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茶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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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Friday 댓글 0건 조회 2,740회 작성일 11-04-30 15:08본문
근래에 발견된 차가 지닌 몇몇 성분이 항암과 노화억제, 중금속 해독, 지방분해 등등 건강 강박증에 걸린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소비자는 정말이지, 단지 차를 마시는 것으로 온갖 종류의 병을 극복하고 살을 빼고 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고 믿으며 허구한 날 내게 “이 차는 어디에 좋아요?”하고 묻는 것일까?
미지의 음료가 세상에 처음 소개되는 시점에 나타나는 공통의 증세랄까 현상은 위험천만하게도 ‘효능’과 ‘치료’에 음료의 필요와 가치가 집중된다는 점이다. 마치 획기적인 신약이 개발(발견)된 것처럼 법석을 떤다. 예컨대 커피가 초기 유럽에 소개될 당시 커피는 “머리와 마음을 맑게 하고, 간과 담을 강화하고, 위장에 좋으며, 피를 깨끗이 한다”고 선전됐다. 다수의 소비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확인 없이 커피의 효능, 즉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고서 커피라는 검은 음료를 받아들였다.
이 같은 효능에 대한 무분별한 선전(현재도 끊임없이 출시되는 기능성 음료들을 보라)과 이에 대한 소비자의 거의 무조건적인 믿음은 ‘미지의 음료’에 대한 전문가의 권위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수많은 신뢰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연구소들의 연구결과에 풀이 죽어서 잠시나마 의구심을 품었다면 그런 자신을 책망하면서, 어떤 각고의 노력 끝에 출시됐을 신제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소비자의 마음은 한결 편하다.
<유동하는 공포>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인 인간이 근대 이후 선택한 죽음 극복 전략은, 필연의 사건인 죽음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계몽된 근대인으로서 한조각의 죽음쯤은 너끈히 통제가능하며, 한조각 두조각 차근차근 죽음을 이겨냄으로써 “오늘도 무사히” 죽음은 하루 더 지연된 것처럼 보인다.
가령 “우리는 ‘암에 걸렸다는 일곱가지 징후’, ‘우울증의 다섯가지 증상’ 같은 것에 열중하거나 고혈압과 콜레스테롤, 스트레스, 비만 등의 망령을 쫓아내려고 혈안이 된다.” 이 같은 죽음의 조각들, 임시 표적을 상대하기 위한 대체 목표로 “간접흡연, 식품에 포함된 지방, 햇빛에 노출되는 것, 예방조치 없는 섹스 등등을 심각하게 경계한다.”
V라인 녹차와 아토피에 좋은 루이보스, 간을 보호한다는 가시오가피와 피를 맑게 해주는 커피, 콩팥에 좋다는 탄산음료(탄산음료는 초기 약국에서 판매됐다)에 이르기까지, 오늘 우리는 몇가지 획기적인 성분이 든 제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손쉽게 하루 더 젊어지고, 간과 담은 더 강화되고, 죽음에서 한발이나 더 멀어진 것이다. 아 이 당분간의 평화란!
그렇지만 다시 오는 불안, 이 알 수 없는 공포는 의식에서 삭제되지 않는다. 조각낸 죽음은 일시적이고 상상적일 뿐, 죽음의 해체에 골몰할수록 오히려 “안달하는 희망과 무력한 현실에 대한 모욕감이 어우러져” 불안은 새로운 욕망으로, ‘백차 성분이 든 화장품’과 ‘100년 된 (비밀스런 성분이 있을 것이라 믿는)보이차’로 끝없이 변환, 순환된다.
죽음은 온다. 오긴 오되 먼 훗날에 오는 게 아니고 지금도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 그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하나의 성분만으론 해결할 수 없다. 무엇보다 죽음 그 자체를 없앨 수 없다. 그럼에도 오늘 “이 차는 어디에 좋아요?”하고 또 묻는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소비자는 내 거짓말을 믿고 싶을 테지만 나는 거짓말을 해야 할까?
미지의 음료가 세상에 처음 소개되는 시점에 나타나는 공통의 증세랄까 현상은 위험천만하게도 ‘효능’과 ‘치료’에 음료의 필요와 가치가 집중된다는 점이다. 마치 획기적인 신약이 개발(발견)된 것처럼 법석을 떤다. 예컨대 커피가 초기 유럽에 소개될 당시 커피는 “머리와 마음을 맑게 하고, 간과 담을 강화하고, 위장에 좋으며, 피를 깨끗이 한다”고 선전됐다. 다수의 소비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확인 없이 커피의 효능, 즉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고서 커피라는 검은 음료를 받아들였다.
이 같은 효능에 대한 무분별한 선전(현재도 끊임없이 출시되는 기능성 음료들을 보라)과 이에 대한 소비자의 거의 무조건적인 믿음은 ‘미지의 음료’에 대한 전문가의 권위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수많은 신뢰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연구소들의 연구결과에 풀이 죽어서 잠시나마 의구심을 품었다면 그런 자신을 책망하면서, 어떤 각고의 노력 끝에 출시됐을 신제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소비자의 마음은 한결 편하다.
<유동하는 공포>의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인 인간이 근대 이후 선택한 죽음 극복 전략은, 필연의 사건인 죽음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계몽된 근대인으로서 한조각의 죽음쯤은 너끈히 통제가능하며, 한조각 두조각 차근차근 죽음을 이겨냄으로써 “오늘도 무사히” 죽음은 하루 더 지연된 것처럼 보인다.
가령 “우리는 ‘암에 걸렸다는 일곱가지 징후’, ‘우울증의 다섯가지 증상’ 같은 것에 열중하거나 고혈압과 콜레스테롤, 스트레스, 비만 등의 망령을 쫓아내려고 혈안이 된다.” 이 같은 죽음의 조각들, 임시 표적을 상대하기 위한 대체 목표로 “간접흡연, 식품에 포함된 지방, 햇빛에 노출되는 것, 예방조치 없는 섹스 등등을 심각하게 경계한다.”
V라인 녹차와 아토피에 좋은 루이보스, 간을 보호한다는 가시오가피와 피를 맑게 해주는 커피, 콩팥에 좋다는 탄산음료(탄산음료는 초기 약국에서 판매됐다)에 이르기까지, 오늘 우리는 몇가지 획기적인 성분이 든 제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손쉽게 하루 더 젊어지고, 간과 담은 더 강화되고, 죽음에서 한발이나 더 멀어진 것이다. 아 이 당분간의 평화란!
그렇지만 다시 오는 불안, 이 알 수 없는 공포는 의식에서 삭제되지 않는다. 조각낸 죽음은 일시적이고 상상적일 뿐, 죽음의 해체에 골몰할수록 오히려 “안달하는 희망과 무력한 현실에 대한 모욕감이 어우러져” 불안은 새로운 욕망으로, ‘백차 성분이 든 화장품’과 ‘100년 된 (비밀스런 성분이 있을 것이라 믿는)보이차’로 끝없이 변환, 순환된다.
죽음은 온다. 오긴 오되 먼 훗날에 오는 게 아니고 지금도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 그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하나의 성분만으론 해결할 수 없다. 무엇보다 죽음 그 자체를 없앨 수 없다. 그럼에도 오늘 “이 차는 어디에 좋아요?”하고 또 묻는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소비자는 내 거짓말을 믿고 싶을 테지만 나는 거짓말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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