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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가주에서 성공한 한인들 - ‘성실’을 무기로 ‘발달된 비즈니스 감각’을 통한 성공인 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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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ILL 댓글 0건 조회 1,893회 작성일 15-06-03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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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가주에서 성공한 한인은 셀 수 없이 많다. 실리콘밸리에서 IT 비즈니스로 대박이 터진 사람, 회사가 주식시장에 상장돼 떼 돈 벌은 사람 등등. 그러나 시쳇말로 맨 땅에 헤딩하면서 성실하게 비즈니스를 일궈 차근차근 성장해 온 자수성가형 비즈니스맨들도 꽤 된다.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것에 인색해서는 안된다는 판단하에 위클리 중앙 창간호는 이들의 인생 스토리를 커버스토리로 다루기로 했다.

‘북가주에 와서 성공이란 뿌리를 내린 자랑스런 한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중‘성실’을 무기로 또‘발달된 비즈니스 감각’을 통한 성공인 6명을 선정해 이들의 성공담을 소개하는 기회를 갖기로 한 것이다.

선정기준은 20년 이상 북가주 일원에 살면서 누구나‘아 그 사람’하면 알 수 있는 인물이거나‘북가주에 사는 한인으로서 당해 비즈니스 업체를 방문 안해본 사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곳 중, 성공한 곳으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업주가 그 대상이다. 이들의 성공 노하우를 조명해 본다.

김한일치과병원

북가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인 치과하면, 단연 김한일 치과다. 치과병원이라기보다 치과 그룹으로 불려지는 것이 더 걸맞다.
16명의 치과의사와 하버드 치대 출신의 치아교정전문의, 임플란트 전문의를 고용하고 있는 이 병원은 한인 커뮤티니 뿐만 아니라 주류사회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가장 규모가 큰 치과 그룹이다. 전체 직원은 40여명이다.
원장 김한일(50)씨는 중학교때 이민 왔다.
UC버클리와 미국에서 랭킹 안에 드는 치과전문의 양성소 UOP 치대를 졸업한 김원장은 남들에게는 부친 김진덕 전호남향우회장의 후광으로 치과의사 공부하고, 병원 차려 성공한‘귀족형 한인 1.5세로, 인식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 억척스레 일해 번 돈으로 병원의 덩치를 차례차례 불려 나간 순수 자수성가 그룹에 편입되는 인물이다.

아버지 김진덕 회장이 20여년전 다니던 공장 수퍼바이저에게“아들, 한일이가 버클리에 입학해 학비를 벌어야 하니 시간외 근무를 허용해 달라고 메모를 건네주어 초과근무 허가를 받아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김원장의 하루 근무 시간은 15시간 이상이다. 한 마디로 일벌레다.
오전 9시, 늦어도 10시경 출근하는 김원장은 저녁 9시나 10시까지 병원에 남아 일을 본다.
토요일, 일요일도 그것도 늦게까지 문여는 이 병원 성격상 김원장이 노는 날은 거의 없는 셈이다. 일요일 하루 노는 날 외에는 휴가도, 공휴일날 비번도 없는 셈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 취미인 골프 한번 쳐본적이 없다고 한다. 김원장 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열심히 일한 것이 치과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성장엔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벌레 김원장도 토요일 오후 5시면 슬그머니 사라진다. 1주일에 한번 부모님과 함께 외식하는 것이 유일한 부모님의 낙인 관계로 토요일 저녁만큼은 만사 제치고 가족들과 모처럼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 날에는 누나네 식구, 동생네 식구들도 대개 어울려, 한 번에 보통 10명 이상의 가족들이 함께 식사한다고 한다.
일벌레가 성공의 으뜸 비결이라면 치과 기술 노하우 및 꼼꼼함이 성장동력 2호다. 치과의사들을 미국내 최고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세미나에 보내 신기술 습득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0.01mm의 오차도 허용 못한다’가 모토인 관계로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함께 일하는 의사들이 죽을 맛이다.

