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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신앙 (信仰)에 관한 부처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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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118회 작성일 09-11-2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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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信仰)에 관한 부처님 가르침

모든 종교는 믿음을 근본으로 하며 절에 다니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신도(信徒)라고 한다. 신도들은 “부처님을 믿는다”. “불법승 삼보를 믿는다”등등 많은 불교적 신앙의 대상을 믿는다고 말한다.

믿는 마음은 희구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신도들은 모든 중생들에게 복을 주시고 소원을 들어주시는 대은행업자(大銀行業者)와도 같은 부처님, 만능 해결사와도 같으신 부처님과 그 중개자로서 스님을 따르지만 정작 부처님과 스님들의 존재 이유이자 가르침인 법(法)에 대한 믿음과 법을 학습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이것이 다시 숙고해야 할 우리의 불교신앙인 것이다.

깊은 믿음은 가히 무너뜨릴 수 없으니 일체제불을 공경공양하며
제불과 정법(正法), 성스러운 승가를 믿고 공경하는 까닭에 보리심을 발한다.

제불과 정법을 깊이 믿고 또한 보살이 행한 바 도를 믿어서 바른 믿음으로써 부처님의 보리를 향하게 하여 보살이 초발심하는 원인이 된다.
믿음(信)은 불도의 근본이며 모든 공덕의 어머니이다.
일체의 선법(善法)을 증장하고 일체의 의혹을 극복하여 위없는 진리를 개발하고 시현한다.

청정한 믿음은 묵은 때를 벗게 하고 마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여 교만을 제멸하는 공경의 근본이다.

『화엄경』 권6 「현수보살품」



『대지도론』은 설한다. “믿음은 손과 같다. 어떤 사람에게 손이 있다면 보배의 산에 들어가 자재하게 보물을 취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믿음이 있다면 이와 같이 불법의 보산(寶山)에 들어와 자재롭게 취할 수 있거니와 믿음이 없다면 손이 없는 것과 같아서 손이 없이 보산에 들어가더라도 보물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즉 자신의 밭을 갈지 않으면서 항상 먹을 것을 구걸하는 걸인과 같은 믿음을 갖지말고 자신의 손으로 믿음의 밭을 가꾸라는 이야기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불교는 신앙이라는 말보다는 신심(信心), 신해(信解)라는 표현을 더욱 자주 쓴다. 즉 불교도의 믿음은 어떤 절대화된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보다도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에 대한 믿음, 부처님의 중생구원력에 대한 믿음, 인간은 바른 행위에 의해서만이 고(苦)에서 해탈한다는 믿음, 윤회와 업에 관한 윤리적 행위에 대한 믿음이다. 불자는 이 믿음에서 인간과 세계,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와 용기를 얻고 살아가는 것이다.


신(信)이란 무엇인가?. 진실[實]·덕성[德]·평화[深忍]·희망[欲]이며 마음의 청정을 본성으로 삼아 불신(不信)을 대처하는 것이며 선(善)의 실천을 업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신(信)에는 진실이 있으니 모든 진리 가운데 깊은 믿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 신(信)에는 공덕이 있으니 삼보의 청정한 덕 가운데에서 깊은 믿음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신(信)에는 능력이 있으니 일체세간, 출세간의 선(善)에 깊은 믿음을 내는 능력으로써 능히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희망을 일으키는 까닭에 그 마음의 불신(不信)을 이기게 된다.

출세간의 선을 닦고 증득하는 것을 사랑하는 까닭에 신앙을 거룩한 진리라고 하며 믿음의 뿌리라고 한다.

『성유식론(成唯識論)』



불교는 오염되어 있는 자아의 정화와 개발을 설한다. 그리고 소란스러운 외부에서 진실을 찾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진정한 평화를 배우고 행동하라고 가르친다. 이와 같은 가르침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의혹을 이긴 믿음이다. 의혹이란 진실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불확실한 정보에 의존하고 있을 때 생겨나는 갈등이다. 이와 같은 갈등과 의혹에 시달리고 있는 마음으로 행동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혼란과 후회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갖고 마음의 평화와 진실을 먼저 응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대의 현실이 비록 이와 같은 응시를 견디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통찰을 믿고 따라 배운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우리에게는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이라는 최상의 선물, 인생에 관한 가장 정확한 정보가 있지 아니한가?

사람은 어떻게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습니까? 어떻게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서 완전한 청정의 경지[解脫]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신앙으로써 거센 흐름을 건너고 정진으로써 바다를 건넌다.
근면으로써 고통을 초월하고, 지혜로써 완전한 청정의 경지에 도달한다.

『숫타니파타(suttnipata)』 게송 183, 184



불교의 신앙은 인간을 타율적으로 심판하는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다. 불교도의 신앙은 초기경전 『숫타니파타』가 설하는 바와 같이 지혜와 자비의 길을 열어보이신 성스러운 부처님께 귀의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귀의하며, 그 가르침을 수행하는 성스러운 승가에 귀의하는 기본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불교를 수행하며 깨달음의 길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적어도 불교도에 있어 종교의 의미는 타율적인 심판을 내리는 절대자에 대한 피조물로서의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주목하고 삶의 여러 갈등과 문제들을 해결하는 고차적인 신앙과 수행의 체계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청정한 생각과 행위가 그대로 견고한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 문이라고 설한다.

해탈에 이른 보살에게는 네 가지 법이 있으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 보살에게는 불신심(不信心)이 없으며
둘째 보살에게는 간탐(懈 貪)이 없으며
셋째 보살에게는 양설(兩舌)과 질투가 없으며
넷째 보살에게는 해태심(懈怠心)이 없다.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권3



신청청(信淸淨)은 곧 반야이다.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설하는 『소품반야경』 권5에는 「마사품(魔事品)」이라는 품이 수록되어 있다. 「마사품」에서는 반야를 구하는 보살을 방해하는 악마의 이야기를 자주 설하고 있다. 악마는 온갖 수단으로 보살의 수행을 방해한다.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권57에서는 심지어 악마가 부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 보살의 신앙을 시험한다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피마파순화작불상(彼魔波旬化作佛像)… …”의 기사가 바로 그 이야기이다. 악마가 부처님의 모습을 빌려 보살을 유혹한다는 『방광반야경』의 기사는 형상만의 붓다 숭배에 관한 비판이며 환각(幻覺)의 유혹, 자기 만족의 위험을 항상 안고 있는 대승의 모순을 경계하는 의미이지만 보살이 바른 신앙과 반야를 얻기까지는 바로 자아라는 악마와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긴장감 있게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이하고 부주의한 마음으로 경전을 읽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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