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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을 칠석(七夕) 서로 떨어져 있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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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레몬 댓글 0건 조회 1,186회 작성일 11-09-05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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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을 칠석(七夕)이라 한다. 이 날은 1년 동안 서로 떨어져 있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이라고 하는데, 그들의 애틋한 사랑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내려온다.
 
하늘나라 목동인 견우와 옥황상제의 손녀인 직녀가 결혼하였다. 그들은 결혼하고도 놀고 먹으며 게으름을 피우자 옥황상제는 크게 노하여 견우는 은하수 동쪽에, 직녀는 은하수 서쪽에 떨어져 살게 하였다. 그래서 이 두 부부는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건널 수 없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애태우면서 지내야 했다. 이러한 견우와 직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 들은 까마귀와 까치 들은 해마다 칠석날에 이들을 만나게 해주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 주었으니 그것이 곧 오작교(烏鵲橋)이다.
 
그래서 견우와 직녀는 칠석날이 되면 이 오작교를 건너 서로 그리던 임을 만나 1년 동안 쌓였던 회포를 풀고 다시 헤어진다. 그래서 칠석날 세상에는 까치와 까마귀는 한 마리도 없으며, 어쩌다 있는 것은 병이 들어 하늘로 올라갈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 또 까마귀와 까치는 이날 다리를 놓느라고 머리가 모두 벗겨지게 된다고 한다. 칠석날 전후에는 부슬비가 내리는 일도 많은데, 이는 견우와 직녀가 서로 타 고 갈 수레 준비를 하느라고 먼지 앉은 수레를 씻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물이 인간 세상 에서는 비가 되어 내리므로, 이 비를 '수레 씻는 비' 즉 '세차우(洗車雨)'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하여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라고 하며, 이튿날 새 벽에 비가 내리면 이별의 슬픈 눈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때의 비를 '눈물 흘리는 비', 곧 '쇄루 우(灑淚雨)'라고도 한다.
 
이 이야기는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한대(漢代)의 괴담(怪談)을 기록한 책인 《재해기(齋諧記)》에 이러한 이야기가 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7월 7일 저녁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졌던 견우성과 직녀성이 만나 는 자연적인 현상에서 성립되었다.
 
즉 천문학상의 명칭으로 견우성(牽牛星)은 독수리별자리[鷲星 座]의 알타이어(Altair)별이고, 직녀성(織女星)은 거문고별자리
칠석날의 가장 대표적인 풍속으로는 여자들이 길쌈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직녀성에게 비는 것이다. 이 날 새벽에 부녀자들은 참외, 오이 등의 초과류(草菓類)를 상위에 놓고 절을 하며 여공(女 功:길쌈질)이 늘기를 빈다. 잠시 후에 상을 보아 음식상 위에 거미줄이 쳐져 있으면 하늘에 있는 선녀가 소원을 들어주었으므로 여공(女功)이 늘 것이라고 기뻐한다. 혹은 처녀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은 다음, 그 위에 고운 재를 평평하게 담은 쟁반을 올려놓고 바느질 재주가 있게 해 달라고 비는데, 다음날 재 위에 무엇이 지나간 흔적이 있으면 영험이 있다고 믿었다.
 
칠석날의 가장 대표적인 풍속으로는 여자들이 길쌈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직녀성에게 비는 것이다. 이 날 새벽에 부녀자들은 참외, 오이 등의 초과류(草菓類)를 상위에 놓고 절을 하며 여공(女 功:길쌈질)이 늘기를 빈다. 잠시 후에 상을 보아 음식상 위에 거미줄이 쳐져 있으면 하늘에 있는 선녀가 소원을 들어주었으므로 여공(女功)이 늘 것이라고 기뻐한다. 혹은 처녀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은 다음, 그 위에 고운 재를 평평하게 담은 쟁반을 올려놓고 바느질 재주가 있게 해 달라고 비는데, 다음날 재 위에 무엇이 지나간 흔적이 있으면 영험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풍속은 직녀를 하늘에서 바느질을 관장하는 신격으로 여기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원래는 칠석날 밤에 궁중이나 민가의 부녀자들이 바느질감과 과일을 마당에 차려 놓고 바느질 솜씨가 있게 해 달라고 널리 행하던 중국 한대(漢代)의 걸교(乞巧)의 풍속을 따른 것이다. 이 풍속은 당대(唐代)에 와서 주변 민족들에 전파되었는데, 우리 나라의 칠석 풍속은 중국의 그것과 는 사뭇 다르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밀전병과 햇과일을 차려놓고, 부인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 족의 수명장수와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기도 한다. 또 이북지방에서는 이 날 크게 고사를 지내거나 밭에 나가 풍작을 기원하는 밭제[田祭]를 지내기도 한다.
 
중부지방에서는 '칠석맞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단골무당에게 자녀의 무사 성장의 기원을 부탁하는 것이다. 무당은 물동이를 타고 기원의 상징인 명다리를 내어 바람에 불리고, 다시금 무사 성장의 기원을 한다. 한편 7월이면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시기이다. 농가에서는 김매기를 다 매고 나면 추수때까지는 다소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장마를 겪은 후이기도 한 이때, 농가에서는 여름 장 마철 동안 눅눅했던 옷과 책을 내어 말리는 풍습이 있다. 이를 쇄서폭의( 書曝衣)라 하는데, 이 날은 집집마다 내어 말리는 옷과 책으로 마당이 그득하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7월 7일조에도 인가에서는 옷을 햇볕에 말린다 하여 이는 옛날 풍속이라 하였는데, 이 날에 내어 말리는 옷과 책의 수량에 따라 잘살고 못사는 것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최남선의《조선상식(朝鮮常識)》에는 칠석은 원래 중국의 속절(俗節)로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공민왕(恭愍王)은 몽고 왕후와 더불어 내정에서 견우·직녀성에 제사하였고, 또 이날 백관들에게 녹을 주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절일제(節日製)의 과거 를 실시하였다고 하였다. 다양한 생활주기와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오늘날 칠석의 풍속은 다만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동 심의 세계에 꿈을 부풀리는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칠석의 절식으로는 밀국수와 밀전병이 있다. 이 날이 지나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밀가루 음식은 철 지난 것으로서 밀냄새가 난다고 하여 꺼린다. 그래서 밀국수와 밀전병은 반드시 상에 오르며, 마지막 밀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곧 칠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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