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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향차, 그 비밀 없는 스핑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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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121회 작성일 11-04-3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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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적할 땐 바나나우유를 마시곤 했다. 그 싼 맛이 부풀어 오르던 고뇌에 찬물을 끼얹고, 그 단맛이 일순간 기분을 발랄하게 해주었다.
 
물론 당분이 혈당을 높여주니 그랬을 테지만, 왜 하필이면 커피우유도 아니고 주스도 아닌 바나나 우유여야만 했던가? 바나나우유의 그 샛노란색이 주는 명랑성이 우선 한몫 했고, 실제 바나나에서는 맡기 어려운 인공의 바나나 향이, 뭐랄까 바나나의 이데아를 충족시켜줬다고나 할까. 또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실 때의 기분이란, 엄마의 젖을 빨면서 울기를 멈췄던 아이처럼, 나는 금세 기분이 나아지곤 했다.
 
가향차는 바나나우유를 닮았다. 우유에 이런저런 걸 혼합해 만든 바나나우유, 그처럼 가향차는 찻잎에 이런저런 걸 혼합해서 만든다. 보통은 온갖 오묘한 맛과 향, 거기에 깊이까지 품은 ‘차’ 자체를, 가향차가 감히 따라 잡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가향차는 사실 맛이 없으며, 최악의 경우, 자동차의 방향제로 쓰면 딱 적당할 정도다. 그럼에도 가향차가 인기를 끄는 건, 무엇보다도 차 자체의 맛에 익숙지 않은, 차를 마셔본 이력이 길지 않은 이들이 가향차들을 꾸준히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형색색의 꽃잎과 알록달록한 열매들로 치장하고 그윽하고도 이국적인 가향을 풍기는 기생 ‘애랑’이나 ‘초선’이처럼, 그 이름도 ‘블루 오션 브리즈’니 ‘오리엔탈 뷰티’니 하는 차들이 꽃가마 같은 포장에 태워져 눈을 어지럽히니, 기생 애랑에게 빠진 어수룩한 배비장처럼 어수룩한 입문자들의 애간장이 녹아들 수밖에.

가향차가 그 맛에 비해 식지 않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이제 바야흐로 차를 입으로 마시지 않고 눈으로 마시기 때문이다. 문자보다는 이미지로 대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시대에,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말로도 표현키 어려운 차의 맛이란 난감한 것이다. 게다가 오색 찬연한 가향차야 말로 취향의 차별화로 자신을 증명하는 가장 흔한 매체인 인터넷에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새로 구입한 티포트와 찻잔을 세팅하는 것에서 시작해 ‘블루 오션 브리즈’로 불리는 가향차의 화려한 면모를 요모조모 꼼꼼히 찍어 전송하고, 또 그 이름에 걸 맞는 몇 마디의 감성적인 단어들을 나열하면, 나는 김아무개가 아니고 ‘블루 오션 브리즈’를 마시는 김아무개인 것. 다성 초의는 차는 홀로 마시면 신비롭다 했건만, 차는 이제 홀로 마시는 걸 보여줘야, 꼭 ‘티’를 내야 신비롭다.
 
잘 만든 가향차는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는 점에서, 또한 차 입문자들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분명 포기할 수 없는 차다. 그렇지만 가향차, 그 비밀 없는 스핑크스 앞에서 없는 비밀을 찾는 데만 분주할 때, 차의 맛, 그 비밀은 영원히 비밀로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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