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터브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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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inceton 댓글 0건 조회 1,365회 작성일 10-08-21 22:43본문
[역사 속 여성이야기]
분연히 일어나 평등을 외친 흑진주
흑인해방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용기와 도전의 삶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진리다. 그러나 이 진리를 법적으로 보장받는 데에는 엄청난 희생과 기나긴 투쟁의 역사가 필요했다. 지금은 자유와 민주주의, 평등의 나라라고 불리는 미국에서 불과 150년 전에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인간 불평등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와 자신의 농장에서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하며 일을 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백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채찍 아래 두려움에 떨면서 자식으로까지 대물림 되는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던 흑인들이 있었다. 그런 이유 없는 불평등의 삶을 떨치고 일어서 흑인의 해방을 외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남부 농장의 한 흑인 노예 해리엇 터브먼이다. 노예로 시작한 삶
해리엇 터브만(1820-1913)은 미국 메릴랜드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아프리카에서 사냥(?)당해 강제로 미국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해리엇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를 강탈당한 채 영문도 모르는 노예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짐승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그녀는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어렴풋이 자유에 대한 갈망과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 그녀는 주변의 많은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북쪽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인 15세의 어느날, 해리엇은 도망치는 노예를 돕기 위해 주인에게 반항하다가 커다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진다. 해리엇은 이때의 폭력으로 이마의 뼈가 부셔져 미간이 움푹 패인 흉터를 평생 안고 살아야만 했다. 더불어 수면 발작이라는 치명적인 병도 함께 얻었다.
자유를 찾아 북쪽으로
당시 미국 백인사회는 흑인 노예의 착취를 바탕으로 거대한 목화 농장을 경영하는 남부와 산업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임금 노동자들의 노동력으로 지탱되던 북부의 공장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남부의 백인들은 자신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 집약적이고 힘든 목화 농장 일을 공짜로 해주는 흑인 노예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북부의 백인 공장주들은 적은 임금으로 열악한 공장노동을 수행해 줄 인력이 시급했다. 북부의 공장주들은 당장 급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남부의 흑인 노예들을 향해 자유라는 당근을 제시했다.
북부나 남부 모두 흑인의 삶이나 자유, 인권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들의 경제적인 부를 위해서 흑인들을 이리 저리 당기는 것이었지만, 흑인의 입장에서는 적으나마 임금을 보장해주고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삶을 인정하는 북부는 그야말로 낙원처럼 보였다.
그 즈음 북부의 백인 일부와 노예신분에서 해방된 흑인들은 남부의 흑인노예들을 북부로 탈출시키는 일을 시작한다. 그 일은 지하철로라는 은어로 불리고 있었다. 실제 철도나 기차는 없었지만 북부에서 내려온 인도자가 남부의 흑인들을 이끌어 북부로 탈출시키는 일을 이렇게 불렀다. 남부의 고통스러운 노예 생활 속에서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살아가던 29세의 해리엇 터브만도 이 지하철로의 인도자의 손에 이끌려 북부로 탈출한다.
지하철로의 가장 위대한 차장
지하철로 조직은 탈출경로를 철로, 도망 흑인노예를 숨겨주는 조력자의 집을 역, 흑인노예들을 이끌어 북부로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인도자를 차장이라고 불렀다. 1850년대 북부의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묘한 흑인 노동자 여인이 하나 존재하였다. 주로 잡역부나 청소부 일을 하는 이 여인은 여름과 겨울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쥐꼬리 만한 임금을 차곡차곡 모으는 성실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봄과 가을이 되면 그녀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다시 나타날 때는 그 동안 모은 돈은 모두 탕진한 상태였다. 그녀는 바로 해리엇 터브먼이었다.
해리엇은 1850년부터 1860년까지 무려 19차례나 지하철로의 차장으로 남부로 숨어 들어가 300명이 넘는 흑인들은 북부로 탈출시켰다. 그녀는 주로 할머니로 변장하여 자유자재로 흑인들이 노동하는 농장으로 숨어 들었고 심지어 고향의 농장에까지 숨어 들어 가족들을 탈출 시키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해리엇은 300여명이나 되는 흑인들을 인솔하여 탈출시키면서도 단 한 명의 낙오자도 부상자도 만들지 않았다.
