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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 마을의 기적 프랑스 루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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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548회 작성일 11-01-1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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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소녀, 베르나데트 이야기
프랑스 남부 루르드(Lourdes)도 연말에 찾을 만한 마을이다. 스페인과 국경을 이룬 피레네산맥 인근의 가톨릭 성지다. 인구는 고작 1만5천 명인데 해마다 6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6백만 명을 조금 넘는 편이니 엄청난 숫자다. 게다가 호텔은 233개로 파리에 이어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많다. 루르드는 올 한 해 내내 사람들로 붐볐다. 올해는 성모가 나타난 지 150년 되는 해로 성모 발현 행사가 연중 끊이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신자들이 모였다.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 루르드가 세계적인 순례 여행지가 된 것은 베르나데란 소녀 앞에 성모가 나타났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루르드는 깡촌이다. 베르나데트 역시 신분이 천한 가난한 집안의 소녀였다. 1858년 2월 11일 성모 마리아가 가베 강가의 동굴 앞에서 땔감을 줍던 베르나데트 눈앞에 나타났다. 성모는 베르나네트에게 “나는 무염시태이다”라고 말했다. “성당을 지으라”는 명령도 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이 소녀의 증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하지만 성모 발현은 이후 18번이나 계속됐으며 마을은 소녀의 일관된 진술에 발칵 뒤집혔다. 사제들이 소녀를 추궁했다.

교황청이 직접 조사에 나섰다. 소녀의 목격담은 또렷했고, 무척이나 생생했다. 왜 성모가 소녀에게 나타나 무염시태라고 했을까. 무염시태(Immaculate Conception)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무염시태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가 있지만 성모 마리아는 죄가 없다는 뜻이다. 지금은 가톨릭교회의 중요한 교리지만 당시엔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던 사안이었다. 시골 마을 사람들에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어린 소녀가 이런 어려운 말을 했다는 것 자체도 신기했다. 조사 결과 소녀의 말은 100% 진실로 확인됐다. 교황도 성모 발현을 공식 인증했다.

어쨌든 이 사건 후 루르드엔 전 세계의 신자들이 몰려들었다. 어릴 적 나무에서 떨어져 팔을 못 쓰는 사람은 베르나데트가 발견한 샘물에 팔을 담그자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현지에서 만난 마틴 모린 신부는 수많은 기적 중에 67개만 공인을 받았다고 했다. 베르나데트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그는 생 길다로 가 곧바로 수녀가 됐다. 그가 발견한 샘은 수없이 많은 기적을 일으켰고, 성모 발현의 첫 목격자인 소녀는 요즘으로 치면 스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소녀는 수녀원에 숨어 조용히 생을 보냈다. 하지만 생이 짧아 30대 중반에 사망했다.


성스러운 가톨릭의 마을
루르드 시내만 보면 ‘가톨릭 쇼핑몰’에 온 듯한 분위기다. 거리마다 묵주와 성모상을 파는 가게로 가득하다. 관광객 수백만 명이 오는 곳이면 샤넬이나 루이뷔통 같은 명품점도 눈에 띌 텐데, 거리의 간판은 온통 가톨릭과 연관돼 있다. 에덴이란 바에서 맥주 한 잔 하고 나오면 테레사나 바티칸이란 이름을 붙인 호텔에 묵을 수 있다. 무염시태란 기념 가게에선 성모상을 살 수 있을 정도다. 루르드 길바닥엔 성모 형상을 한 표시가 돼 있다. 성모 발현과 관련된 유적지를 표시하는 것이다. 표지는 이 골목, 저 골목으로 이어져 있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은 좁은 골목길을 몰려다녔다. 이 골목에서는 프랑스어가 들리는가 하면 저쪽 골목에선 이탈리아어가 들려왔다. 영어와 스페인어 등 온갖 언어들이 거리를 울렸다. 십자가나 성모상을 그린 펜던트를 든 가이드가 여행자를 끌고 다녔다.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은 언덕배기에 있는 거대한 루르드 성이다. 원래 이 성은 9세기 중엽까지도 사라센 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 샤를마뉴 대제가 이 성곽을 포위, 공격했으나 난공불락이었다. 샤를마뉴는 투르핀 주교의 충고로 “나에게 항복하지 말고, 하늘의 왕에게 항복하라”고 제의했다. 사라센 성주는 결국 성을 포기했다. 이 성곽의 스토리도 종교적이다. 성은 11세기에는 비고르 지역의 백작이 다스렸다. 1590년에는 앙리 4세의 영지가 됐다. 17~18세기에는 피레네의 바스티유로 불릴 정도로 악명 높은 감옥이었다. 19세기엔 군대 막사로 썼다.