한번은 환자에게 크라운을 씌우는 과정에서 기공회사가 가져온 크라운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루에 4번 배달을 시킨 적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크라운의 오차로 인해 하루에 4번이나 퇴짜를 놓고 재주문할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조금이라도 환자가 불편함을 느끼면 그 자리에서 뜯어 내고 새로운 것을 끼워야만 하는 완벽주의자인 셈이다. 최근 몇 년 전 부터는 직접 진료는 안하고 있다. 병원 CEO로 운영에 전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원장의 진료기술에 중독된 환자들이 꼭 김원장이 진료해야 한다고 우기면 할 수 없이 진료 테이블에 가 고무장갑을 낀다고 한다. ‘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는 돌아온다’가 인생 모토인 김원장은 ‘내 인생에 은퇴란 있을 수 없다’를 매일 되뇌이며 오늘도 10시까지 남아 직원, 환자들이 다 돌아간 뒤 병원 셔터를 내리는’셔터맨’ 의 소임을 다하면서 꿋꿋이 살고 있다.

유병주(50) 코리아나 플라자

북가주 한인 커뮤니티 북쪽에는 코리아나 플라자가 둥지를 틀고 있다.
유병주(50) 코리아나 플라자 사장은 20대 초반에 이민와 집안을 불처럼 일으킨 대표적인 아메리칸 드림 실현자다. 마켓 비즈니스의 소프트 랜딩까지 할 일이 너무 많았던 관계로 장가도 다소 늦게 갔으며 늦게 아이를 낳아, 아직 자녀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정도다. 유사장은 선반 물건 쌓기 작업을 손수하는‘자가 노력형’이다. 제품에 가격표를 붙이는 작업에서 선반이 비면 창고에서 물건을 날라다가 쌓기 작업을 하는 등 워크홀릭이다. 아무도 사장인줄 모른다. 점원인줄만 알지….

코리아나 플라자의 현 고객 분포를 보면 한인 55%, 중국인 등 타커뮤니티 45% 등으로 포트폴리오가 잘 되어 있다. 새크라멘토 매장을 오픈 한 덕분에 일주일에 3일은 새크라멘토, 4일은 오클랜드 생활을 한다. 일주일에 거의 절반은 본의 아니게 기러기아빠 생활을 하는 셈이다.
유사장은 셈이 밝은 사업가로 정평 나있다. 물건 값 외상이 별로 없는 것이다. 셈은 곧 신용을 의미하는 것으로‘사업에서 신용을 잃으면 끝이다’가 인생 모토다.
몸에 밴 절약 정신은 물건 값을 낮추는데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유사장은 일 년에 한 두 차례 2주 이상 한국과 중국을 방문한다. 한국내 식품상들을 만나 싸게 물건을 흥정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중간 유통 마진을 줄여 원가 절감요인을 발생시켜, 소비자에게 싼 값에 제공하는 것이다.

유사장의 또 다른 성공 노하우는 인력 관리다. 유통업에 근무한 베테랑을 한국에서 수입해다가 고용할 정도다.‘직원을 식구같이 대한다’도 또 다른 성공 비결이다. 매년 연말이면 오클랜드와 새크라멘토 매장 전 직원들을 삼원회관 등에 초청해 풍성하게 파티를 연다. 이날은 어김없이 새크라멘토 매장은 오후 4시에, 오클랜드 매장은 오후 6시면 문을 닫는다. 한인, 히스패닉계 직원들이 함께 어우러져 실컷 먹고, 실컷 노래 부르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날린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서도 유사장의 사업 수완이 발휘된다는 점이다.
유사장은 조니 워커나 발렌타인, 크라운 로열 등의 주류 도매상을 이른바 그날 ‘컬(call)’한다. 그날 연회에서 쓰이는 술을 무상 원조받는 것이다. 그만큼 판매해 주니까 주류도매상들도 신나서 선물하는 것이다. 일벌레 유사장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끔 노래방을 찾는다. 노래 부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비틀즈의’예스터데이’나 ‘헤이 쥬드’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등 올드 팝이 그의 18번 노래들이다. 노래방에서의 유사장 팝송 실력은 가수 뺨 칠 정도다. 유사장의 숙원 사업은 현재의 마켓이 면적 면에서 협소한 지라, 장소를 넓혀 이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각적인 검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주차장이 협소한 것을 가장 마음 아파하는 유사장이 언제 어디다가 새 매장건립 이라는 대형 사고(?)를 칠지는 미지수다.

