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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가지가지 생각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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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ale 댓글 0건 조회 2,993회 작성일 10-10-27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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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의 연구는 20세기 물리학의 원천을 이루었다. 그의 특수 상대성 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과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은 근본적인 자연 법칙들과 공간, 질량과 에너지 개념을 이해하는 새로 운 바탕을 마련했다. 1905년에 제출된 특수 상대성 이론 [움직이는 물체들의 전기 역학에 관하여 (Electrody namics of moving bodies)]은 원자와 원자 구성 입자의 상호 관계를 세부적으로 파악하는 데 필수적인것으 로 밝혀졌다. 또 그로부터 10년 뒤 일반 상대성 이론이 현대 우주론의 가능성을 열었다. 실제로 아이작 뉴턴과 마찬가지로 그의 이론들도 기술로써 자연을 대규모로 조작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트랜지스터, 전자 현미경, 컴퓨터와 광전지 등은 아인슈타인 혁명으로 탄생한 발명과 정보 통신 분야의 막대한 결실 가운데 극히 일부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의 울름(Ulm)에서 헤르만 아인슈타인(Hermann Einstein)과 파울리네 코흐 아인슈타인(Pauline Koch Einstein)의 아들로 태어났다.그의 어머니는 피아노를 연주하였고 아인슈타인은 여섯살 때부터 바이올린 교습을 받기 시작하였다. 소년 아인슈타인은 재능을 타고났다기보다는 말수가적고 좀 별난 데가 있는 아이였다. 그의 유모는 그에게 심심한 도련님 (Pater Langweil)이라는 별명까지 붙였다. 열살이되어 들어간 레오폴트 김나지움에서는 험한 독일식 훈육을 끔찍히 싫어했고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과학을 알게된 것은 수학을 통해서였고 기술자인숙부 야코프 아인슈타인도 자극제가 되었다. 열두 살 무렵에는 혼자서 기하학을 공부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언젠가 세상의 수수께끼를 풀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릴적 꿈을 이루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그는 해냈다.
아인슈타인의 중학교 시절은 초등학교 때만큼이나 문제가 많았다. 그는 1894년에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갔는데,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그곳으로 옮겨와 다시 사업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학교를 마치기 위해 혼자 남았던 알베르트는 졸업하지 않은 채로 김나지움을 그만두고 가족을 찾아갔다. 아인슈타인은 열일곱 살에 한 차례 입학 시험에 떨어진 뒤 다음해에 스위스 연방 공과대학(Polytechnic Institute of Zurich, Switzerland)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자기가 하려는 분야가 수학이라기보다는 물리학 쪽임을 깨닫고, 헤르만 폰 헬름홀츠 (hermann Ludwig Ferdinand von Helmholtz)와 제임스 클럭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등을 공부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모범생은 못 되었다. 학교 생활이 어찌나 답답했는지 뒷날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그곳에 있는 동안에 근대의 교육 방식이 신성한 탐구욕과 연구 정신을 완전히 질식시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1900년에 졸업했다.
1902년부터는 스위스 특허 사무소(Swiss Patent Office)에서 하급 심사관으로 일했다. 모든 종류의 지식의 응용을 꼼꼼하게 살피고 확인하는 일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생각을 진전시키는 데 자극이 되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확실히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시간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계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물리학 분야에서 당대에 이루어진 발전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1905년을 아인슈타인의 '놀라운 해'라 하기도 한다. 그는 그 해에 세 개의 아주 중요한 논문을 <물리학 연보> 제17권에 발표한다. 에밀리오 세그레(Emilio Segre)는 이를 가리켜 그의 천재성이 "비길 데 없이 눈부시게 타올랐다"고 했다. 세 논문은 저마다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다.
(1) '브라운 운동'을 다룬 논문에서는 분자 운동론에 입각하여 액체 속에 떠있는 입자들의 지그재그 움직임을 측정하고 예측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로써 그때까지도 일부에서 논란이 되고 있던 분자의 존재를 가상 증명으로 입증했다. 아인슈타인의 계산은 몇 년 뒤 실험으로 확증된다.
(2) 그가 처음 양자 이론에 기여한 논문에서는 기본파 과정이 자연 상태에서 놀랍게도 수학적 평형을 이루며 작동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몇 년 앞서 수학적 평형으로 '흑체(복사 에너지를 완전하게 흡수하는 물체)복사' 문제를 해결한 바 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빛 자체는 입자들의 흐름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입자들이 플랑크 상수를 써서 계산할 수 있는 에너지를 지닌다고 가정했다(빛의 입자를 가리키는 광양자란 용어는 뒤에 만들어졌다). 가시광선의 경우 이 가정은 10년 안에 실험으로 확증된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으로 1921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3) 앞의 두 논문, 특히 두 번째 것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하지만 이 세 번째 논문,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 역학에 관하여]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이 논문에서 이른바 특수 상대성 이론이 처음 나타났다.

