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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신구의 삼업(三業), 몸과 말과 뜻으로 지은 업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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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033회 작성일 09-11-2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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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의 삼업(三業), 몸과 말과 뜻으로 지은 업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

인간은 어떻게 업을 지어가는가? 인간은 몸과 언어, 생각으로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을 짓는다. 이를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한다. 즉 신체적인 행위로 인한 업은 신업(身業), 언어로 인한 업은 구업(口業), 정신적인 업은 의업(意業)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 이 삼업으로 일을 해서 노동의 대가를 얻고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당신이 정신과 행동으로 지은 업은 이 삼업으로 총결된다. 이 세 가지 업이 축적되어 에너지를 가진 업력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업의 훈습은 거듭되어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만들고 심지어는 당신의 얼굴, 생각마저도 그 업의 훈습에 따라 변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산산조각낸 지금, 난마처럼 얽혀서 공황상태에 빠져버린 지금, 현대 한국인은 번뇌와 증오, 악설과 망어로 일그러진 삼업의 지옥 속으로 침몰하고 있는 중이다.

불교는 악몽을 꾸는 이 시대를 향하여 무엇을 말하고 어떤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가? 지금 어떤 고급스러운 깨달음이나 현학적인 교학보다도 더욱 간절하게 요청되는 것은 ‘현대인은 어떻게 살고 죽어야 하며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를 풀어갈 소박하고도 명료한 행동의 가르침 일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의 불교는 불교의 근본자리로 돌아가 ‘잃어버린 차원의 불교’를 창조적으로 복원해야 하는 것이다.

선남자, 선여인들에게 세 가지 법이 있다면 진리의 도량에 이르게 되나니 그 세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신체의 청정(身淨)이요, 둘째는 입의 청정(口淨)이요, 셋째는 생각의 청정(意淨)이다. 이 세가지 법을 갖추면 부처님의 도량에 이르게 되나니 무엇을 이 몸의 청정이라고 하는가. 몸은 이미 한량없는 자비와 지혜의 실천을 닦아서 과거의 업은 벌써 참회하고 멸하여 다시는 몸으로 악업을 짓지 않는다. 어떤 것이 입의 청정이라고 하는가. 부처님의 영원한 가르침을 익히고 닦아서 깊고 큰 법장(法藏)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 이것을 입의 청정이라고 한다. 무엇을 생각의 청정이라고 하는가. 번뇌로 오염된 마음과 집착에서 벗어나 다시는 악업을 짓지 않는 것, 이것을 생각의 청정이라고 한다. 『보살영락경』 「무량품」


지금 우리의 불교는 무언인가? ‘깊은 차원’을 잃어버린 불교이다. 나는 지난 봄 중앙아시아와 중국 내륙의 여러 지역을 순례하면서 과연 우리가 잃어버린 ‘잃어버린 차원의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내내 가슴에 품고 다녔다. 현대불교의 문제는 바로 ‘깊이의 차원’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잃어버린 차원의 불교, 깊이를 상실한 불교, 현대불교가 잃어버린 차원이란 무엇인가?

첫째, 현대불교는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을 받들고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앙교생신(仰敎生信)’을 기초로 한 불교의 종교성을 상실했다. 조선불교의 대표적인 고승, 서산 대사께서 설하신 불교는 항상 깊이의 차원을 염두에 둔 가르침이었으며 불교수행의 필요성과 그 실천을 강조한 불교였다. 그 분의 “我今信解善根力 及與法界緣起力 佛法僧寶加持力 所修善事願圓滿”이라는 한 게송처럼 우리는 신해선근력(信解善根力 : 信心·智慧 ·業)과 법계연기력(法界緣起力 : 自然·生命·社會), 불법승보가지력(佛法僧寶加持力 : 佛敎的 연대와 신앙)을 상실하고 있다.

둘째, 우리는 종교로서 불교의 깊은 차원을 상실했다. 현대불교는 불교교단의 존재와 전망을 계수와 크기로만 생각할 뿐 불교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원효께서 설하신 영지(靈智)를 상실한 것이다. 원효는 “근원적인 지혜는 깊고 그윽하여 헤아리기 어렵나니 무궁한 가르침을 출생시키는 것이 바로 영지인 것이다(靈智者 深玄難測是靈智義 出生無窮是靈智義, 『本業經疏』卷下).”라고 설하고 있다.

