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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놀자


 

Barns 미술관, 펜실바니아주 메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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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칵테일 댓글 0건 조회 2,185회 작성일 09-08-02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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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반스 미술관
필라델피아 근교에 위치 마티스, 르누아르, 세잔느 작품 개인 콜렉션













** 알버트 C. 반스 박사 (Doctor Albert Coombs Barnes, 1872-1951**

알버트 반스(Albert C. Barnes)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남보다 가장 앞서서 현대미술의 태동인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작품을 많이 수집한 사람이다.

뿐만아니라 그들만의 우월성을 오랬동안 주장해왔던 오만 때문에 이제까지의 서양미술가들이 도외시 해오던 미지의 동양미술과 아프리카미술에서 이 새로운 미술가들은 독창성을 발견해 찾아내며, 그로부터 영감을 얻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듯한 당면한 창작문제에 해답을 얻고 작품제작에 새롭게 인용하기 시작하고 있었음에 주목한 반스는 그 동양미술품과 더불어 아프리카 가면 및 조각을 수집했다.

또한편 음악애호가였던 그는 전문인들로 하여금 미국 곳곳 지방에 파묻혀 있는 흑인영가를 발굴해 내는 사업을 벌렸고, 감상 위주의 순수미술과 실용적 공업미술 사이에 벌어진 격차를 줄여보는일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러했던 그는 그리스, 로마, 에집트미술품은 물론이고 멕시코 벽화를 비롯, 아메리카 인디언의 보석, 도기품 그리고 아메리카 18세기 가구등을 사들이며 무려 2500여점의 소장품을 모았다.

소장만을 위해 소장품을 사들이는 단순한 소장가들과는 다르게 알버트 반스는 사들인 소장품이 현장학습자료로 미술교육에 쓰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술교육 목적으로 반스 재단을 창립한 후 죽기1년전인1950년, 기존에 만든 재단규약을 수정해서 재단의 이사장을 링컨( Lincoln)대학의 이사회가 선출하도록 변경해 놓았다.


**한파로 망가진 반스 재단**

반스 재단 (The Barnes Foundation)은1990년 겨울, 엄습한 한파로 인해 재단내의 난방시설 파이프가 얼어 터지는 사건이 일어 났다. 이로 인해 건물이 상하며 진열작품들도 손상됐다. 반스 재단은 그 피해를 복구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였다.

이재단은 설립자 반스 박사의 고집에 따른 유언대로 운영해야만 됐는데 글란튼(Richard Glanton) 관장은 재정상의 어려움때문에 보수공사를 때마추어 제대로 해놓지 못한데에 그 사고의 원인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관장은 엄격하게 지켜야하는 설립자의 유언장의 내용을 일시적으로 중지시켜 달라는 신청을 워싱톤 법원에 제출했다.

그 엄격한 유언장이란 반스 박사가 일생동안 지켰던 철칙인 ‘첫째 자기가 죽은 후라도 언제까지나 자기가 진열한 순서대로 진열되어 있어야 함, 즉 자기가 정해 논 작품들의 위치를 조금이라도 바꾸면 안됨. 들째 재단관람은 아무에게나 시키지 아니함. 셋째 작품사진을 절대로 찍게하지 못함. 넷째 재단이 발행한 소장품의 도판도 외부에 내보내지 못함. 다섯째 소장품을 다른 미술관이나 같은 류의 기관도 빌려줄 수 없음 등등’ 매우 직선적인 고집투성의 사항들 이었다.

그러나 글란튼 관장에겐 파손된 건물의 내부수리와 난방시설을 우선 복구해 놓는데 필요한 500만불이 필요했다.

관장은 수리공사가 진행되는 동안의 하나의 방편으로, 소장품을 파리, 동경 그리고 워싱톤미술관에 유료로 빌려주고 그 대여금으로 수리비용을 얻자는 계획하에 꼭 지쳐야 하는 유언장의 엄격한 사항이 법적으로 잠시 중단되있어야 했던 것이다.

마침내 워싱턴 법정은 재판에서 관장에게 이유있다는 예외적인 판정을 내렸다. 반스 재단의 소장품2500여점 중에서 가장 걸작 소장품으로 여기고 프랑스가 빌려가기를 원하는 유화작품 72점을 선정해서, 파리 오르세미술관에서 1993년 넉달동안 전시되는 조건으로 200만불, 1994년 동경 서양미술관에서의 대여금 200만불, 다음은 워싱톤 내셔날갤러리 에서의 대여금 100만불이 수거되었고 그 결과 반스 재단의 한파로 인한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게 됐다.