유사장은 지역사회에 많은 도네이션을 행하는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인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뜻깊은 행사 스폰서는 물론, 중국이나 아시아계 더 나아가 미국 주류사회에까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은 마다하지 않고 찾아간다. 작년에 UC버클리에서의 한국강좌 폐지 움직임이 있을 때도 발벗고 나서 한국강좌 지키기 한인 학생회에 큰 도움을 주었다. 사업에 바쁜 사람이, 판단을 위해 학생회 관계자가 개최하는 현 상황 설명회에 꼭 찾아다니는 발품도 상당히 팔았다. 발품을 판 이유에 대해 물으니 “정확한 원인 분석이 있어야 도움의 수위를 정할 수 있어서”라고 한다. 빈틈없는 사업가적 기질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정의 김현해

샌프란시스코 한인 식당의 원조격인 고려정의 김현해(70)사장도 북가주 요식업계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성공인 중의 한 명이다.
연세대 출신으로 70년대초 유학왔다가 누나가 하던 당시의 고려정을 인수한 후 40년 가까이 요식업에 종사한 한 우물 판 이민 1세대다.
당시 김사장이 고려정을 오픈했을 때 샌프란시스코내 한인 식당이라고는 아리랑, 향촌 등 손꼽을 정도였다. 산호세에는 산장이 막 생길까말까 하던 시절로 고려정은 한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한 곳이다.
그후 우후죽순격으로 많은 한인 식당들이 생겼다가 사라지곤 했지만 고려정 만큼은 구관에 이어 신관까지 운영할 정도니 그 노하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공비결은 김사장의 부지런함이다.
‘부지런한 새가 더 많은 모이를 물어온다’가 인생 모토인 김사장은 아무도 아침식사 비즈니스를 안 할 때 식당 문을 열고 아침 손님을 받아 성공했다.이 덕분에 역대 한국 대통령들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면 꼭 이 집을 찾아 아침 식사를 즐기곤 했다. 대통령들이 시간이 여의치 않을 경우 고려정 아침식사를 주문해다가 호텔에서 먹을 정도였다.

북가주에서 한국 식당의 지존 대접을 받는 이유 역시 남들 쉴 때 문을 열고 손님을 받을 수 있었던 근면함이 그 배경이다.
김사장이 젊었을 때는 일류 멋쟁이로 통했다고 한다.
지금도 칠순이 넘는 나이에 머리를 내려 일명‘꽁지머리’를 하고 다닌다든지, 칠순 노인이 청바지를 입고 다닌다든지 심상치 않은 패션 감각이 이를대변한다.
옛날에는 더 했다고 한다.남자가 밍크코트도 입고 다녔을 정도며‘인생 얼마나 사나’하면서 벤츠도 독일에서 직접 주문한 일명 ‘주문형 벤츠’만 공수해다가 탄 적도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외모면에서‘연예인’기질이 물씬 풍겨나는 장본인이 바로 김사장이다.
인생의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진정한‘멋장이’란게 주변 사람들의 평이다.
김사장 역시 스트레스를 받으면 푸는 방법이 있다. 바다낚시를 떠나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최고 잘나가는 식당 주인이 직접 잡아 온 광어회는 진짜 귀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1년에 한 두차례 지인들 및 단골 손님들을 데리고 바다 낚시에 나서는 것도 김사장의 취미 생활중 하나다. “김사장이 잰 양념 갈비를 갖고 나가 배 위에서 구우면서 갓 잡아낸 생선을 회로 만들어 함께 먹으면 입안 행복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 김사장의 바다낚시에 초대 받았던 사람들이 하는맛이다.
또 다른 취미는 신관 고려정 이층에 마련된 자신만의 ‘쉼 공간(일명: 비트)’에서 사색을 하거나 노래 부르며 쉬는 것이다. 베란다에 아기자기한 화단을 꾸며 놓았을 정도로 섬세한 면도 갖추고 있으며 앰프 및 스크린도 대형,고급으로 설치해 웬만한 노래방은 저리가라다.

