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리와 베이즐향이 은은하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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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방아풀 댓글 0건 조회 2,361회 작성일 12-05-09 10:18본문
와인을 싫어한다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마시고 있는 와인을 말로 표현해 보라고 했을 때에는 한 결같이 곤란한 표정을 짓습니다. 왠지 자신이 없어지고, 엉뚱한 소리를 할까봐 손바닥과 이마에 땀부터 맺힙니다. 그 분 앞에 김치를 한 접시 내놓고 “맛이 어때요?”라고 묻는다면, 너무 익었다 혹은 덜 익었다, 젓갈이 더 들어갔으면 좋겠다, 너무 짜다 등등 한참을 이야기 하실 분인데 말이죠.
행여 와인에 대해 아는 체를 하는 사람이 옆에서 “음… 라스베리향과 버섯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네”라고 하면, 정말 신기하게도 와인잔에서 라스베리향과 버섯향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생각해보면, 두 가지 원인이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후각이나 미각을 표현하는 방법에 서툰 면이 있고, 또 하나는 와인이 아직 우리에게는 생소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규교육 과정에서 후각과 미각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시각은 미술 교육을 통해서, 또 청각은 음악 교육을 통해서 학습 했습니다. 감청색(navy blue)과 청록색(turquoise)의 차이를 구별하는 방법과, 장음계와 단음계의 차이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로즈마리향과 베이즐향이 어떻게 다른지, 혹은 라스베리의 맛과 블랙베리의 맛이 어떻게 다른지는 모릅니다.
미각과 후각은 먹고 마시는 우리의 원초적 욕구와 직결된 만큼 시각이나 청각에 비해 덜 고상하게 여겨지기도 하거니와, 출생 직후부터 직관적으로 스스로 배우는 만큼, 별도의 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선천적으로 미각과 후각이 발달했어도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표현하는데 서툴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한국인들에게 와인은 성인이 되어서도 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주류입니다. 일곱 살 때부터 물 대신 와인을 마시는데 익숙한 유럽인들에 비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경험이 별로 없다 보니 맛이나 향의 차이를 느끼기 어렵고, 설령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난감해집니다.
하지만 미각과 후각은 궁극적으로 주관적인 감각인지라 절대적인 표준화는 불가능합니다. 전문가들도 같은 와인을 놓고 서로 다른 표현을 쓰기가 일쑤입니다. 다음의 사례를 살펴봅시다.
“향나무 냄새가 배어 있는 블랙커런트와 미네랄의 풍미가 풍성하다. 100점 만점의 와인.” (로버트 파커)
“매우 농익은 과일과 층층이 쌓여 있는 향신료와 초콜렛의 향들이 화려하게 느껴진다. 96점.” (제임스 써클링)
위 두 명의 세계적인 와인평론가들은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2000년산 샤토 파비(Chateau Pavie)라는 와인에 대해 서로 상이한 표현을 썼습니다. 점수는 차치하더라도, 이 표현만 봐서는 서로 다른 와인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전문가들조차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는 와인의 향과 맛에 대해, 우리 같은 애호가의 입장에서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갖가지 향들과 맛의 차이를 느끼는 그 자체가 와인을 마시는 큰 즐거움입니다. 내 나름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면서, 함께 자리한 사람들과 그 즐거움을 나눌 수 있으면 더욱 좋고요. 내가 느끼는 향과 맛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면, 여러분들도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와인의 향과 맛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와인잔 앞에서 주눅 들지 마십시오. 바로 여러분이 느끼시는 것이 정답이니까요.
이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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