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 (1889 ~ 1977). 영국출신의 20세기 최고의 코미디 배우,감독,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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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inceton 댓글 0건 조회 1,685회 작성일 10-08-22 23:25본문
사람들은 채플린이 분장을 하지 않았을 때는 상당히 젊어 보인다는것에 놀랐다.
그러나 그의 젊음은 콧수염과 지팡이에 묻혀버린다.
'코미디를 하기엔 너무 잘생겼다.'는 세간의 평가를 스스로 극복한 것이다.
채플린과 아인슈타인 (1931년 '시티라이트'시사회에서 아인슈타인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채플린은 위대한 예술가였지만, 4번의 결혼과 3번의 이혼. 그외의 스캔들로도 자주 화제가 되었다.
그의 부인들은 모두 어렸고, 뛰어난 미인들 뿐이었다.
첫번째 부인
밀드레드 해리스 (1901 ~ 1944)
찰리 채플린의 첫 부인은 12세 연하였던 만16세의 '아역배우' 밀드레드 해리스였다.
둘은 단지 관계를 가졌을뿐이지만, 밀드레드가 임신을 하자
1919년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 . 밀드레드의 거짓 임신사실이 드러나면서 둘의 사이엔 금이 가고, 이후 태어난 아들마저 3일만에 사망하자 이혼으로 치닫게 된다.
채플린은 '정신적 상처'를 주장하는 밀드레드에게 거액의 위자료를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밀드레드의 변호사는 영화<키드>의 필름까지 압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녀는 이후 3류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다가 1944년 43세에 알콜중독으로 사망했다.
1992년작 전기영화 <채플린> 에서 밀드레드 역을 맡은 '밀라 요보비치' . .
두번째 부인
리타 그레이 (1908 ~ 1995)
리타와 찰리가 처음 인연을 맺은것은 1920년 영화 <키드>에서 12살의 리타가
채플린을 유혹하는 천사역으로 출연했을때부터다.
1924년 채플린은 <황금광시대>의 제작과 함께 밀드레드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결혼에 착수한다.
리타는 찰리보다 19세 연하였고 18살에 결혼해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채플린은 일을 할때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일을 안할때는 여러모로 상처받기 일쑤였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서 였을까 . .
1964년에 출간된 채플린의 자서전은 무려 500페이지에 달했지만 리타에 대한 언급은
겨우 5줄 뿐이다. 구체적인 이혼사유도 알길이 없고 둘의 결혼은 베일에 쌓여있다 .
채플린은 이혼과 함께 리타에게 기록적인 위자료를 지불하게 된다.
리타의 변호사들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의 어느 남자라도 충분히 파멸시켰을 이 소송으로
채플린은 파멸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채플린에 대한 대중의 사랑이 그토록 깊은 줄은
몰랐다.
단지 채플린 영화에 대한 일부 여성단체의 보이콧이 몇몇 도시에서는 성공을 거뒀을뿐이다.
그는 이혼후 리타를 매우 싫어했지만 리타는 찰리를 죽을때까지 그리워했다고 한다.
세번째 부인
폴레트 고다드 (1910 ~ 1990)
헐리우드의 스타였던 폴레트 고다드는 1932년 21살 연상인 채플린과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당시 그녀는 22살로 찰리의 부인치곤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그녀는 <모던타임즈>,<독재자> 에 출연했고, 채플린의 부인중 찰리와 동등한 위치에서
작품을 논의할수있었던 유일한 여인이었다.
1939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디션을 보기도 했지만
채플린과 혼전동거를 한다는 (둘의 결혼사실은 이혼후에 밝혀졌다.) 이유로 여성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그녀는 이혼후 돈을 뜯어가지 않은 유일한 여인이었고 찰리와 계속 친분을 유지했다.
1966년 연기생활 은퇴후에는 스위스에 거주하는 채플린부부와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
중년의 채플린
찰리는 1941년 '조앤 베리'라는 여배우와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조앤이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면서 둘의 관계는 끊어진다. 이후 딸을 출산한 조앤은 찰리의 아이라고 주장하여
재판으로까지 이어진다. 혈액검사결과 사실이 아니었지만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고,
찰리는 '캐롤 앤'을 딸도 아니면서 21살이 될때까지 부양해야 했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스캔들이었다.
조앤 베리는 일생의 대부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고, 생사는 지금도 불명이다.
네번째 부인
우나 오닐 (1925 ~ 1991)
채플린의 4번째 부인이엇던 우나 오닐은 1943년 결혼 당시 18살이었고
찰리는 54세로 무려 36살의 차이를 극복한다.
우나의 아버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의 극작가였던 유진 오닐은
결혼에 반대했으나 (사위가 자신보다 1살어리니 그럴만도 했다;) 우나는 결국 아버지와
의절하고 만다.
우나는 8명의 아이를 낳았다. 매카시즘이 미국을 휩쓸던 1952년 . .
찰리가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스위스로 망명하자 그녀도 미국시민권을 포기했다.
우나는 채플린보다 14년을 더 살았고 1991년 자신이 죽을때까지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다.
채플린의 정력은 헐리우드에서도 정평이 나있었다.
막내 아들은 그가 75세때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성적 컴플렉스 때문인지 늘 어린 여자와 결혼했고,
그로인해 '병아리를 잡아먹는 독수리'라는 비난도 받았다.
심지어 소설 '로리타'의 험버트 교수가 채플린을 모델로 했다는 설까지 존재한다.
(별로 신빙성은 없어보이지만; . .)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우나와의 결혼생활을 이렇게 표현했다.
