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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 가장 불운했던 그러나 가장 훌륭했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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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inceton 댓글 0건 조회 1,625회 작성일 10-08-0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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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뉴욕타임스는 지난 천년간 가장 뛰어 났던 지도자를 선정하였다. 그 중 가장 첫 번째로 꼽힌 인물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였다. 16세기까지만 하여도 영국은 인근의 스페인과 프랑스에 눌려 유럽의 작은 섬나라였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런 영국이 유럽 제1의 국가로 도약할 수 있도록 초석을 닦은 사람이다. 20세기 초반 까지 지속되는 대영제국의 영광은 모두 이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 마련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훌륭한 여왕이었지만 그러나 개인사적으로는 가장 불운한 여인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불행은 그녀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그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사랑하는 여인 앤 볼레인에게서 아들을 얻고 싶어 본처인 스페인의 공주 캐서린과 억지로 이혼하고 앤 볼레인과 결혼한다. 그 여파로 로마의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하고 영국은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하여 국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앤 볼레인이 낳은 것은 딸 하나, 즉 엘리자베스 공주 뿐이었다. 모든 무리를 감수하고 앤 볼레인에게 왕비의 왕관을 씌워줬던 헨리 8세의 불타는 애정은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난 순간, 그대로 식어 버린다. 그는 앤 볼레인을 간통죄로 몰아 왕비가 된지 3년 만에 도끼로 목을 내려쳐 죽여 버린다. 그 와중에 그의 3살 난 딸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어머니 앤 볼레인과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함에 따라 졸지에 서출이 되어 버린다.
이 때부터 엘리자베스 공주는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면서 자라야 했다. 배다른 언니인 메리 공주와 또 다른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 왕자 사이에서 그녀는 불행하고 조심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엘리자베스는 사실 국왕의 지위와는 상당히 멀어보이는 존재였다. 남동생 에드워드 왕자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는 일생을 공주로서만 살아갈 운명인 것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헨리 8세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에드워드 6세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만다.
이때까지도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는 멀어 보였다. 헨리 8세의 첫째 부인 캐서린 소생의 메리가 있었고 그 외에도 할아버지 헨리 7세의 적손으로 인정된 많은 왕권 경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같은 서출로 공표되었던 언니 메리가 왕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에 경도되어 열렬한 구교 신봉자였던 메리의 등극은 엘리자베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아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영국 국교회의 신자가 되었던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목숨을 부지하게 위해 메리 여왕 앞에서 구교로 개종할 것을 엄숙히 다짐한다. 이 다짐으로 엘리자베스는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지만 곧 이어 런던탑에 유폐된다.
메리 여왕은 이미 국교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영국을 다시 구교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국교도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시작한다. 그녀의 통치기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 메리 여왕에게는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과격한 메리 여왕도 사랑했던 스페인 국왕 필리페 2세와의 결혼에 실패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만다. 마침내 온갖 비운과 불운을 다 짊어지고 살아 온 듯한 공주, 엘리자베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메리 여왕의 공포 정치로 숨죽이며 살아왔던 많은 국민들은 타 국가 왕족과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 영국 혈통에, 국교도인 엘리자베스의 여왕 즉위를 환영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왕위 계승을 못마땅해 하는 세력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구교 세력들로서 엘리자베스보다는 헨리 7세의 적손이면서 프랑스의 왕비였고,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 쪽에 마음이 가 있었다.
메리 스튜어트 또한 공식적으로 아무런 의사표시 없이 자신의 문장에 잉글랜드의 왕관을 그려넣었다. 이것은 즉 엘리자베스는 명분상으로는 자격없는 왕이며 사실은 자신이 잉글랜드 왕이라는 것을 공표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사건으로 크게 자존심이 상처를 입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혈통적으로 고귀하고 당당했던 메리 스튜어트에게 서출이며 자격없는 왕이라고 놀림을 받은 엘리자베스 1세는 결코 메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후 두 여인의 일생을 건 시기와 질투는 결국 엘리자베스가 메리 스튜어트를 단두대로 보냄으로써 끝이 나지만, 엘리자베스에게 있어 메리 스튜어트는 혈통상으로도, 여성으로서도 일생을 걸고 질투했던 대상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하지 않았다. 국민들과 많은 신하들이 그녀에게 결혼을 권유하였지만 번번히 이를 뿌리쳤다. 그러면서 그녀는 늘 자신은 국가와 결혼했다고 선언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분분하다.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던가, 아버지로 인해 남자를 불신하게 되었다던가, 어린 시절 계모 제인 시머의 첫 번째 남편으로부터 성적 희롱을 당해서라던가 등의 말들이 많다. 그러나 그 무엇하나 제대로 밝혀 진 것은 없다.
다만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인정하고 불같은 사랑 속에서 세 번 결혼하고 왕자를 낳은 메리 스튜어트를 진정으로 부러워하였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명의 애인을 두기는 하였으나 결코 권력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단속하였다. 혹여 그들 애인 중에서 권력욕이 지나친 사람은 어김없이 런던탑에 유폐하거나 단두대로 보냈다.
엘리자베스는 국가와 결혼했다고 스스로 선언한 것에 걸맞게 영국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th)’라는 칭호를 당대에 듣기도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당대에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물리치고 유럽의 해상권을 제패하였으며, 신대륙으로 길을 열었다.
더불어 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안정과 의회의 안정 등을 꾀하여 국내 상황을 호전시켰다. 또 이 시기에는 많은 문호들이 등장하여 영국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엘리자베스1세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 세익스피어도 이 시대 사람이다.
여인으로서 우여곡절 많고 불행한 삶이었지만 이를 불안하고 괴팍한 정치 운용으로 풀어 내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조심성으로 걸러내 국가를 가장 부강하게 만든 여왕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내면을 강철같은 냉정으로 포장하고 개인의 삶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살아간 여인이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대영제국이 있었고 더불어 유럽전체가 함께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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