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프로 9단 서능욱 - 마음의 평정이 승패를 좌우 > 바둑교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바둑교실


 

바둑 프로 9단 서능욱 - 마음의 평정이 승패를 좌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챠이브 댓글 0건 조회 2,353회 작성일 11-09-15 23:42

본문

지난 7일 오전 10시. 한국기원 4층 대국실에서 서능욱 9단과 김인 9단이 붉게 상기된 채 마주 앉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백을 쥔 서 9단이 소목으로 포석을 깔면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됐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반상위에 깔리고 김 9단 역시 싸움에 응해왔다.
다행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바둑판의 싸움꾼이 아니던가.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왼손에서 굴러가는 염주에 힘을 주었다.
“덜컥수만 조심하면···”

바둑 전문기사 서능욱씨(37). 그의 기력은 신묘한 경지에 들어갔다는 입신(入神) 9단이다. 14세에 입단하여 18년만에 정상에 올랐으니 바둑에 관한한 단시간에 일가견을 이룬 것이다.
왕십리로 자리를 옮긴 한국기원에 들어설때까지 ‘신의 사나이’를 찾는 마음에서 흥분까지 일었다.

“단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1단이나 9단이나 프로에게는 기량 차이가 별로 없거든요.”
“프로 9단이시죠”라는 인사말에 9단의 의미를 간단히 묵살하는 것이 시원스럽다.

유난히 큰 얼굴이 공부를 많이 한 수행자마냥 둥그럽고,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속전속결의 명수답게 신상 탐색의 여유도 주지않고 바둑에 관해 거침없이 쏟아낸다.

“첫수가 가장 어렵습니다. 싸움이냐 아니면 실리를 취하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한판에서 몇번의 승부수를 느낍니까.”
“바둑알 한알 한알이 모두 승부수입니다. 이는 곧 유혹이기도 합니다. 특히 상대방이 무리수를 두거나 싸움을 걸어오면 참지 못하고 ‘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둑은시작에서 끝나는 순간까지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승패를 좌우합니다.”
프로는 단순히 지고 이기는 것을 떠나서 바둑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서 9단의 지론이다.

91년 KBS 바둑축제때 1백11명을 상대로 7시간 40분에 걸쳐 다면기를 소화했다. 세계 최다다면 기록이다. 이러한 서 9단의 기풍은 속기를 원하는 TV바둑에서 역량을 발휘했다. TV바둑프로를 인기프로로 정착시키는데 최대의 공헌을 한것이다. 그래서 서 9단에게는 꽤 많은 바둑팬이 있다.

그러나 ‘신의 사나이’ 서 9단도 빠른 바둑에서 최대의 걸림수인 덜컥수만은 피해가지 못한다. 아직 국내 13개 타이틀 가운데 하나도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것은 대부분 덜컥수에 걸린 때문이다.

16번이나 정상의 문턱에서 꺾였으니 패배에도 달관해 있지 않을까하여 시합에 졌을때의 심정을 물었다.

“한마디로 참담합니다. 이길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혼을 팔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렇지만 순간입니다. 대국장을 나서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며 잊어버립니다. 바둑에서 돌을 버릴줄 알아야 하듯 어디에서나 집착하지 않고 잊는 것이 고수의 첩경이라 생각합니다.”

서 9단에게는 5년전 부인 현인숙씨가 건네준 염주가 있다. 오른손목에 단주를 차고 왼손으로 염주를 굴리다보면 마음보다 더 빠르게 나가는 손을 저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의 표시다.

“염주가 덜컥수를 해결해 준다면 기복신앙이지요. 바둑에 빠지다 보면 염주마저도 잊혀집니다. 이때부터는 얼마나 바른 눈을 가졌느냐입니다. 바른 눈을 가져야 바른 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얄팍한 속임수는 통하지 않습니다. 바둑의 정석은 정도(正道)입니다.”

바르게 보고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라는 부처님 가르침 팔정도(八正道)가 바둑의 정석이라는 서 9단의 바둑관이 계속됐다.

“바둑의 위기십결(圍棋十訣) 가운데 사소취대(捨小取大)가 있습니다.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도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라 했습니다. 이처럼 바둑도 당연하지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큰 것과 작은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요.”

선(禪)에 1천7백 공안이 있듯 바둑판에서의 수는 곧 하나 하나가 공안이다.

1천6백년 전 중국의 동진시대에 지도림(支道林)이란 스님은 바둑을 수담(手談)이라 했다. 두사람이 마주 앉아 입으로는 말이 없이, 손으로 바둑알을 움직여 서로의 의사를 표현한다 하여 이른 말이다.

바둑판에서 돌이 치워지고 나면 홀연히 태초로 돌아간다. 동요, 결단, 환희, 고통으로 뒤범벅된 한판의 바둑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그자리는 다시 비어버린다. 또다시 이곳에는 새로운 세계가 그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혹자는 기선일여(棋禪一如)라 한다.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이 명경지수와 같이 차분히 가라앉아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는 무아경.

“바둑은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편안할 때 좋은 수가 나옵니다.”

서 9단은 일본의 오오다케(大竹) 9단의 기풍을 좋아한다. 바둑의 낭만파라 불리는 오오다케 9단의 바둑은 너무 맑아 기량에 비해 성적은 나쁜 편이다. 서 9단도 그렇다. 깨끗한 바둑이다 보니 성적이 좋을리 없다.

금년에도 20승 20패. 간신히 승률 50%를 유지하고 있다. 이날의 시합은 기성전 25국째, 생각지 못한 김인 9단의 싸움판 합세에 손오공 서능욱 9단의 여의봉이 모처럼 신바람을 냈다.

30수가 이번 시합의 승부수가 됐다. 축머리를 이용한 바꿔치기로 시합 3시간만에 백 17승 반집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은 제 마음이 깨끗했나 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