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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해탈(解脫), 자유인이 되는 길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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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340회 작성일 09-11-2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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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解脫), 자유인이 되는 길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의 다양한 수행 체계에서 가장 일차적인 목표는 번뇌와 악업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解脫)을 증득하는 것이다. 불교의 근본 문제로서 해탈이라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해탈이라는 말을 너무 안이하고 추상적이며 신비한 어감을 갖는 불교 용어로만 생각해 왔으며 그 결과 해탈은 현실의 초월이나 도피를 의미하는 사어(死語)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해탈은 그렇게 신비적이거나 집중적인 수행을 통해서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만 가지 멍에에 묶여있는 현대인이야말로 해탈이 필요한 존재들인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의 마음상태, 욕구에 대해 사색하고 탐진치로 오염되어 있는 불순한 에너지와 거품을 걷어내면 해탈은 그렇게 추상적이거나 신비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해탈을 의미하는 범어 모크샤(moksa), 비모크샤(vimoksa), 비무크타(vimukta), 비무크티(vimukti)라는 단어들은 모두 ‘풀다’, ‘해방되다’, ‘자유롭다’를 의미하는 범어 동사의 어근 무츄(√muc)라는 동사의 어근에서 파생된 용어들이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해탈(解脫)이라는 한역어(漢譯語) 역시 원래는 ‘형틀을 풀고 석방하는 것’, ‘감옥에서 석방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중국고전 『사기(史記)』의 용어였다. 삶에 관한 불교의 지혜를 가장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해탈과 열반은 같은 본질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 동체이명(同體異名)이다. 아무리 드높고 정교한 정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기본적인 학습은 위에서 인용된 경전의 말씀처럼 눈, 귀, 코, 혀, 신체적 지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학습의 결과가 생각으로 정리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이 어떤 방향을 갖게 되면 생각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해탈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에는 자신의 사념으로 만들어 놓은 번뇌와 악업에 찬 환경을 초월하여 더 높은 차원의 지혜로 이동하려는 의지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익경(思益經)』에서는 “눈이 바로 해탈의 문이며 귀, 코, 혀, 몸, 뜻 또한 해탈의 문이다(眼是解脫門 耳鼻舌身意是解脫門).”라고 한다. 불교는 자유와 평화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해탈은 자유이며 열반은 평화이다.

현대인은 누구나 수만 가지 굴레에서 해탈을 원한다. 그러나 불건강한 탐욕과 분노, 필요 이상의 욕망을 해결하면 인생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환상을 놓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해탈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 현대인의 아뢰야식에 축적되어 있는 삶에 관한 잘못된 정보들은 결국 막대한 심리적, 물질적 자원을 헛되게 소비하고도 어떠한 해결의 길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래서 물질적 욕망과 갈망의 끝에서 삶에 관한 아무런 길도 발견하지 못하고 절망한 서구인들은 해탈의 가르침인 불교의 가르침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고도산업사회의 낭비와 과잉사치, 무분별에 대한 혐오와 인간의 야만성에 절망한 나머지 불교적 해탈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해탈이란 선승 임제가 장중한 어조로 선언했듯이 “물혹(物惑)과 인혹(人惑)의 속임수를 넘어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자신의 인생을 재고용품으로 바겐세일하지 않는 진정한 인간의 삶이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탐욕을 여의는 것을 마음의 해탈(心解脫)이라고 한다. 무명을 여의는 것을 지혜의 해탈(慧解脫)이라고 한다. 만약 비구가 탐욕을 초월하여 마음의 해탈을 스스로 체득하고 증명하며 무명을 초월한 지혜의 해탈을 체득하면 바로 이름하여 애욕의 묶임과 번뇌의 매듭을 끊은 것이라고 하나니 마침내 고통의 끝을 볼 것이다.
『잡아함경(雜阿含經)』 26:72

초기의 경전에서는 두 가지의 해탈에 대해서 자주 설하고 있다. 즉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의 해탈(慧解脫)이다. 바로 탐욕에서의 해탈은 마음의 해탈이며 무지에서의 해탈은 지혜의 해탈이다. 이처럼 해탈을 두 가지로 구분한 까닭은 인간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은 근본적으로 탐욕과 무지이기 때문이다. 탐욕과 무지를 극복하는 정교한 인간론으로서 초기불교의 교리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나날의 일상 속에서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거듭할 수 만 있다면 고여서 썩고 있는 우리의 심신을 정화하고 바로 해탈의 지혜에서 삶의 자유와 삶의 힘이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과잉소비와 집단이기주의에 사로잡혀서 아수라장이 된 우리 사회는 다른 무엇보다도 선종십우도의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는 여행 끝에 마침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듯이 갈등을 풀어갈 수 있는 마음의 해탈, 지혜의 해탈을 필요로 한다.

우리 나라 사찰의 입구에는 해탈문이 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이 설해지고 수행하는 도량인 절은 바로 해탈의 법계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해탈의 법계로 통하는 해탈문이 과연 열려있는가.”라는 것이다. 고해의 중생들에게 열린 불교가 아니라면 그 해탈문은 상징적인 건축물에 불과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해탈하면 고고하고 청수한 신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선과 악, 불교와 비불교, 삶과 죽음도 구별하지 못하는 해탈은 오히려 끝없는 방종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대집경』 권13 「불가설보살품」은 “해탈의 구덩이에 빠지면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도움이 되지 않는다(墮解脫坑 不能自利及他利).”라는 경고를 발하고 있다. 해탈은 사회화(社會化)되어야 한다. 불교적 해탈의 사회화라는 명제를 깊이 생각한 불교가 바로 대승불교이다. 현대의 승가와 불교운동가들은 바로 이 불교적 해탈의 사회화라는 과제의 연속성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서재나 강의실에서 고담준론으로 해탈을 논하는 지식인들보다도 오늘도 남의 눈물을 닦아주는 보살행을 쉬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불교적 해탈의 사회화를 실천하고 있는 도인들이며 보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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