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마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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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설화 댓글 0건 조회 2,518회 작성일 12-05-09 10:17본문
저는 출세하기 위한 방편으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10여년전, 외국계 회사의 한국지사에 근무할 때였습니다. 본사의 중역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식사 때 항상 와인을 찾았습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와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다른 알코올 음료와 마찬가지로 와인은 취하기 위해 마시거나, 와이프와 분위기 잡을 때 마시는 정도였지요.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는 이유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예전의 저처럼 출세하기 위해 와인을 마시는 분은 안 계실지 몰라도 독주에 싫증이 났거나, 레드 와인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와인을 마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은 불면증을 치유하기 위해 잠자리에 들기 전 매일 와인을 두 잔씩 드십니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오지 않는데 와인 두 잔을 마시면 신기하게 잠이 온다는 것입니다.
“미스터 리, 이 식당의 음식에 어울릴만한 와인을 한 병 추천해 주시겠어요?”
본사의 노란머리 중역이 이런 질문이라도 하게 되면 저는 알지도 못하는 와인 이름들이 깨알 같이 적혀 있는 와인리스트를 뒤적이느라 땀을 삐질 삐질 흘렸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와인을 배우자. 그래야 높은 분들의 환심을 살 수 있고,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승진도 하고 연봉도 오를 테니까.
본사의 노란머리 중역이 이런 질문이라도 하게 되면 저는 알지도 못하는 와인 이름들이 깨알 같이 적혀 있는 와인리스트를 뒤적이느라 땀을 삐질 삐질 흘렸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와인을 배우자. 그래야 높은 분들의 환심을 살 수 있고,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승진도 하고 연봉도 오를 테니까.
그래서 저는 와인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와인에 대한 지식을 쌓으면, 와인에 대해 잘 알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와인에 대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궁금한 점들이 오히려 많아졌습니다.
“카시스 향은 대체 어떤 냄새인가?” “지브리 샹베르탕 마을의 와인들은 어떤 맛이 나기에 남성적이라고 표현할까?” “오래된 와인은 어떤 느낌일까?”
이런 질문들은 독서를 통해서는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오감을 통해 느껴야만 하니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와인을 닥치는 대로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한참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와인의 매력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와인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입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출세하기 위해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다른 이유에서 와인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와인이라는 음료가 사람을 기분 좋게 취하도록 만들고 또 맛있기 때문에 찾게 됩니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밖에 없다면 와인 말고도 위스키나 맥주 또는 소주를 마셔도 되겠지요.
다른 알코올 음료들과 달리 와인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양한 모습을 선사해 줍니다. 와인을 이해하려면 포도의 재배와 수확에 관련된 생물학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포도즙이 포도주로 변화하는 신비한 과정이 궁금하면 화학과 미생물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포도나무가 뿌리를 박는 토양이 지역에 따라 다른데 토양에 따라 변하는 와인 맛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질학도 공부해야 합니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나무는 아무 지역에서나 자라지 않기에 기후학과 지리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와인이 만들어져 온 오랜 과정과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지식도 필수적입니다. 와인애호가들이 와인 이야기로 밤을 새는 경우가 있는 것은 이렇게 다양하고 광범위한 식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와인과 관련된 모든 지식을 습득할 수 없는 노릇이고, 누구에게서나 와인에 관해 내가 모르던 사실을 배울 수가 있기 때문에, 와인 앞에서는 늘 겸손해지게 됩니다.
와인의 또 다른 매력은 다양성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십만 종류의 와인들이 존재합니다. 같은 품종의 포도로 만들어도, 만드는 사람과 지역적 특성에 따라 그 맛과 향이 달라집니다. 이처럼 무수한 와인들이 매해 생산되는데, 매년 기후가 다르기 때문에 와인 또한 일 년마다 그 모습이 달라집니다.
하나의 와이너리에서 같은 해에 생산된 똑같은 와인을 여러 병 마시는 경우에도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마시는 이 와인은 내일 마시게 될 와인, 혹은 내년이나 10년 후에 마시게 될 와인과 다릅니다. 와인은 병 속에서도 계속 진화를 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잔에 따라놓은 와인은 10분 후의 모습과 30분 후의 모습, 혹은 1시간 후의 모습이 다릅니다. 공기와 접촉하면서 산화되는 과정에서 다른 향과 맛 혹은 질감을 선사해줍니다. 매년 또는 매번 생산될 때마다 일정한 향과 맛을 내도록 만들어지는 맥주나 소주, 양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모습과 변화무쌍함이 와인에는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와인의 복잡함이나 다양함에 압도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미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에 즐거움을 선사해 주는 음료에 불과하니까요. 그렇지만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소중해지는 것이 와인입니다. 오늘부터 그 재미난 이야기들을 풀어볼까 합니다.
이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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