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문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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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미 댓글 0건 조회 975회 작성일 15-07-17 23:43본문
복도식 아파트에 살 때였다. 옆집에 중학생 아들과 직장인 부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부턴가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자그마한 키에 꽤 부지런한 분으로 보였다. 할머니는 내게 먼저 다가오셨다. 서울에는 생전 처음이니 앞으로 잘 지내자며 내 손을 잡으셨다.
할머니는 해 질 녘이면 굽은 허리를 펴서 간신히 난간을 잡고 목을 늘려 밖을 바라보셨다. 그런 할머니를 보니 잠시 키웠던 민달팽이가 생각났다. 시골에서 가져온 상추에 민달팽이 한 마리가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울까지 왔구나 싶어 집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달팽이는 자꾸만 기어 나와 돌아다녔고, 낯선 베란다 바닥에 안주하지 못했다.
할머니도 매일 밟으시던 포근한 흙이 아닌, 대리석 바닥이 낯설 것이다. 당장이라도 시골로 가고 싶지만, 자식에게 불효자란 말을 듣게 할 수 없다며 긴 한숨을 쉬셨다. 두어 달이 지났을 무렵, 할머니 혼자서도 밖을 나가시는 듯했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생겼다. 할머니가 외출하시는 날이면 문 앞에 치약이나 비누 상자가 놓인 것이다. 어느 날은 발길에 차여 우리 집 앞까지 왔다. 누가 버렸는지 걸리기만해 봐라 별렀지만 집을 자주 비우는 탓에 범인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와 손자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할머니는 손자에게 물건을 왜 자꾸 치우느냐며 화내셨고 손자는 모른다고 했다. 아하, 내가 미처 몰랐구나. 물건은 숫자를 모르시는 할머니의 문패였다는 걸. 글은 모르더라도 마음을 읽을 줄 아시는 할머니에게 문패를 달아 드리고 싶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떼어 낸 돼지 모양 병따개를 할머니 집 문에 테이프로 꼭꼭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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