1993년의 파리전시 때, 반스재단미술관에 실제로 가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실로 처음 보게되는 작품들을 보기위해서 파리지엥들은 오르세미술관앞에 매일 장사진을 쳤는데 그도 그렇것이 프랑스를 떠난지 50-80년이 훨씬 지나서야 그 작품들이 탄생한 고향나라에 일시적으로나마 돌아와 있기 때문이었다.


++빈민가 소년에서 스므살에 의사가 된 반스**

알버트 반스는 1872년1월2일 필라델피아 노동자 동네인 빈민촌 켄싱톤에서 푸줏간집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독실한 감리교신자인 어머니의 특별한 관심속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여러악기를 연주해보기도 했으며 동네골목 불양배들로 부터의 공격을 방어하느라 복싱도 배웠다.

8살 때부터는 동네의 많은 흑인아이들과 잘 사귀기시작하였고 차츰 아메리카흑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종교의식과 풍습, 문화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의 그 좋은 인식은 아메리카 흑인의 자유와 권익이 미국의 가치관아래에서도 분명히 잘 보호받아야하고 백인들과 동등한 입장으로 모든 문화도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의 노력을, 일생동안 반스가 끊임없이 하게된 동기였다.

그 하나의 예로 현 반스재단의 관장인 글란튼도 흑인인 것이다.

반스는 13살 때인 1885년6월, 미국에서 과학분야와 문학분야에서의 명성이 빼어 난 학교 인 필라델피아 센추럴 하이 스쿨에 입학했다.

4년후 1889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입학자격시험을 패스하고 펜실바니아 의과대학에 입학, 우수한 논문과 함께 박사로1892년 졸업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20살 이였다.

졸업후 펜실바니아 이공과대학에서 연수교육을 받으며 피스버그 머시( Pitsburgh Mercy) 병원에서 인턴생활을 마친 후엔, 희망하던 의사가 자기가 생각하던 일생의 직업이 아니라고 판단한 반스는 생리학에 관련된 화학분야에 그 관심을 돌렸다.

1893년 여름, 런던과 파리에 있는 병원들을 방문하고, 1894-95년 사이에는 베르린 대학에서 임상의학과 체험생리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펜실바니아에 있는 워렌(Warren)정신병원에서 6개월간 정신병리학을 연구했다.

**특효약 아지롤(Argyro)l의 발명**

1899년, 멀포드 제약회사(H.K. Mulford and Co.)에 취직하여 홍보와 판매일을 맡게되었고 다음해 회사는 그를 하이델베르그 루프레트-칼 대학( Ruprecht-Karls-Universitat)에 파견해서 약리학공부를 시키게되며 거기서 그는 철학강의까지도 함께 철저히 수강했다. 거기서 후에 동업자가 될, 독일 화학자 헤르만 힐(Hermann Hill)과 알게됐다.

1901년 브룩크린 출신 로라 리젯트(Laura Leggett)와 결혼하고 긴 신혼여행을 유롭으로 떠나 하이델베르그와 베를린대학에 가서 옛 교수들에게 자기 부인을 소개 했다.

이때 헤르만 힐과 반스는 둘이서 독립적으로 합동연구를 시작하였는데, 운좋게 은의 새로운 합성에 성공하여 안구염증 특효약으로, 특히 신생아치료에 적합한 약인 ‘아지롤’ 을 발명하였고, 곧이어 1902년 그는 ‘반스와 힐( Barnes and Hill) 회사’를 필라델피아에 설립 하였다. 그런후1907년 회사를 해체하게됐을 때 반스는 회사를 인수하면서 혼자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전직 경험으로 회사경영에 자신감이 있고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의 철학수강이 바탕이 되어서 사람들의 심리 파악력에 아주 능했던 그는1929년 재단일에 전념하기위해 회사를 처분할 때까지 매우 많은 돈을 벌었다.


**미술품 수집**

반스는센추랄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후에 화가가 될, 그리고 일생동안 영향을 줄곧 받게되는 동창생 존 윌리암 글락큰(John William Glackens 1870-1938)에게서 미술에 대한 강의를 자주 듣고 토론을 벌리면서 미술의 역사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화가들에게 대한 관심이 남다르게 많았다.

1901년, Barnes부부의 신혼여행지는 독일을 경유한 후에는 꿈에 그리던 피렌체 였다.

그동안 화가친구 글락큰 에게서 배운 전통미술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우피지미술관을 찬찬히 그리고 샅샅이 살피면서 화가친구의 미술사 강의내용의 진면목을 일일히 확인하고 미술사의 흐름을 실제적으로 파악할수 있게되어서 미술작품에 대한 감식안이 매우 높아졌다.