김사장은 진정한 요리사다. 아직까지 요리하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식당이 천생연분인가 보다”고 스스로도 말한다.
김사장의 지인들은 김사장의 성공비결로 ‘부지런함’과 ‘프로 서비스 정신’을 꼽는다.한인 식당이 드믄 시절에 요식업에 뛰어 들어 지금까지 일구어 온 것을 보면 고려정이 몇 백년 전통을 이어 내려가는 가업 식당으로 계승해 나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고려정이 ‘SINCE 1972’부터 몇 백년동안 이어 나가면서 북가주에서 명맥을 유지하길 기대해 본다.

오가네 오미자

오클랜드로 무대를 옮기면 ‘오가네’란 그럴듯한 한식당이 있다. 단독 건물에 외벽을 한국 벽화로 치장해 놓는 등 한국식당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 바로 오가네다. 오가네 여주인 오미자(60)사장도 북가주 한인사회에선 입지전적인 사업가다. 여장부로 통하는 사람이다. 시쳇말로 맨 땅에 헤딩한 채, 불모지에서 사업을 한 단계, 한 단계 불려 나간 장본인이어서다.
스왑 밋에서 모조 가방 장사로 시작해 종자 돈을 만든 오사장은 그후 고려숯불 갈비와 고려 하숙을 통해 사업체를 안정궤도에 올려 놓은 후, 오가네 사업을 통해 굳히기 작업에 성공했다.

오사장의 장점이자 단점은 오지랖이 너무나 넓다는 점이다. 오지랖이 워낙 넓어 고객이나 지인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은 있으나 반대로 이같은 넓은 오지랖이 수위 없는 가까움으로 발전돼 대인관계에 있어서 공과 사가 가끔씩 흐려질 때도 있어서다. 아무튼 오사장의‘사람 흡입력’은 고객들이 오가네를 다시 찾게 하는 이 식당의 노하우 이자 경쟁업체들로서는 부러운 노하우다.
오사장은 우선 손 끝의 맛이 있는 사람이다. 식당 경영인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얘기다.

손님과 얘기하다가도 손님이 원하는 메뉴가 없을 경우, 손수 주방에 들어가 금방 손님이 말했던 요리를 후딱 만들어 갔고 나오는 노하우가 있는 것이다.
일도 후딱 한다. 이 집의 밑반찬만 하더라도 정말 다양하다. 북가주 한인식당들 가운데 가장 많은 가지 수를 자랑하는 곳중 한 곳이다.
보통 12가지 안팎의 밑반찬이 나와 식탁에 놓인다. 주문한 요리를 올려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다. 오사장은 여성치고는 술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다. 북가주 한인 식당에서 가장 먼저 와인을 판 사람중 한 명이 바로 오사장이며 막걸리도 쌀 막거리에서부터 좁쌀 막걸리, 흑미 막걸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다. 본인은 막걸리 맛을 얼마나 귀신같이 아는지, 유효기간 지난 막걸리를 더 즐긴다. 이들 막걸리를 판매는 않지만 늘 보관하고 있다가 자신이 마신다.
‘김치도 신 김치가 맛있듯이 막걸리도 묵은 막걸 리가 맛있다’가 그녀의 막걸리 모토다. 김치도 숙성이 잘된 것이 맛있듯이 막걸리도 발효가 완벽하게 되어야 한다가 오사장 지론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효기간을 따지는 것은 팔불출이라며 핀잔 주기가 일쑤다. 이같은 주장에 넘어가(?) 유효기간 지난 막걸리를 찾는 고객도 가끔씩 있다고 한다. 오클랜드에서 막걸리 찾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까하는 의구심도 발동될 수 있지만 아무튼 한식과 막걸리와의 찰떡 궁합을 감안한다면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발견할 수 있는 단초가 나온다.