그녀는 탈출의 여정에서는 엄격한 지휘자였다. 혹여 마음이 약해져 포기하려는 탈출자를 때로는 격려하고 때로는 꾸짖으며 무사히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해리엇은 자신만의 자유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 많은 흑인노예들이 자유를 누려야 한鳴?생각했다. 해리엇은 백인 농장주들에게는 극악한 적이었고 흑인 노예들에게는 모세와 같은 존재였다.
남북 전쟁과 그 이후
1861년 마침내 북부와 남부 사이에는 전쟁이 터졌다. 백인들에게는 어느 지역이 경제적 주도권을 가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전쟁이었지만 흑인들에게 이 전쟁은 자신들의 생존과 인권, 운명을 결정하는 목숨을 건 중대한 전쟁이었다. 해리엇도 북부의 편을 들어 남북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북부 스파이로 잠입해 남부의 병력과 군사 기지 등 중요한 정보를 빼돌려 북부군대의 승리에 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한때 그녀는 북부의 군인들에게 ‘터브먼 장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4년에 걸친 전쟁은 1865년 해리엇과 많은 흑인들의 바람대로 북부의 승리로 끝이 난다. 흑인들은 법적으로나마 자유와 평등을 보장 받고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해리엇은 남북전쟁에서의 혁혁한 공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1908년 88세가 되는 나이에 그 동안 노동과 자서전을 써 번 돈을 모아 ‘해리엇 터브먼의 집’을 완성한다. 이 집은 해방된 흑인들의 안정된 정착과 경제적 자립을 도와주는 집이다.
17세기,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백인들에게 붙잡혀 머나먼 아메리카 땅으로 실려와 노예의 삶을 시작했던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우여곡절 끝에 미국 땅에서 새로운 미국 흑인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그 역사는 많은 흑인들의 피와 땀, 생명을 대가로 쌓아올려졌다. 자유에 대한 갈망과 평등의 신념으로 흑인 해방을 위해 마지막까지 혼신의 노력을 다한 해리엇 터브먼. 그녀의 치열한 삶도 미국 흑인해방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분연히 일어나 평등을 외친 흑진주
흑인해방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용기와 도전의 삶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진리다. 그러나 이 진리를 법적으로 보장받는 데에는 엄청난 희생과 기나긴 투쟁의 역사가 필요했다. 지금은 자유와 민주주의, 평등의 나라라고 불리는 미국에서 불과 150년 전에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인간 불평등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잡아와 자신의 농장에서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하며 일을 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백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채찍 아래 두려움에 떨면서 자식으로까지 대물림 되는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던 흑인들이 있었다. 그런 이유 없는 불평등의 삶을 떨치고 일어서 흑인의 해방을 외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남부 농장의 한 흑인 노예 해리엇 터브먼이다. 노예로 시작한 삶
해리엇 터브만(1820-1913)은 미국 메릴랜드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아프리카에서 사냥(?)당해 강제로 미국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해리엇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를 강탈당한 채 영문도 모르는 노예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짐승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그녀는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어렴풋이 자유에 대한 갈망과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 그녀는 주변의 많은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북쪽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인 15세의 어느날, 해리엇은 도망치는 노예를 돕기 위해 주인에게 반항하다가 커다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진다. 해리엇은 이때의 폭력으로 이마의 뼈가 부셔져 미간이 움푹 패인 흉터를 평생 안고 살아야만 했다. 더불어 수면 발작이라는 치명적인 병도 함께 얻었다.
자유를 찾아 북쪽으로
당시 미국 백인사회는 흑인 노예의 착취를 바탕으로 거대한 목화 농장을 경영하는 남부와 산업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임금 노동자들의 노동력으로 지탱되던 북부의 공장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남부의 백인들은 자신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 집약적이고 힘든 목화 농장 일을 공짜로 해주는 흑인 노예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북부의 백인 공장주들은 적은 임금으로 열악한 공장노동을 수행해 줄 인력이 시급했다. 북부의 공장주들은 당장 급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남부의 흑인 노예들을 향해 자유라는 당근을 제시했다.