' 완벽한 사랑은 너무나 아름다운 좌절감을 안겨준다.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기에 . . . . .'
그러나 그의 젊음은 콧수염과 지팡이에 묻혀버린다.
'코미디를 하기엔 너무 잘생겼다.'는 세간의 평가를 스스로 극복한 것이다.
채플린과 아인슈타인 (1931년 '시티라이트'시사회에서 아인슈타인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채플린은 위대한 예술가였지만, 4번의 결혼과 3번의 이혼. 그외의 스캔들로도 자주 화제가 되었다.
그의 부인들은 모두 어렸고, 뛰어난 미인들 뿐이었다.
첫번째 부인
밀드레드 해리스 (1901 ~ 1944)
찰리 채플린의 첫 부인은 12세 연하였던 만16세의 '아역배우' 밀드레드 해리스였다.
둘은 단지 관계를 가졌을뿐이지만, 밀드레드가 임신을 하자
1919년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 . 밀드레드의 거짓 임신사실이 드러나면서 둘의 사이엔 금이 가고, 이후 태어난 아들마저 3일만에 사망하자 이혼으로 치닫게 된다.
채플린은 '정신적 상처'를 주장하는 밀드레드에게 거액의 위자료를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밀드레드의 변호사는 영화<키드>의 필름까지 압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녀는 이후 3류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다가 1944년 43세에 알콜중독으로 사망했다.
1992년작 전기영화 <채플린> 에서 밀드레드 역을 맡은 '밀라 요보비치' . .
두번째 부인
리타 그레이 (1908 ~ 1995)
리타와 찰리가 처음 인연을 맺은것은 1920년 영화 <키드>에서 12살의 리타가
채플린을 유혹하는 천사역으로 출연했을때부터다.
1924년 채플린은 <황금광시대>의 제작과 함께 밀드레드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결혼에 착수한다.
리타는 찰리보다 19세 연하였고 18살에 결혼해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채플린은 일을 할때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일을 안할때는 여러모로 상처받기 일쑤였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서 였을까 . .
1964년에 출간된 채플린의 자서전은 무려 500페이지에 달했지만 리타에 대한 언급은
겨우 5줄 뿐이다. 구체적인 이혼사유도 알길이 없고 둘의 결혼은 베일에 쌓여있다 .
채플린은 이혼과 함께 리타에게 기록적인 위자료를 지불하게 된다.
리타의 변호사들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의 어느 남자라도 충분히 파멸시켰을 이 소송으로
채플린은 파멸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채플린에 대한 대중의 사랑이 그토록 깊은 줄은
몰랐다.
단지 채플린 영화에 대한 일부 여성단체의 보이콧이 몇몇 도시에서는 성공을 거뒀을뿐이다.
그는 이혼후 리타를 매우 싫어했지만 리타는 찰리를 죽을때까지 그리워했다고 한다.
세번째 부인
폴레트 고다드 (1910 ~ 1990)
헐리우드의 스타였던 폴레트 고다드는 1932년 21살 연상인 채플린과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당시 그녀는 22살로 찰리의 부인치곤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그녀는 <모던타임즈>,<독재자> 에 출연했고, 채플린의 부인중 찰리와 동등한 위치에서
작품을 논의할수있었던 유일한 여인이었다.
1939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디션을 보기도 했지만
채플린과 혼전동거를 한다는 (둘의 결혼사실은 이혼후에 밝혀졌다.) 이유로 여성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그녀는 이혼후 돈을 뜯어가지 않은 유일한 여인이었고 찰리와 계속 친분을 유지했다.
1966년 연기생활 은퇴후에는 스위스에 거주하는 채플린부부와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
중년의 채플린
찰리는 1941년 '조앤 베리'라는 여배우와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조앤이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면서 둘의 관계는 끊어진다. 이후 딸을 출산한 조앤은 찰리의 아이라고 주장하여
재판으로까지 이어진다. 혈액검사결과 사실이 아니었지만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고,
찰리는 '캐롤 앤'을 딸도 아니면서 21살이 될때까지 부양해야 했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스캔들이었다.
조앤 베리는 일생의 대부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고, 생사는 지금도 불명이다.
네번째 부인
우나 오닐 (1925 ~ 1991)
채플린의 4번째 부인이엇던 우나 오닐은 1943년 결혼 당시 18살이었고
찰리는 54세로 무려 36살의 차이를 극복한다.
우나의 아버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의 극작가였던 유진 오닐은
결혼에 반대했으나 (사위가 자신보다 1살어리니 그럴만도 했다;) 우나는 결국 아버지와
의절하고 만다.
우나는 8명의 아이를 낳았다. 매카시즘이 미국을 휩쓸던 1952년 . .
찰리가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스위스로 망명하자 그녀도 미국시민권을 포기했다.
우나는 채플린보다 14년을 더 살았고 1991년 자신이 죽을때까지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다.
채플린의 정력은 헐리우드에서도 정평이 나있었다.
막내 아들은 그가 75세때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성적 컴플렉스 때문인지 늘 어린 여자와 결혼했고,
그로인해 '병아리를 잡아먹는 독수리'라는 비난도 받았다.
심지어 소설 '로리타'의 험버트 교수가 채플린을 모델로 했다는 설까지 존재한다.
(별로 신빙성은 없어보이지만; . .)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우나와의 결혼생활을 이렇게 표현했다.
' 완벽한 사랑은 너무나 아름다운 좌절감을 안겨준다.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기에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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