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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모두 비우고 ‘잘 죽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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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LM 댓글 0건 조회 1,302회 작성일 12-07-2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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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 리스트라는 주제를 놓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겐 이렇다 하게 해보고 싶은 일들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놀랐다. 죽기 전에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 그런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니 이런 생각들이 따라붙었다.

나는 좋은 부모님 슬하에서 성장했고, 남들 다 가는 대학에 진학해 부모님께서 꼬박꼬박 주시는 등록금을 얌전히 내고 무사히 졸업했다. 연애도 열심히 했고, 군대도 즐거운 마음으로 잘 다녀왔다. 한 대기업의 홍보실을 1년쯤 다니다가 월급을 2배쯤 주는 언론사로 직장을 옮겼고, 그곳에서 7년 동안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사이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다. 승승장구 탄탄대로의 20대를 지나 30대 초반으로 진입한 상태였다. 부러울 것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릴 적 꿈이 ‘훌륭한 화가’였는데 직장생활을 하면 도저히 그 꿈을 이루기 어렵겠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7년 동안 몸담았던 회사를 나와 프랑스로 그림 공부를 하러 가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아내와 한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유학길에 올랐다. 젊은 시절부터 늘 동경했던 프랑스 유학의 꿈을 실천한 것이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처럼 기뻤다. 프랑스 화단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주목할 만한 작가로 부상하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그러나 파리 근교 미술대학에서 2년 동안 공부하며 깨닫게 된 건 프랑스 화단에서 주목받으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꿈을 접고 귀국하는 쪽을 선택했다. 아들은 세 살이 됐고, 나는 3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 한동안 일러스트레이터로 자유롭게 살았고, 1년 동안 출판사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하다가 또다시 1년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건달생활을 했다. 그러다 1995년 드디어 월간 PAPER라는 제호의 문화전문지를 창간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17년 동안 꾸준히 그 월간지를 만들고 있다. 무려 200권에 이르는 책을 만들어온 것이니 참으로 오랫동안 ‘같은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해왔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멋대로 만드는 책을 세상에 펴내기 시작했을 때 나이가 30대 중반이었는데 어느덧 백발이 됐다. 나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저질러 보았다. 그러니까 내겐 ‘버킷 리스트’라는 게 사라져버린 셈이다. 이걸 행복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으나 내 뱃속이 후련한 상태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도 내가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은 일이 하나 있긴 하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잘 죽는 일’이다. 이루어지면 좋고 이루어지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평생 동안 꿈꿔온 일 중의 하나가 죽기 전에 나 자신을 모두 비우는 일이다. 어차피 내 영혼이 나의 육신을 떠나게 되면 손 안에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놓아버리게 될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것은 마치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것과 같이 분명한 일이므로 아직 내 목숨이 붙어 있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비우는 일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내 육신이 많이 쇠약해졌다는 걸 느끼게 되는 시기가 오면 나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아주 깊은 산속에 자그마한 오두막집을 하나 장만할 생각이다. 살림살이라곤 밥그릇 하나와 작은 탁자 하나와 방 한 칸이 전부인 그런 집. 그 숲 속 집에서 하루하루를 조용히 소일하며 지낼 생각이다. 바람을 벗 삼아 구름을 벗 삼아 혼자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고 종이 위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다가 어느 달빛이 고운 밤에 편안한 얼굴로 자리에 누워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내게 남은 마지막 소원이다. 세상을 조용히 빈손으로 떠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그런 소박한 꿈. 나는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요즈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을 생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행복해져서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참 고마운 삶이다.

김원 월간 PAPER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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