오사장은 고객이 타인종으로 많이 기우는 것을 오히려 경계한다. 한국 음식 고유의 맛 상실을 우려하는 것이다. “타민족이 많이 찾아오면 장사가 잘 돼,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겠지만 일정비율에서 그쳐야지만 한국 음식 고유의 맛을 오가네가 지킬 수 있다”고 오사장은 늘 말한다. ‘한국음식 전통 맛 지킴이’를 자처하는 듯한 이같은 오사장의 음식 철학이 마음에 들어 이 곳을 찾는 사람이 꽤 된다. 이 역시 식당주인으로서 부러운 자산이지 않을 수 없다.
오사장의 다른 경영 노하우는 단골 손님 존중이다. 자주 찾는 사람은 이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가 오사장의 식당 철학인 것이다. “서비스 음식을 하나 더 주어도 단골에게 주어야 한다.” “아무리 적은 인원이 왔어도 행여 조용한 곳에서 얘기를 할 필요가 있는 단골에게는 이층 전체를 통째로 제공해야 한다.” 역시 오사장의 경영 철학이다.이같은 여장부다운 면이 사업을 흥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 단골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오토 콜리션 센터 최성환

가주 한인 바디샵 중에 1호점, 2호점으로 사업장을 넓혀 나간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분야에서 그 흔치 않은 위업을 일군 인물이 한 명 있다. 헤이워드에서’오토 콜리션센터’ 라는 바디 샵을 운영하는 한인 최성환(55) 사장이 화제의 주인공으로 헤이워드 1호점에 이어 뉴왁 2호점을 개장, 최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최사장의 실력은 한인보다는 외국인들에게 더 인정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월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가이코 보험회사는 오토 콜리션을 미 전역 2위, 캘리포니아주 1위를 차지한 바디샵으로 선정했다.
가이코사가 고객들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 기초한 것으로 오토 콜리션은 안정성, 신속성, 만족도 부문에서 고객들로부터 최우수 평가를 받은 것이다.
말이 미 전역 2등이지, 이는 바디샵 분야만 놓고 본다면 한인 학생이 하바드 대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것과 같은 평가인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외국인이 더 좋아하는 한인 운영 바디샵이란 별칭을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민생활 38년중 30년 이상을 자동차와 씨름한 최사장의 노하우는 미국 굴지의 자동차딜러에서 꼼꼼히 배운 기술 단 한 가지. 대강 대강이 안 통하는 원천 기술 자체를 습득한 것이 성공의 키였던 것이다.
도요타, 포드 등 주류 자동차회사 딜러에서 익힌 기술을 토대로 최첨단 기술을 접목시켜 한국형 바디샵 기술을 탄생시킨 장본인이 최사장이다. 현재 3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중소기업 사장으로 명망이 높다. 종업원 중에는 채용을 꺼려하는 장애인도 끼어 있어 최사장의 휴머니즘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최사장 역시 이민 초반시절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청소업부터 시작했다가 바디샵 기술을 배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을 기억하듯 최사장은 남 돕기를 좋아하는 인물이다.
단 불우이웃이나 타민족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데 있어서 만큼은‘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를 정도’로 철저히 비밀로 부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최사장은 나이에 비해 최근 늦둥이를 보았다. 따라서 늦둥이와 노는 것이 스트레스를 푸는 일이라고 한다. “늦둥이가 없었다면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 것이냐”고 물었더니”그렇다면 차 고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고 한다. 영낙없이 바디샵 맨임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할아버지 나이에 자식을 보았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상상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최사장에게는 꿈이 한가지 있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당차기도 한 것 같지만 다른 일면으로는 소박하다는 느낌도 든다.
꿈은 다름 아닌‘미 전역에서 가장 우수한 기술과 서비스를 자랑하는 한인 바디샵으로 남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지를 본인이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한결같은 서비스만이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알렉스박 변호사

