 올레순 경제가 타격을 입으면 유럽에도 영향이 있었다. 올레순은 세계 최고의 대구 어장으로도 유명했고, 지금도 노르웨이 최대의 항구다. 세계 최고의 대구 수출항이다.

유럽의 원조 중에는 현물 원조도 많았다. 우리나라 수해 현장에 생수나 옷가지를 전해주듯이 유럽인들은 새집을 지을 때 쓰라고 경첩이나 문고리 같은 건축 자재도 많이 보냈다. 당시 정부는 국가 재정을 쏟아 부어 마을을 재건했다.

세계 각국에서 공부한 노르웨이 건축가 50여 명을 불러 다양한 모양의 집을 지었다. 이 때 세계에서 가장 유행했던 사조가 아르누보. 아르누보는 요즘말로 바꾸면 뉴아트(New Art), 새로운 예술이란 뜻이다. 건축가들은 당시 미술사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때 지은 집들은 겉멋을 많이 부렸다. 한 건물에 같은 모양의 창이 없고, 장식도 아기자기하다. 지혜를 상징하는 부엉이를 새겨 넣는가 하면 병원이었음을 상징하는 꽈배기 모양의 장식도 보인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로맨티시즘의 영향이다.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은 건축물만 보고 아르누보 양식임을 눈치 채긴 힘들다. 이런 집이 하나만 있었다면 어쭙잖게 멋을 내고 촌스럽다고도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수백 채가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건축 학도에겐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일반 관광객이 보기에는 호텔이나 아파트로 개조한 어선 창고가 더 아름다울 것이다. 노란색과 붉은색을 칠한 건물들은 어느 만화영화의 세트장이라 해도 믿어질 정도로 귀엽다. 창고 앞 수로에는 범선과 요트가 정박해 있다. 마을 전경은 악슬라산 전망대에 오르면 잘 보인다. 마을은 반도처럼 쭉 뻗어 있고,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이 퍼져 있다. 100년 안팎의 건축물들의 뾰족 지붕들을 찬찬히 뜯어보면 마치 형형색색의 로고 블록을 마을에 꿰어 맞춘 것처럼 보인다. 도시는 너무 크면 헤벌어져서 짜임새가 없다. 올레순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도시다. 인구가 4만2천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 도시는 산책을 하면서 찬찬히 뜯어봐야 한다. 중심가에는 키를 맞춘 100년 안팎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겉모습은 비슷한데 장식은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게 없다.

장엄하고 위엄 있는 게이랑에르 피요르드
올레순에서 가장 가까운 피요르드는 게이랑에르다. 게이랑에르 피요르드는 창처럼 내륙으로 깊이 파고들었다는 뜻이다. 후티루텐이란 크루즈를 타고 게이랑에르를 가봤다.

첫 번째 크루즈가 꽤 심심하다는 것이다. 요란한 카지노도 없고, 떠들썩한 실외 수영장도 없다. 그래서 크루즈가 약간 심심했다. 가이드 헬렌은 자연이 워낙 아름답기 때문에 조용히 자연을 지켜보는 것으로도 만족한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노르웨이 스타일의 피요르드는 오락에 정신 팔지 않고, 자연에 포커스를 맞췄다는 것이다.

노르웨이 크루즈는 느낌이 독특하다. 사실 북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기후가 별로다. 비가 많이 온다. 그러다가도 갠다. 흐릴 때와 갤 때의 풍광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마치 딴 세상 같다. 그게 피요르드의 매력이다.

크루즈가 바다로 밀고 나갈 때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 때 바다는 음산했다. 산도 바다도 까맸다. 해안은 온통 잿빛이었다. 눈 덮인 하얀 연봉이 등댓불처럼 보였다. 마치 영화 속에서 바이킹들이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난바다로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칠고 찬 바람들이 갑판에 몰아치는 뱃길, 거대한 절벽들이 성큼 눈앞에 다가왔다. 멀리서 본 산줄기와 가까이서 본 산은 달랐다. 풀과 나무가 빼곡하게 자란 절벽 밑둥은 푸릇푸릇했고, 산봉우리는 한겨울처럼 눈이 덮였다. 눈이 녹아내린 실폭포가 벼랑을 타고 흘러내렸다. 폭포수를 하나 둘 세다가 나중엔 셈을 포기했다. 폭포가 열댓 개가 넘었다. 산꼭대기에 내린 눈들이 녹아내리면서 골이 파인 틈새로 흘러내리니 여기저기가 폭포다.

