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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에도 여유 있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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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798회 작성일 10-06-0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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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눈을 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6일 아침 문을 열고 나가 보니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눈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자동차 앞유리창에 달라붙지 않도록 하늘을 향해 세워놓은 와이퍼가 눈에 파묻혀 간신히 끄트머리만 나와 있었다.

5일 오후부터 워싱턴 DC를 비롯한 미국의 동부 수도권지역에 최고 80㎝가량 내린 기록적 폭설은 도시 기능을 마비시켰다. 공항은 폐쇄되다시피 했고 철도·고속버스 운행도 지연됐다.

삽으로 문에서 집 앞 도로까지 나가는 길을 확보하고, 자동차를 눈 속에서 '파내는 데' 3시간이 걸렸다. 오전 11시쯤에는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 약 4시간 후에 전기가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고, 휴대용 가스버너로 저녁을 해 먹은 뒤에야 불이 들어왔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 같은 동네에 사는 미국인들의 얼굴에서는 짜증보다 미소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정전 속에서도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촛불 아래 와인잔을 기울였다. 장화를 신고 삽을 들고 나와 눈을 치우던 이웃 사람들은 "정말 좋은 날(What a wonderful day)"이라는 말을 인사말처럼 주고받았다.

최근 한국에 내린 눈보다 훨씬 많은 눈이 내렸지만 혼란과 사회 전체가 느끼는 짜증은 없었다. 오히려 눈을 즐기는 여유를 보였다. 왜 그랬을까.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미국 기상청(NOAA)의 정확한 기상예보 덕분이다. 미국의 관공서와 언론은 NOAA의 예보를 바탕으로 폭설이 내리기 1주일 전부터 5일 폭설이 시작될 것이라고 시민들에게 반복해서 '각인'시켰다. 미 수도권 지역은 기상청의 일기예보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움직였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는 폭설이 쏟아지기 하루 전인 4일 초·중·고교에 대한 휴교령을 내렸다. 대부분의 관공서와 회사들도 5일 오전 근무만을 마치고 귀가시켰다.

이 때문에 수도권 순환 고속도로는 5일 저녁 7시부터 차량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해졌다. 지하철을 타려고 몰려든 승객들도 없었다. 제설 차량들은 한밤중에도 쉴 새 없이 다니면서 간선도로의 눈을 밀어냈다. 기록적인 폭설에도 사건·사고는 거의 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 쫓기지 않고 선진국답게 여유 있게 돌아가는 시스템도 영향을 미쳤다. 폭설이 내려도 정시에 출근 못하면 눈치를 봐야 하는 한국 사회와는 달리 미국은 개인의 안전과 일의 효율성에 더 신경을 쓴다. 워싱턴 DC 인근의 많은 관공서와 회사들은 주말에 인터넷 연락망을 통해 8일(월) 근무시간을 늦추거나 휴가를 사용하도록 권고했다. 미국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이용한 재택(在宅)근무도 적극 활용됐다. 덕분에 기자의 집 앞에 사는 회사원 데니스 던(Dunn)은 8일 출근에는 신경 쓰지 않고 동네 사람들의 집 앞 눈 치우기를 도와주는 데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한 집 건너 이웃인 존 수누누(Sununu) 전 상원의원은 바로 옆집 노(老)부부의 자동차가 나갈 길을 만들어 주며 정담(情談)을 나눴다. 기자가 탄 차가 눈길에서 꼼짝 못하게 되자 이웃이 달려와서 웃는 표정으로 자동차를 밀어줘 빠져나올 수 있었다.

워싱턴 DC를 비롯한 수도권 지역에 폭설은 내렸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포근했다. 한산하고 정겨운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에게도 이런 광경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이하원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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