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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업 (業)과 인과응보 (因果應報))에 관한 부처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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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989회 작성일 09-11-2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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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 (業)과 인과응보 (因果應報))에 관한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은 항상 자신을 업론자(業論者), 행위론자(行爲論者), 정진론자(精進論者)라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업의 가르침은 중요하며 그래서 우리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업보(業報), 업력(業力), 업장(業障), 업화(業火)라는 용어를 늘 쓰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누군들 사전을 외운 듯한 반면교사의 답변에 쉽게 수긍할 리가 없다. 더욱이 그런 큰 질문을 던질 정도이면 알고 있는 것이 많은 인간이다. 불교용어가 대부분 그렇지만 어떤 언어로 풀이해도 그 의미를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사연 많은 실존이 바로 업, 까르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현자는 대장장이가 은(銀)으로부터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점차로 자기의 부정(不淨)을 제거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의 악행은 쇠에서 생긴 녹이
쇠를 먹어들어 가듯이 자신을 지옥으로 데려간다.


남전 『법구경』 239, 240
선어록에서 곧잘 사용되는 “부처란 무엇입니까?(如何是佛)”라는 질문은 큰 질문이다. 큰 질문에 큰 답이 있기 마련이지만 문제는 질문자 자신의 큰 의문이 전제되지 않고 습관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법화경』에서 설하는 바와 같이 ‘희론지분(戱論之糞)’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지금 교계에는 구름과 바람을 잡는 듯한 너무 큰 질문, 교학만이 넘쳐흐르고 실천적인 질문과 교학이 부재하는 악덕이 전통, 보편이라는 이름의 미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바로 우리 마음 속의 또다른 사대주의(事大主義)인 것이다. 그리하여 몽롱한 이야기가 옛날 버전으로 계속 굴러 다니는 한 한국불교는 계속 낡아만 갈 것이다.

우리는 큰 질문보다는 사소한 질문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업(業)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는 날카로운 전류가 흐르기 마련이다. 그것은 “부처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보다도 준엄한 현실을 묻고 있기에 더욱 큰 무게를 갖고 있는 것이다.

대답하여 가로대 “업이란 ‘행위하다’ ‘만들다’를 의미하는 범어의 어근 끄리(kri)에서 파생된 동사 카르마(karma)에서 한역(漢譯)된 용어로서 행위, 작용, 의지라고 번역한다. “인간의 생각과 행위에는 반드시 상응한 선악의 과보가 따른다”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다.
하늘과 바다, 산 속의 동굴 속에 숨어도
자신의 악업을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하늘과 바다 산 속의 동굴 속에 숨어도
지구 위에서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남전 『법구경』 127, 128
매일 벌어지는 각 사건의 조각마다에는 인과가 담겨있고 그 사건의 조각들이 또다른 업의 물결을 일으키면서 누구의 삶이든 삶의 모든 순간은 부메랑이 언제나 자신이 던진 지점으로 되돌아오듯이 인과응보의 부메랑처럼 다시 날아와 꽂히는 것이다. “업보의 그물에 묶여 저승의 장부에 악업만이 늘어나는도다.(業網所拘 報增鬼錄)”라는 한탄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불교경전에서 설해지는 업의 교리는 체념이 아니라 자기책임과 자유의 원리이기에 깊은 통찰을 필요로 하는 삶의 지혜이다.

그러므로 선이 설하는 깨달음도, 화엄의 일체유심조도 모두 업의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업의 사상 위에 건축된 지혜의 궁전인 것이다.
악업의 과보를 당장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소가 먹은 풀이 우유가 되는 것과 같이
악업은 그늘 속에 묻혀서 때를 엿보나니
재 속에 불씨가 꺼지지 않는 것과 같다.


『법집요송경(法集要誦經)』 「업품」
불교는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과 번뇌(kamma kilesa hetu samsarassa)”를 정화하고 안심을 체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업과 번뇌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격정이며 우리는 아집(我執)과 격정 때문에 외부에서 주어지는 데이터를 잘못 해석하고 행동한다. 출력(出力)의 오류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깨달음을 근원적으로 장애하는 무명(無明)이다. 무명이란 환상, 자기기만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상태이며 이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규모의 심리적 물리적 자원을 헛되게 소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고통받는 원인이다. 이 무명이 전인류적인 탐욕과 증오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악업의 과보를 당장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치 저 칼집 속의 날카로운 칼날과 같나니
앞날에는 선업이 없어서
반드시 그 고통의 과보를 받으리

『법집요송경(法集要誦經)』 「업품」
현실에서는 악한 놈이 언제나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미 그는 지옥의 문고리에 손을 잡고 있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악한 사념(思念)의 먼지만 더해가는 불결밖에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악업을 자행하는 인간들이 선한 척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길에서 침을 퉤퉤 뱉고 ‘흐흠’하고 돌아서는 자들을 보는 것처럼 누구나 ‘더러운 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는 이미 살아서 사람들 속의 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다시 『법구경』의 한 구절이다. “가령 백천겁이 지나갈지라도 지은 업은 사라지지 않나니 인연이 모여 만날 때에는 자신이 그 과보를 돌려받는다.(假使百千劫 所作業不亡 因緣會遇時 果報還自受)” 그래서 옛 스님들은 항상 우리들의 괴상한 짓거리들을 바라보며 “인과를 믿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무릇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 마땅히 업의 법칙, 카르마의 법칙처럼 큰 가르침도 또 없다는 것을 행주좌와(行住坐臥)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주목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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