북가주 한인중 일주일에 7일 내내 감옥소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때 이민와 중학교때부터 신문을 돌리며 일찍이 생활의 자급자족을 선언한 알렉스 박(49)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산호세 주 감옥소(main jail) 간수들이 부쳐준 별명이 ‘감옥과 결혼한 한인 변호사’일 정도다.
이민 직후 박변호사 역시 남들처럼 방황기가 있었다.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불량소년들과 어울려 사고를 많이 쳤던 것.

샌프란시스코 소재 화랑도장에서 태권도를 접하면서 불량기는 사라지기 시작했고 차이나 타운 내 한인 감리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사람다운 삶으로 전환이 가능했다고 박변호사는 밝힌다.
생각보다 빨리 철든 박변호사는 공부의 필요성을 실감, 대학교 때부터 공부도 억척스레 했다. SF주립대(정치학)-SF(MBA)-JFK(법학)에서 수학했다. 불량배들과의 ‘잘못된 만남’으로 부터 탈출하게 된 동기는 ‘태권도 입문’‘종교귀의’ 그리고 법학공부과정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때문이라고 한다.

박변호사는 대학원을 마치고 공수부대에 자원입대, 위생병으로 근무한 이색전력도 갖고 있다. 주로 중남미 콜롬비아 코케인 마약사범들을 소탕하기 위해 정글에 낙하산으로 투입되는 소대원의 일원으로 정글에 버려지기가 일쑤였다. 작전을 미치고는 당일로 부대로 귀환하는 이른바 ‘당일치기팀’의 일원으로 근 1년 동안 미국에서 당일치기로 콜롬비아를 수십차례 방문한 전력이 있는 ‘정글 베테랑 공수부대원’이다.
공수부대원 답게 터프한 성격의 박변호사는 주로 형사사건을 많이 수임하는 편이다. 형사사건수임변호사는 부지런해야만 가능하다. 성공의 비결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형사사범의 변호는 또 법정에서의 대응이 관건이다. 법정에서 얼마나 검사와 판사, 배심원을 제압하느냐여서다.

이를 위해서는 피의자(의뢰인)의 의중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의뢰인과의 의사소통이 없으면 변론을 잘할 수 없음은 물론, 검사의 의중을 꼬집어 낼 수가 없는 만큼 피의자와의 접견을 통해 사건을 꿰차고 있어야 한다가 그의 지론이다. 교도소에 있는 피의자들에게 바빠서 못 간다고 하면 피의자들은 득달같이 감옥으로부터 전화를 해댄다고 한다. 불안하니까 와서 상담해야 한다고 애원한단다. 이럴 경우, 친구와 약속을 했다가도 할 수 없이 약속을 깨고 차를 감옥으로 모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그래서 ‘감옥과 결혼한 사람’으로 통하는 것이다. 일요일에도 성당 미사만 마치고는 늘 감옥을 방문하는 것이 박변호사다.
박변호사는 대학에서 대학원으로 진학하기전 밀튼 막스 전 가주 상원의원 보좌관으로 근무한 경력도 있다. 이때의 인연으로 가주, 연방 등지의 많은 상원, 하원의원과 친분을 쌓았다.마이클 혼다 연방하원의원의 경우, 대부(代父)로 통할 정도다. 다이앤 화인스타인 연방상원의원과도 막역한 사이다.

한인 변호사중 흔치 않은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인 박변호사는 장차 정치인으로 변신하길 희망하고 있다. 박변호사의 인생 모토는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사는 사람만이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다.
이번 커버 스토리 인터뷰 요청에는 “내가 북가주에서 성공한 사람 축에 들기나 하냐”면서 아예 손사래를 쳤다. 공수부대원 답지 않게 수줍음을 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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