벼랑이 한 발자국 물러선 구릉에는 초원이 펼쳐졌다. 언덕 위엔 자그마한 나무집 몇 채와 목장이 보였다. 들은 푸르고, 그 너머는 빙벽으로 하얗다. 영락없이 스위스의 그린델발트를 닮았다. 바다만 없었다면 스위스라고 해도 믿을 판이다.

해가 나오자 피요르드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비가 올 때 산들은 위압적이고 두려웠다. 아름다운 자연이 아니라 위대하고 두려운 자연이다. 햇살이 비치자 산들이 밝아졌다. 이제야 산도 들도 따뜻해 보인다. 물빛도 검은빛에서 짙은 초록으로 변했다.

“빙하가 녹은 물은 다른 물과 결정체가 다르다고 해요. 그래서 물빛이 짙죠. 게다가 깊거든요.”
피요르드는 웅장하다. 벼랑은 깎아지른 직벽이 많다. 바다도 깊다. 수심은 50~100m 수준이 아니다. 피요르드 앞의 산자락의 높이만큼 바다도 깊다고 보면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래 이 지역은 빙하였다. 100만 년 동안 눈과 얼음으로 뒤덮였던 빙하가 1만 년 전 녹았다. 백두산보다 더 높은 3000m나 쌓인 얼음덩어리가 녹아내리면서 산을 깎고, 흙을 쓸어내렸다. 빙하수로 차올라 바다 수위도 올라갔다. 산과 산 사이가 물길이 됐다. 이게 바로 피요르드 해안이다. 그래서 수심이 600m가 넘는 곳도 있다고 한다.

피요르드 해안은 지질학적으로 보면 젊다. 지구의 나이가 46억 년. 피요르드는 1만 년 전만 해도 얼음 속이었으니 바람과 파도에 다듬어지지 않았다고 해야겠다. 거칠고 가파르다. 날씨에 따라 수시로 풍광이 변했다. 햇살이 부서지는 은빛 물길을 헤치는 유람선의 모습은 로맨틱하다가도 비구름이 끼면 폭풍 전야처럼 조마조마하다. 그만큼 다양한 표정을 가졌다. 물길이 끝나는 곳엔 플뤼다렌이란 마을이 있다.

올레순에서 여기까지는 약 100㎞로 4시간 30분 거리였다. 절벽과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아늑하다. 마을 주민은 234명. 학교도 있는데 6명의 교사와 34명의 학생이 있다고 한다. 수요일에는 의사가, 일요일에는 목사가 배를 타고 들어온다.

이 마을에 외부 사람들이 들어온 것은 1869년, 기독교 선교사였다. 당시 인구도 지금과 비슷했다고 한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급속하게 알려지면서 1900년에는 약 100척의 범선이 이곳을 찾았다. 박물관에 있는 사진을 보면 포구에 빼곡하게 차들이 주차해 있을 정도로 북적거린다. 해마다 80~90척의 크루즈가 게이랑에르 피요르드를 찾는다고 한다.

사진이나 포스터보다 실제 풍광이 나은 곳은 드물다. 노르웨이의 피요르드는 반대다. 수백 m 높이에 달하는 절벽 틈새로 난 물길을 짧게는 수십 km, 길게는 100km가 넘게 이어진다. 사진 한 장으로 표현하기 힘들다. 하늘과 바다, 깎아지른 절벽, 눈 쌓인 산봉우리, 실개울처럼 흐르는 폭포, 옹기종기 앉아 있는 작은 포구를 사진이나 그림에 한번에 담을 수 없다. 피요르드가 지금까지 찾고 싶은 관광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이처럼 자연이 웅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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