한편으로 듣고있는, 프랑스에서 그때 당시 파리화단에서 일고 있는 최신식 경향에 대한 동경심으로 파리의 화가들 작품을 직접 보고푼 열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반스 는 제약회사의 약진으로 재력이 넉넉해지자 1912년 제일 먼저 친구화가 글릭큰을 파리로 보내서 새로운 미술작품을 그가 보는 취향대로 마음대로 사오도록 했다. 그런 후, 가을철에는 본인 자신이 파리로 갔다.

이 필라델피아의 새로운 부호 기업가 반스는 친구화가가 추천하는르노아르와 세잔느의 작품을 무조건 사들이기 시작하였고, 뿐만아니라 파리에서 새로 사귄 미술감식가 레오 스타인(Leo Stein) 이 전적으로 인정하는 피카소와 마티스를 비롯하여 그외의 많은 새로운 작품들을 대담하게 사들였다.

또 세계1차대전 이후부터는 파리의 유명한 화상 폴 기욤(Paul Guillaume)이 소개하는 젊은 화가들인 블라망크, 모디리아니 혹은 수틴의 작품을 구입했고 세잔느를 발굴한 화상 볼라르 (Ambroise Vollard)의 손을 거쳐서도 작품을 다량 구입했다.

그야말로 음지에서 양지로 옮겨지는 새로운 세대의 화가들의 작품을 반스는 대량으로 대서양 건너편 으로 실어 날랐다.


**문화원의 모델이 된 재단의 창립**

반스는 그후에도 틈만나면 파리에 나타났는데, 예를들어 1914년초에만 르노아르 작품을 24점, 세잔느 작품 12점과 피카소12점을 한꺼번에 사서 정렬적인 놀라운 수집방법에 대해서 파리의 화상들은 경악했으면서도 그를 열열히 환영 했다.

그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동시대작가들의 창작품을 열심히 구입하는 특별한 수집가였을 뿐만아니라 창작과는 반대로, 미국과 같은 민주국가에서는 나라의 장래가 국민을 어떤 방법으로 교육시키느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좌우된다는 신념을 강하게 가졌던 사람 이었다.

그래서 제임스(Willam James) 와 드웨(John Dewey)같은 당대 미국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민주교육이론인, 즉 실용주의적 학습실시로 ‘일상적인 행동에서부터의 이해력의 구체적인 적용’과 ‘교육에서부터 미래행동을 위한 지능의 기초닦기’등등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야하는 ‘현장학습’같은 교육방법에 철저히 동감하고 있었다.

이런점이 단순했던 미술품수집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점이였는데, 그리하여 그는 미술강의시간에 자기의 수집품을 현장학습용으로 적극적으로 쓰이도록 내놓고 이용해보는 교육방법을 새로히 실행에 옮기고자 했다.

그래서 자기가 이제까지 긴시간동안 노력해서 모아온 미술품들을 보여주며 각종 프로그람을 짜서 미술창작품에 대한 토론을 벌리는 감상법을 강의하고자 했는데 이 방법을 대부분이 흑인들로 구성된 자기의 제약회사공장의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정서함양을 고취시키는 새로운 교육의 한 방법으로 삼으며 우선 실천해 보았다.

이 프로그람들은 예를들면 루스(Bertrand Russe)의 ‘자유스러운 사람의 창작현장 ‘(The Free Man’s Workship), 드웨의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혹은 산타마야(George Santayama)의 ‘아름다움의 의미와 예술에서의 이성’ 같은 것 이었다. 몇년후엔 회사근무시간을 6시간으로 줄이는 데 성공하고 남은 시간에 모든 직원을 이 프로그람에 참석해보도록 했다.

산타마야의 이론에서 큰 감명을 받은 반스는 글릭큰의 작품과 함께 수집품들을 공장내에 전시해서 실제작품원본과 이론강의가 연결되어 열기띤 활기찬 토론장이 되는 효과를 경험했다. 그런가 하면 작품들을 원하면 노동자들에게도 재료비 정도의 염가로 팔기도 했다.
이들 노동자그룹의 정서여가활동이 외부에도 차차 알려지게 되면서 강의시간을 더 늘려서 외부사람에게도 참여의 기회를 주었다.

이 새로운 교육방식에 몰두해보고 그것에 매료된 반스는 1922년 마침내 ‘미술교육과 감상을 권장’한다는 목적으로 반스재단( The Barnes Foundation)을 창립하기로 하였고 펜실베니아 정부에 재단과 재단부설 교육기관 설립정관을 제출하게되었고 곧 설립허가를 받았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그의 모든 수집품을 재단건물안에 모아서 전시하는 계획을 세우고 재단내 학교에서의 미술강좌개설을 부지런히 준비를 했다.