1949년 막스 보른(Max Born)은 이 업적에 대하여 모든 물리학자들이 공통으로 느끼고 있는 바를 다음과 같이 능숙하고 위엄있게 표현했다. "모든 과학 문헌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책 한 권을 나에게 추천하라고 한다면 나는 [물리학연보] 제17권 (네번째 시리즈-1905년도판; 원본은 지금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05년대의 [연보]를 간직하고 있는 물리학 도서실들은 많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이 가운데 제17권 만은 모두 결본이 되어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 논문을 읽으려 할 때는 주로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번역된 번역본들을 읽게 된다.)을 택할 것이다. 이 책은 아인슈타인이 쓴 세 편의 논문을 싣고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모두 오늘날 대작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물리학에 있어서 새 분야의 기원을 이루고 있다. 이 세 논문들은 페이지 순으로 볼 때 광자 이론, 브라운 운동,
그리고 상대론에 관한 것이다. ....... 설혹 그가 상대론에 관해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모든 시대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이론물리학자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물리 역학에 관계된 것이다. 그런데 그 이론에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직관에 크게 어긋나는 점이 있다. 요컨대 공간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고려할 때 빛의 속도는 광원 또는 광원 검출기에서 떨어져 있는 모든 좌표상에서 상수로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에게는 공리나 다름었었다. 다시 말해서 계산으로 얻어진 빛의 속도는 관찰자의 속
력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이 가정이 옳다면, 서로 다른 속도로 이동하는 두 관찰자는 특정 사건을 같은 시간에 경험하지 않는다. 빛의 속도가 일정할 때 시간과 공간은 한 좌표상에 존재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이 왜 혁명적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 이론 때문에 상식과 철학적 관념이 새로운 과학적 개념, 즉 원칙적으로 증명 가능한 개념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더 어려운 문제는 무슨 이유에서 물리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그렇게 반겼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리라.
아인슈타인이 제기할 당시 특수 상대성 이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전기역학을 괴롭히던 심각한 문제와 직접 관련되었다. 한 세대 앞서서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은, 평형 상태는 전자기파가 빛의 속도로 공간 속을 가로지른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논지를 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지, 왜 공간에서는 전자기파가 특정 속도로 전해지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에테르(ether)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에테르는 다방면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검출된 적이 없다. 물리학에서 크게 성공한 이론이라도 불완전한 채로 남는 수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특수 상대성 이론은 에테르를 배제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단순화이다. 실제로 이미 네덜란드 물리학자 헨드리크 로렌츠(Hendrik Lorentz)가 윤곽을 잡은 바 있는,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물체의 질량 증가와 같은실험의결과들이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설명되었다.
상대성 이론이 성공한 또 다른 더욱 일반적인 이유는 1900년에 양자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상대성 이론은 결국 원자 구성 입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특정 결과들을 예측하는 데 응용된다. 이는 뉴턴의 물리 법칙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양자 이론을 창시한 막스 플랑크(Max Karl Ludwig Planck)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중요성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플랑크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의의를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견주었을 정도이다.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도 마찬가지였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이 상대성 이론은 "물체의 질량은 그 물체의 에너지 함량을 재는 척도"라는 명제를 명확히 설명해 냈다. 아인슈타인은 곧 더 알기 쉽게 설명한 글을 출간했다. 그 글에서 질량 m은 에너지 E에 빛의 속도 c의 제곱을 곱한 값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유명한 방정식 E=mc^2을 선보였다.
물리학자로 이름이 알려지고 1905년 논문의 소문이 번지자, 1909년 스위스 특허 사무소를 그만두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1909년 취리히 대학(University of Zurich)에서, 그리고 1911년 프라하 대학(University of Prague)에서 잠시 강의를 했는데 프라하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반유태주의 방침 때문에 불행한 나날을 보냈다. 1912년에 취리히로 돌아와 계속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3년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Kaiser Wilhelm Institute)에 그를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진 자리에 취임하였다. 이 자리에서 아인슈타인은 재정적인 어려움이나 일상적인 의무로부터 해방되어 그의 모든 시간을 연구에 바칠 수 있었다.
오늘날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 알려진 이론은 중력 개념과 관련된 것으로 뉴턴물리학의 문제들을 바로잡았다.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을 1907년부터 1916년 책으로 펴낼 때까지 계속 발전시켰다. 실제로 일반 상대성 이론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확장하여 우주 공간에 있는 물체와 같이 가속 운동하는 계에 적용한 것이다. 우주의 팽창을 보여 주는 '적색 편이(red shift)'에 대한 설명에서 블랙홀 개념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우주론의 모든 것이 이 일반 상대성 이론의 주제들에서 나왔다.