셋째, 현대불교는 학문과 수행의 체계를 잃어버렸다. 승가가 자본주의자, 세속적인 성공주의자들의 집단으로 변해버린 지금 다른 무엇보다도 불교는 비록 가난하고 고독하더라도 수행의 깊은 경지를 되찾아서 기형적이고 부패한 현대한국의 배금주의, 이기주의적 오염을 극복한 불교의 정신적인 승리를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유정세간(인간)과 기세간(자연)의 여러 차별은 무엇으로 생성되는가? 송하여 가로되 세간의 차별은
생각과 생각으로 지어진 업으로 생성되나니
생각은 곧 의업(意業)이며
지어지는 업은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이라고 한다.
『구사론』 「분별업품」

『구사론』은 인간의 삼업을 매우 정교하고도 치밀하게 설한다. 불교의 경전과 논서들은 분명한 입장과 성격을 갖고 있다. 그것은 지식과 사상 이전의 문제, 문화 이전의 문제로서 ‘인간은 어떻게 이 고뇌와 윤회의 굴레에서 해탈할 수 있는가’라고 묻고 그 길을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선의 분상에서 말하는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냉엄한 화두이다. 불교경전과 논서의 가르침은 업과 윤회, 고뇌와 해탈, 자비와 지혜의 실천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들, ‘생사일대사’의 화두를 방대한 규모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깨달음과 견성을 위해 수행하고 연구하지만 수면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한 그 경전과 논서의 가르침은 다만 지식과 사상의 울타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사론』 「수면품」이 설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수면(睡眠)상태에 있다. 수면이란 업의 원인이 되는 미혹과 번뇌의 상태, 즉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상태이다. 수면을 의미하는 범어 아누샤야(anusaya)는 초기경전 『아함경』에서도 번뇌와 동의어로 사용되는 술어이다. 더 정확히는 아직 행위로 나타나지 않고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악의 원인이 되는 심리적 성격과 그 경향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잘 닦아서
부처님과 같은 위의를 얻고서는
선법(善法)을 깊이 닦아서 행하는 바가 날로 수승해지며
대승의 가르침을 배워 보살도의 실천자가 되어
몸과 마음에 방일함이 없나니
이와 같은 법을 행한다면 바로 이름하여
보살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유마경』 「보살행품」

깊이의 차원을 상실한 불교는 현대인들에게 인생과 세계에 대한 어떤 해답도 줄 수 없다. 즉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어떠한 방향이나 해답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량복제의 시대에 복제품으로 살아가면서 유산계급의 자녀들이 나와서 몸을 흔들어대며 괴성을 질러대는 TV만을 맥없이 바라보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잃어버림’이란 망각, 상실, 붕괴를 말한다. 이 ‘깊은 차원을 잃어버린’ 결과는 매우 신속하며 광범위한 차원에서 도미노현상처럼 일어나 승가를 부실하게 만들어 버린다. 깊이의 차원을 상실한 불교는 실천을 전제로 한 프로그램 목록과 구호를 앞세우지만 대중들에게는 어떠한 신뢰도 받지 못하며 언제나 자금의 부족을 느끼는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있을 뿐이다.

몸을 가벼이 움직이지 않으면 산란한 마음을 다스려 선정(禪定)을 이루고 말이 적으면 미혹을 돌이켜보아 지혜를 이룬다. 실상(實相)은 언어를 떠난 것이며 진리는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입은 모든 화근의 문이니 반드시 엄하게 지키고 몸은 모든 재앙의 근본이니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자주 나는 새는 그물에 걸리기 쉽고 가벼이 날뛰는 짐승은 화살을 맞을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설산에서 6년 동안 앉아 움직이지 않으셨고 달마는 소림굴에서 9년 동안을 무언으로 침묵하셨다. 후세에 참선하는 사람들은 어찌 이 일을 본받지 않는가?
야운, 『자경문』


고려 야운 스님의 『자경문』은 불교수행자가 처음 출가하여 익히는 『초발심자경문』에 속한 교과 중의 하나이다. 『자경문』은 그 이름처럼 ‘스스로를 일깨우는 글’이다. 옛 스님들의 생애를 반추해보면 생애 내내 고행과 절제, 탐구와 자비로 이어지는 수도생활에서 혹시 느슨해지는 자신을 추스려 일으켜세우기 위한 여러 형태의 『자경문』을 많이 지으시고 또 읽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경문』은 현실과 고투하면서 수행의 끈을 놓지 않은 옛 스님들의 정신세계를 온전히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불교가 오랜 세월 탐구하고 쌓아온 업과 해탈의 가르침, 깨달음이 숨쉬고 있는 것이다. ‘호모파베르(물건을 만드는 동물)’라는 인간상에만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보통 불교가 설하는 수도정신을 어딘지 무섭거나, 살아있는 내내 번뇌와 사멸의 공포를 짊어지고 걸어가야 할 인간의 어두운 숙명을 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는 장의사의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치밀하고도 깊이 있는 안목으로 인간이 덧없는 애증과 탐욕으로 삶을 허비하는 환상을 일깨우고 우리의 정신적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칙을 설하는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진정 ‘스스로를 일깨우는 자경문’을 쓰고 거울로 삼을 정도로 진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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