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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보다 더 빛났던 사랑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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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inceton 댓글 0건 조회 1,286회 작성일 10-08-07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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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성의 도움이 없는 한 영국 국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936년 12월 11일 밤 대영제국의 왕 에드워드 8세는 BBC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자신의 사랑과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발표했다. 1930년대 아직 대영제국의 영광이 완전히 기울지 않았던 그때, 에드워드 8세는 영국 왕위를 박차고 나와 한 명의 여성을 선택했다. 그녀는 미국인으로 귀족 신분도 아니었고, 이혼 경력이 한번 있으며, 심슨이라는 남자의 아내인 윌리스 심슨, 통상 심슨 부인이라고 불리던 여인이었다.
보수적인 영국 왕실은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 여인을 왕비로 맞을 수가 없었다. 영국 의회와 국민들도 에드워드8세의 사랑을 반대하였다. 그녀가 왕의 정부로 머무는 것에는 반대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가 공식적으로 영국의 왕비가 되어 영국을 대표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에드워드 8세는 왕위에 오른 11개월 동안 지난하게도 그의 사랑을 결혼으로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허사였다. 그녀를 버리거나 왕위를 버려야 했다.
베시 윌리스 워필드 스펜서 심슨 윈저 공작부인(Wallis Warfield Spencer Simpson, Duchess of Windsor 1896~1986)이 정식 이름인 심슨부인은 미국 펜실베이니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스무살에 해군 조종사 스펜서와 결혼하였다가 10년 만에 이혼하고 이듬해 영국인 사업가 심슨과 결혼하여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였다. 이것이 심슨 부인과 당시 황태자이던 에드워드를 만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남편의 재력을 바탕으로 런던 사교계의 떠오르는 별이 되었던 심슨 부인은 어느날 파티에서 에드워드 황태자를 만난다. 푸른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은 심슨 부인은 에드워드 왕자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1931년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우정을 가장하여 만나기 시작했으나 마침내는 서로의 사랑을 속이지 못해 결혼을 결심했다. 심슨 부인의 남편은 강력한 연적인 에드워드 8세 앞에 간단히 무릎을 끓었다. 이혼을 앞둔 심슨 부인은 얼마 전 왕으로 즉위한 에드워드 8세의 아내로 영국의 왕비가 될 날을 꿈꾸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는 영국 전체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왕위를 버리고 심슨 부인만을 선택했다. 이 결혼으로 에드워드 8세는 국왕의 자리를 버렸을 뿐 아니라 본의 아닌 망명객이 되어 영국 본토로 돌아가는 것이 거부되었다. 결국 에드워드 8세는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리고 심슨부인의 이혼 문제가 모두 처리되기를 기다려 1937년 6월 프랑스의 한 교회에서 쓸쓸한 결혼식을 올린다. 이때 심슨 부인은 하얀 웨딩드레스 대신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온몸을 푸른색으로 장식했다. 에드워드 8세와의 첫 만남을 기념하고 두 사람의 사랑이 영원할 것을 맹세하는 의미에서 선택한 색이었다. 결혼식 자체는 초라하였지만 이 결혼식은 심슨 부인의 푸른 드레스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심슨 부인과 에드워드 8세의 사랑에 대해 찬반 양론이 엇갈리던 세계인들의 평가 속에서도 심슨 부인이 입은 푸른색은 유명해져서 이 색을 ‘심슨 블루’ 라고 불렀다. 심슨 블루는 귀족과 왕족에 굴하지 않은 당당한 서민을 뜻하는 색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에드워드 8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생 조지 6세로 부터 윈저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심슨 부인에게는 아무런 작위가 가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전하’라는 경칭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윈저 공작과 함께 사는 ‘평민’ 아내였을 뿐이었다.
에드워드는 이 조치에 매우 마음 아파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런 고집스러운 조치를 취한 것은 에드워드 8세의 어머니 퀸마더 메리(조지 5세의 왕비) 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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