구원을 찾아, 루르드 대성당
루르드를 제대로 보려면 성모 발현 동굴 위에 지은 대성당 앞에 있으면 된다. 물론 교회 건물이 크다고 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성당도 조금은 촌스럽게 생겼다. 꼼꼼히 뜯어보면 현대적인 건축물 같다. 하지만 성당 앞을 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구촌 곳곳에서 찾아온 신심 깊은 성도들이다. 그들의 진지한 표정과 자세가 이 작은 도시에 호기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대성당 앞 평원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해봤다. 기자는 가톨릭교도가 아니다. 기자가 참석한 미사엔 무려 7만 명이 참석했다.

미사는 초원에서 열렸으며 참석한 사제만 1백 명, 주교만 스물댓 명이 넘는다고 했다. 백인 환자를 돌보는 흑인 자원봉사자, 겨울 추위에 샌들 하나만 신고 있던 수사, 걷기 불편해 보이는 노부부, 땅에 입을 맞추는 수녀…. 그곳에서는 마음 허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금칠한 왕관을 씌워놓은 대성당보다 그들의 표정이 더 진지했다. 거리를 메운 신도들의 기도 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간절함은 절절히 느껴졌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구원하소서!’를 외치는 저 많은 중생들의 기도가 대지를 울린다고 생각해보시라. 어떤 열변보다 뜨겁다. 부귀공명을 누릴 대로 누린 사람들이 신을 외칠 때엔 아무리 목소리가 커도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헐벗은 자들이 토해내는 신에 대한 간구는 나지막해도 울림이 크다.

저녁 촛불 미사도 장관이었다. 생추어리를 가득 메운 신자들이 촛불을 들고 대성당까지 행진한다. 찬송가 한 구절이 끝날 때마다 “살베, 살베”를 합창하는 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멕시코에서 온 여기자 플로렌시아는 살베가 ‘구원하소서(Save)’란 뜻이라고 했다. 새벽 산책을 나갔다가 수많은 신도들이 생추어리로 향하는 것을 목격했다. 가족의 사진을 붙인 거대한 촛불을 태우는 이들도 있었고, 야구방망이보다 더 큰 촛대를 어깨에 멘 순례자도 있었다. 십자가를 메고 온 이들도 보였다. 촛불을 피우는 것은 촛불이 기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석상이 서 있는 동굴 앞에선 새벽마다 미사가 열렸다. 그 자리에선 젊은이건 노인이건 눈물을 떨구었다.


순례, 가장 오래된 여행의 형태
루르드는 역사나 건축물, 성곽, 문화재보다는 순례에 의미를 둘 수 있는 여행지다. 굳이 가톨릭교도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순례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여행 형태다. 먼 옛날 순례는 고행이었다. 곳곳에 도적 떼가 여행자들을 노렸고, 때로는 무거운 통행세를 내야 했다. 그래도 신의 음성을 듣고, 선지자들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길을 떠났다. 중세엔 성지 로마로 떠난 순례자를 ‘로메이’라고 불렀고,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순례자는 ‘팔미에리’라고 했다. 아일랜드의 수도승들인 페레그리니는 스페인의 성지 산티아고를 찾아갔다. 말 그대로 천로역정이며 구도의 길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선 신탁을 받기 위해 델포이와 델로스를 찾았다.

이슬람에선 아직도 메카 순례를 하고 있다. 신라의 승려 혜초도 불국토인 인도를 찾아갔다. 순례는 자신이 쓰고 있던 가면을 신 앞에서 벗겨내는 행위다. 메카에 모여 일제히 땅에 조아리는 이슬람교도나, 삼보일배를 하며 차마고도를 걷는 티베트 승려의 모습이 경건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촛불을 들고 행진하는 루르드의 순례자들의 모습도 가슴 뭉클하다. 루르드는 마음의 눈을 떠야 보이는 여행지다. 거기선 순례자들의 젖은 눈동자를 볼 일이다. 눈이 젖지 않고서는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새까만지 결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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