북부나 남부 모두 흑인의 삶이나 자유, 인권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들의 경제적인 부를 위해서 흑인들을 이리 저리 당기는 것이었지만, 흑인의 입장에서는 적으나마 임금을 보장해주고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삶을 인정하는 북부는 그야말로 낙원처럼 보였다.
그 즈음 북부의 백인 일부와 노예신분에서 해방된 흑인들은 남부의 흑인노예들을 북부로 탈출시키는 일을 시작한다. 그 일은 지하철로라는 은어로 불리고 있었다. 실제 철도나 기차는 없었지만 북부에서 내려온 인도자가 남부의 흑인들을 이끌어 북부로 탈출시키는 일을 이렇게 불렀다. 남부의 고통스러운 노예 생활 속에서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살아가던 29세의 해리엇 터브만도 이 지하철로의 인도자의 손에 이끌려 북부로 탈출한다.
지하철로의 가장 위대한 차장
지하철로 조직은 탈출경로를 철로, 도망 흑인노예를 숨겨주는 조력자의 집을 역, 흑인노예들을 이끌어 북부로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인도자를 차장이라고 불렀다. 1850년대 북부의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묘한 흑인 노동자 여인이 하나 존재하였다. 주로 잡역부나 청소부 일을 하는 이 여인은 여름과 겨울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쥐꼬리 만한 임금을 차곡차곡 모으는 성실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봄과 가을이 되면 그녀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다시 나타날 때는 그 동안 모은 돈은 모두 탕진한 상태였다. 그녀는 바로 해리엇 터브먼이었다.
해리엇은 1850년부터 1860년까지 무려 19차례나 지하철로의 차장으로 남부로 숨어 들어가 300명이 넘는 흑인들은 북부로 탈출시켰다. 그녀는 주로 할머니로 변장하여 자유자재로 흑인들이 노동하는 농장으로 숨어 들었고 심지어 고향의 농장에까지 숨어 들어 가족들을 탈출 시키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해리엇은 300여명이나 되는 흑인들을 인솔하여 탈출시키면서도 단 한 명의 낙오자도 부상자도 만들지 않았다.
그녀는 탈출의 여정에서는 엄격한 지휘자였다. 혹여 마음이 약해져 포기하려는 탈출자를 때로는 격려하고 때로는 꾸짖으며 무사히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해리엇은 자신만의 자유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 많은 흑인노예들이 자유를 누려야 한鳴?생각했다. 해리엇은 백인 농장주들에게는 극악한 적이었고 흑인 노예들에게는 모세와 같은 존재였다.
남북 전쟁과 그 이후
1861년 마침내 북부와 남부 사이에는 전쟁이 터졌다. 백인들에게는 어느 지역이 경제적 주도권을 가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전쟁이었지만 흑인들에게 이 전쟁은 자신들의 생존과 인권, 운명을 결정하는 목숨을 건 중대한 전쟁이었다. 해리엇도 북부의 편을 들어 남북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북부 스파이로 잠입해 남부의 병력과 군사 기지 등 중요한 정보를 빼돌려 북부군대의 승리에 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한때 그녀는 북부의 군인들에게 ‘터브먼 장군’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4년에 걸친 전쟁은 1865년 해리엇과 많은 흑인들의 바람대로 북부의 승리로 끝이 난다. 흑인들은 법적으로나마 자유와 평등을 보장 받고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해리엇은 남북전쟁에서의 혁혁한 공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1908년 88세가 되는 나이에 그 동안 노동과 자서전을 써 번 돈을 모아 ‘해리엇 터브먼의 집’을 완성한다. 이 집은 해방된 흑인들의 안정된 정착과 경제적 자립을 도와주는 집이다.
17세기,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백인들에게 붙잡혀 머나먼 아메리카 땅으로 실려와 노예의 삶을 시작했던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우여곡절 끝에 미국 땅에서 새로운 미국 흑인의 역사를 시작하였다. 그 역사는 많은 흑인들의 피와 땀, 생명을 대가로 쌓아올려졌다. 자유에 대한 갈망과 평등의 신념으로 흑인 해방을 위해 마지막까지 혼신의 노력을 다한 해리엇 터브먼. 그녀의 치열한 삶도 미국 흑인해방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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