반스는 펜실바니아 근교 머리온(Merion)에 미국에서 더할 수없이 멋진 숲가운데 부지를 확보하고 프랑스 출신 건축가 크레(Philippe Cret)에게 작품진열에 편할수 있으며 간략하게한 르네상스 건축양식으로 재단건물을 설계해주도록 주문했고 이 반스재단의 작은 성채를 짓기위한 건축자재로 석회석 흰 돌맹이를 프랑스로부터 직접 배로 실어다 썼다. 그래서 드디어 반스재단은1925년 3월 19일에 개관했다.


개관당시 이미 수백점의 소장품을 진열하게 됐었고 이 소장품의 숫자는반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늘어났다.

이렇게 대중을 위한 문화함양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과 부설학교가 세상에 처음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인데 이 모범적인 행동이 나중에 1950년대에 와서, 반스 재단의 설립취지와 내용에서 큰 힌트를 얻은 앙드레 말로 문화성장관은 프랑스 국민들의 문화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위한 다목적 문화센터 (문화원)를 그레노불에 처음으로 세웠다. 그 후 프랑스는 전국적으로 주요도시에 문화센터를 차례로 세우게 된다.

이것이 점차 전세계 각나라 각처에 파생되어 생긴 문화원의 시초 다.


**Barnes의 의기소침**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스의 원대한 목표는 그가 원하는대로 모든사람들로 부터 찬동을 얻어내지 못했다.

재단건물을 짓는 동안인 1923년 봄에 그는필라델피아 미술 펜실바니아 아카데미(현 펜실바니아미술아카데미)에서 파카소, 마티스, 수틴과 모디리아니 등등, 그의 수집품속에서 자신이 직접 선정한75점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이 전시회 카달로그에서 열정적으로 모으기 시작한 아프리카조각들과 아프리카 가면들이 모디라아니의 작품제작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놀랍고 새로운 경향의 프랑스미술전시회에 대해서 곧 도하일간신문들은 반스에게 미친짓을 한것으로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고 그로인해 심한 심적 타격을 받은 반스는 오직 기존질서만을 유지하려는 미술관계자들, 전통적입장을 고수하는 관람객들, 외골수의 미술평론가들, 엉터리 미술사가들 그리고 거기에 맞장구를 치는 미술관관장들 모두와 완전히 결별하게 됐다.

걸핏하면 화를 잘내는 성격의 반스는 더이상 자기 소장품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단지 자기를 따르는 신봉자와 강의 프로그람에 부지런히 참석하는 수강자들에게만 관람을 허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람객들도 믿지못해서, 감시하기위해 수위복장으로 변장하고 뒤를 따라다니기도 하였는데 관람객중 재단소장품에 대해서 몰상식하여 모욕적인 언사를 할라치면 가차없이 덜미를 잡아 끌어내, 밖으로 내쫓고 말았다.

이와같은 관람억제의 규칙은 그가 불의의 자동차사고로, 1951년 79세때,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후에도 유언에 의해 적용됐으며 1960년에 와서야 겨우 법원의 결정을 얻어 일주일에 2번만 외부사람의 관람을 허용할 수 있게됐다.

그러나 1993년 파리 전시회 전까지는, 재단관람을 해본사람이 아니고서는, 도판으로도 외부 공개를 금지시켰고 외부전시를 일체금지해 왔었기때문에 그의 방대한 빛나는 미술수집품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회화부분의 주요작가와 대표작품 **

인상주의화가

? Pierre-Auguste Renoir 120여점소장(‘아무리 많이 가져도 결코 많을 수가없다.’고 말함)
? Claude Monet 선상 아뜰리에
? Edouard Manet배에 타르칠하기
? Henri de Toulouse-Lautrec 몽 루즈에서-로자 라 루즈

후기인상주의화가
? Paul Cezanne 30여점소장 ; 트럼프하는 사람들, 대목욕도
? Paul Gauguin 루루씨
? Vincent Van Gogh 죠셉 에티에느 룰렌

신인상주의(점묘파)화가
? George Seurat 포즈

야수파화가
? Henri Matisse 1930년, 초청하여 창문아래와 중앙홀의 벽화Danse 제작, 삶의 행복

입체파화가
? Pablo Picasso 몇점의 아프리카가면이 연상되는 얼굴외에는 입체파 그림전 초기작품만 ; 고행자
? George Braque 넵프킨, 칼과 배
? Roger de La Fresnaye 부부생활

표현주의화가
? Chaim Soutine 빵제조견습공



기타화가
? Amedeo Modigliani 아프리카조각영향 ; 옆에서 본 쟌느 에뷔테른느초상
? Henri Rousseau 호랑이공격을 받은 척후병
? De Chirico Barnes초상화


재불화가 오 천용(Oh Chunr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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