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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김백봉: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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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901회 작성일 11-03-1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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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추는 춤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아마도 그 무희는 나팔꽃이었을 것이다. 컴컴한 땅속 무대로부터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이 흙덩이를 밀치며 봄볕 환한 땅 위 무대로 올라온 그것은 낭창낭창한 허리를 흔들며 나긋나긋한 넝쿨손으로 허공을 어루는 것이었는데, 무희와는 사뭇 다른 인생관을 지닌듯 시종 뻣뻣한 죽은 나무꼬챙이 버팀대를 뜨겁게 휘감으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요컨대 내가 본 것은 나팔꽃이 씨앗부터 움터 자라는 모습을 촬영한 고속 필름이었다. 식물을 늘 한군데 붙박혀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정물로 생각해온 나로서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그런 다음 유심히 관찰해보니, 나팔꽃만이 아니라 모든 식물, 나아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춤을 춘다는 것을 발견했다. 홍학처럼 우아하고 벌새처럼 재빠른 춤도 있지만 달팽이처럼 수줍고 늘보처럼 느린 춤도 있다는 걸 알았다. 살아 있는 것들은 발끝을 세우고 수직을 유지하려는 것이며, 죽은 것들은 모두 수평으로 스러진다. 생명의 시작은‘춤’이고, 생명의 끝은‘멈춤’이니 춤으로 와서 춤으로 간다. 삶을 짐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는데, 삶이 춤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다만 머릿속 깨달음일 뿐, 몸의 깨달음이 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부지깽이나 바지랑대와 사촌인‘몸치’를벗어나지 못했으니.
봄이 오는 길목, 자타공인의 몸치가 춤꾼을 만나러 갔다. 꽁꽁 언 시냇물이풀리자 성급한 개나리들이 픽픽 노란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으나 제법 꽃샘추위가 옷깃을 파고 들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립무용단장실을 찾았다. 갈색이 감도는 흰머리를 곱게 쪽찌고 붉은 영산홍빛 양장을 곱게 차려입은 이가 반갑게 맞아준다. 바로 서울시립무용단단장이자 한국 무용계의 거장으로 꼽히는 김백봉선생이다.
1927년평양에서 태어난 그이는 전설의 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로, 김백봉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경희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부채춤, 화관무, 장고춤, 만다라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그이는 독특한훈련법과 창작법으로 한국무용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으며, 한국예술평론가협회에서 뽑은‘20세기를 빛낸 예술인’에 선정되기도 했고, 2005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은관을 수장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매일매일 시계같이 이곳에 나와서 일을 하니까 건강한 편입니다. 달리 아픈데는 없는데 감기가 들어와서 오래 동행하는군요.”
“요즘 준비하고있는 공연은 어떤것인가요?”
“5월 정기 공연에 올릴 무용극 <심청전>을 준비하고 있지요. <심청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아직도 심금을 울리는 부분이 있어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한테는 잘 대해주면서도 부모한테 못하는 건 다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요. 제가 저를 생각해도 부모님 보답을 잘 못하는 것같아요. 부모님 덕택에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죠. <심청전>은 인간의 근본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정기 공연도 공연이지만 올해 무용계에는 팔순을 맞는 선생님의 예술과 삶을 조명하는 커다란 행사가 있는 걸로 아는데요, 매우 바쁘실 듯 싶습니다.”
“네. 하지만 그건 후배들의 헌정공연이라 제가 크게 바쁠 건 없어요.”
‘한국 신무용 80년사와 김백봉 예술의 삶’이라는 주제로 3월29일부터 4월4일까지 김백봉의 예술세계를 집대성하는 전시회와 공연이 세종문화회관 미술관과 대극장에서 막이 오를 예정이다. 전시회에서는 김백봉 창작작품에 대한 해설과 다양하게 활동했던 모습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 복식, 소품 등수백 점이 선보이며, 공연은‘부채춤’‘화관무’‘만다라’등 대표작품을 엄선하여, 김말애 감독(경희대학교 무용학부장)과 김백봉무용단 안병주단장의 재안무로 무대에 올릴 예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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