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자존심 - Boucheron(부쉐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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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wha 댓글 0건 조회 1,644회 작성일 11-01-29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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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자존심 - 부쉐롱
지금으로부터 140여년전 보석의 명인 프레데릭 부쉐롱은 프랑스 제2제국시대를 유행하던 낡은 전통적인 패션(Conventional Look)을 떨쳐 버리고 변화 무쌍하고 새롭게 하는 철학을 보석에 접목하였다.
당시 상류사회 여인들은 루이 14세 시대에 걸맞게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하였는데 프레데릭 부쉐롱은 자연으로 눈을 돌려 꽃과 나뭇잎을 형상화한 아르누보 디자인을 창조하기 시작했고 가장 매력적인 보석을 갖고 싶어 했던 귀부인들의 관심을 즉각 끌어 들일 수 있었다.
1858년에 보석상을 설립한후 왕족, 귀족 등 프랑스의 엘리트들은 부쉐롱의 보석작품으로 치장하게 하였다. “사치스럽고 지나치게 화사하다”는 단어는 부쉐롱의 보석명품들이 독특한 디자인으로 만들기 시작한 당시 쓰이던 단어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보석으로 치장하기를 좋아했던 귀부인들은 맥심의 마이트로 호텔에 모여 사치스로움을 뽐내던 시절이며 이런 내용은 유고 작품에서도 널리 표현되었다.
또한 부쉐롱은 대중의 유행을 이끌어가는 재능을 갖고 있으며 다이아몬드와 함께 조각 작품이나 그당시 시도하지 않았던 여러 물질인 나무와 크리스탈 등 금 레이스와 리본, 나비 넥타이 등을 디자인 했고 이것은 파리에서 전세계로 널리 퍼져 나갔다.
부쉐롱은 점차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 18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국 건국 백주년 기념행사에서 “미국이 발견한 보물들” 이란 제목으로 전시를 하기도 했다.
1893년 부쉐롱은 파리의 방돔가에 자리잡은 첫 번째 보석상이 되었으며 러시아 황제,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 그리고 사타 베른하르트 브로치와 부채, 오페라 안경 등의 그의 환상적인 작품은 일본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여 재창조하였다.
1901년 부쉐롱의 아들 루이는 부쉐롱과 나란히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1년 뒤 프레데릭이 죽자 루이는 부쉐롱 왕국의 대를 이었다. 루이 부쉐롱은 부친의 뜻을 잇기 위해 원석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커팅하는 것을 시도하는 데 라피스 라쥴리나 오닉스, 터키석등 준보석을 활용하여 아버지보다 더 칭송을 받게 되었다.
아르데코 운동이 펼쳐졌던 파리에서 1925년 전시회은 루이 부쉐롱 특유의 창작정신을 선보였다.
1931년 “Jeweler of Thousand and one night” “천일 야화의 보석상” 이란 칭호를 들을 만큼 세계에서 가장 보석을 많이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100캐럿, 200캐럿 에메럴드를 포함한 이란의 보물들과 세계에서 가장 큰 장미 모양 다이아몬드 그리고 5만2천여점의 진귀한 보석들이 루이 소유였다.
부쉐롱 3세대에는 파리가 세계의 패션 수도로서 1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유행을 불러왔고 세계의 여성은 보다 여성적인 것을 원했다. 패션과 보석이 앙상블을 이루었고 멜레 다이아몬드로 말아 올려 뒷머리를 치장했고 루비 크러스터핀은 창넓은 모자 꼭지에 착용하는 데 쓰였다. 모두 정교한 디자인으로 하였다.
현재 부쉐롱은 4대인 알랭 부쉐롱이 경영한다. 1970년 이후 알랭은 현대에 걸맞는 융통성있는 작품을 창조하였다.
알랭은 한국, 타이완, 일본에도 진출하였고 또한 1996년 알랭 부쉐롱은 스위스 바젤쇼에 시계를 출품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그니 향수와 더불어 세계 도처 명품 상가에 진열되었으며 그의 시계는 권위의 상징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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