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려면 아인슈타인의 등가 원리(Principle of equival- ence)에서 출발해야 한다. 알다시피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물체가 지구로 떨어질 때 질량과는 무관한 일정한 가속도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따르면 크건 작건 간에 떨어지는 물체는 '무게가 없다'. 다시 말해서 떨어지는 물체의 무게는 중력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실제로 우주 비행사들은 지구를 도는 궤도상에서 지구로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으며, 그들은 전혀 무게를(중력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우주선이 궤도를 벗어나고 더 먼 별로 날아간다면 가속도변화에 따라 제 무게(그리고 더 많은 무게)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중력이 아니라 가속도가 믿을 만하다.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가속 운동하는 계의 '관성의' 힘은 식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원리의 중요한 결과는 중력이 본질상 모든 물체를 서로 끌어당기는 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중력은 물질의 질량에 의한 공간과 시간의 '휘어짐'이다. 질량의 존재는 공간이 확실히 '굽어' 있음을 보여 준다. 굽은 공간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형태이며, 빛의 속도가 주어지면 계산할 수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과 고전 법칙은 일상 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 하지
만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행성의 타원 궤도를 기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태양을 도는 수성의 궤도와 같이 뉴턴 법칙의 예외(변칙)들까지도 바로잡아 주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지 몇 년이 지나서 천문 과측에 의해 확증되었다. 아인슈타인은 1911년에 벌써 별빛이 태양처럼 큰 물체에 가까이 지날 때에는 틀림없이 태양의 질량에 의해 구부러진다고 예견했다. 그 뒤 그 곡률을 계산해 낼 수 있음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별은 제 위치를 찾게 되었다. 지구에서 관찰되는 겉보기 위치는 태양의 질량으로 공간이 휘어지기 때문에 생긴다. 공
간을 평평하다고 보는 고전 물리학에 따르면 빛의 휘어짐에 대해 다른 값, 일반 상대성 이론의 절반값을 얻게 된다. 일식 때에는 별들을 관찰하고 뉴턴 물리학의 값과 아인슈타인 이론의 값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몇 차례 실패가 있은 뒤에 1919년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Arthur S. Eddington)의 제안으로 탐사대가 브라질과 중서부 아프리카 해안의 프린시페 섬으로 떠났다. 결과는 명확했다. 촬영한 사진들을 분석하자 별들의 위치가 일반 상대성 이론과 들어맞았다. 아인슈타인은 정말이지 하룻밤 새에 여론의 대대적인 찬사를 받았다.
만년에는 중력과 전자기를 통합하는 통일장 이론을 모색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궁극적인 실재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광전 효과를 다룬 자신의 1905년 논문(그 밖에도 여러 저술에서 그 문제를 다루었다)이 밑거름이 되어 출현한 양자 이론이 그 가능성에 한계를 부여했는데도 말이다. 그는 양자 이론의 철학적 함축을 둘러싸고 닐스 보어와도 오랫동안
논쟁했다. 그에 관해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나는 아직 실재의 모델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사물이 발생할 개연성 만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를 표현하는 그런 이론은 가능하다."
1933년 베를린에서 나치가 불사른 책에는 아인슈타인이 쓴 것도 들어 있었다. 그는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 전부터 미국에서 가르치던 아인슈타인은 끝내 독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원(Institute for Advanced Study in Princeton, New Jersey)에서 종신으로 연구하라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히틀러주의의 등장에 자극받아 평화주의 신조를 얼마간 포기했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1939년 원자폭탄의 개발을 권고하는 내용을 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에 서명했다. 아인슈타인은 훗날 폭탄 개발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를 좌익에 공감하는 위험 인물로 분류하는 빌미가 된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핵무기 해제를 주장했다. 그는 미국에 충성하는 애국자가 되지는 않았으며, 1950년대의 이른바 반미 활동에 관한 의회 청문회에 반대했다. 1952년에는 의례적인 지위인 이스라엘 대통령에 취임하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만년의 이력은 대체로 그의 엄청난 권위를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은 공인으로서 여론을 대변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는데, 1934년의 「내가 보는 세계」와 1950년의 「인생의 만년에」는 여러 번 재판을 찍었다. 그 책들은 서로 엇갈리는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글을 담고 있다. 그는 과학의 본질, 사회주의, 흑인과 백인의 관계, 시오니즘, 도덕의 타락 등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은 프로이트처럼 아인슈타인의 정치적 의견과 사회적 견해는 19세기 자유주의의 지혜를 구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가치 있는 읽을 거리이다. 그가 양자 통계학과 관련하여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한 말이 자주 인용되는데, 실은 그는 종교 문제에서는 불가지론자이다. 언젠가 신을 믿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라면 권능 있는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고 이해하는 일에 갈수
록 더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아인슈타인의 개성을 특징짓기란 쉽지 않다. 특히 대체로 고독하게 생활한 만년의 그는 더욱 그러하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느라 자기 감정을 똑똑히 표현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인류에 대한 깊은 헌신을 나타냈다. 그는 명성이 절정에 있을 때 첫번째 아내인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c)와 이혼하는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 그녀와는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한 아들은 이름난 기계 공학 교수가 되었고 다른 아들은 정신 분열증을 앓았다. 게다가 결혼 전에 낳은 아이가 하나 있었지만 양자로 들이기를 포기하고 만다. 후에 사촌인 엘자 뢰벤탈과 재혼 했는데, 그녀마저 1936년 그를 남겨 둔 채 먼저 세상을 떠났다.
1953년 4월 11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회람시킨 평화주의 반핵 선언에 서명했다. 그리고 사나흘 뒤 대동맥류가 터졌지만 바로 죽지는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수술을 거부했다. "내가 원할 때 가고 싶다.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는 것은 재미없는 일이다." 그는 1955년 4월 18일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평화로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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