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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vs 앙드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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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281회 작성일 10-11-21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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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와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김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지금의 직업과 연관을 맺은 시기가 비슷하다. 김종필총재는 1961년 35세의 나이로 5.16을 통해 정치와 연을 맺었고, 앙드레김은 1962년 25세의 나이로 '살롱앙드레'라는 의상실을 오픈하면서 패션계에 데뷔했다. 그 이후 40여년의 세월동안 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업세계에서 늘 정상의 자리에 있었다. 경이적인 기록이다. 그런 점에서 장수하는 직업인의 대표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또 자신의 직업세계에서 낭만주의를 근간으로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김종필총재가 로맨티스트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앙드레김은 음악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소재로 낭만주의가 중심이 되는 작품을 추구하는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다.

재미있는 건 두사람이 디자이너와 정치가라는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가와 민족을 인생의 화두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김종필총재는 우리 나라 정치인 가운데 국가와 민족을 가장 많이 거론하는 사람이다. 남들이 보기엔 김총재 개인의 문제에 불과해 보이는 일에도 '국가적 차원의 결단'이라는 말을 심심치않게 사용한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앙드레김은 예술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답지 않게 애국애족의 정신을 강조하며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다. 수십년 간 100% 국산옷감을 고집하고 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도 나라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가정의 행복도 있다고 말할 정도다.

인간을 중시한다는 삶의 방식이나 직업관도 같다. 앙드레김은 무엇보다 인간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고 말한다. 인간의 아름다운 심성과 따뜻한 가슴을 울릴 수 있는 패션휴머니스트가 자신의 소망이라고 강조한다. 김종필총재 역시 누구보다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정치인이라는 직업이 어차피 '사람장사'이긴 하지만 김총재는 직업적 의미 이상으로 사람이라는 개념을 중시한다.

정말로 희한한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철저하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직업인이면서도 대중을 별반 의식하지 않는 특이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일종의 '유아독존'형이다.
그러나 그런 스타일의 공통점이나 직업적 성취도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두 사람의 직업의식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직업인'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김종필총재와 앙드레김의 삶을 한번 들여다보자.

김종필의 직업의식

김종필의 직업은 정치인이다. 70년대 초와 90년대 말, 두 번에 걸쳐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현재 9선의 국회의원인 그의 직업이 정치인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5.16이라는 충격적이고 극적인 무대를 통해 시작된 그의 정치인생이 어느덧 40년이다. 한 사람이 40년을 한 직종에 종사했다는 건 결코 간단하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거의 예술의 경지라고 할 만한 직업적 노하우,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성실성이나 끈기 등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감히 넘보기조차 어려운 기록이다. 40년을 근속한 직장인에게는 1,00돈쭝의 황금열쇠를 선사해도 과하지 않으며, 데뷔 후 40년이 넘도록 왕성한 활동을 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국민적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40년의 정치경력을 자랑하는 김종필도 당연히 직업적 예찬론의 한 대상자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 보인다. 왜 그럴까.

1980년 5월초 당시 공화당 총재로 대권을 꿈꾸고 있던 김종필에게 한 언론인이 '대통령직이 직업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대통령도 일을 하고 월급을 받으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요지의 질문이었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직업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직업인이라고 봐서도 안된다." 그가 말하는 '대통령직 직업 불가론'의 핵심적인 단어는 '사심(私心)'이다. 대통령은 국민의 뜻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느 경우에든 私心이 들어 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직업의 사전적 의미는 '생계를 위하여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다. 김종필은 직업의 이러한 일반적 개념을 자신이 업으로 삼고있는 정치에 적용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정치인'이라는 직업의 공공성이나 특수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김종필의 단호한 태도를 보니 의아한 생각이 든다. 혹시 김종필의 마음속에는 직업의식이라는 '틀'이 원천적으로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어떤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그 순간부터 '자신의 생계를 위한 사심'으로 공정성이나 합리성을 상실한다고 믿는 건 아닐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때문에 만만치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살지만, 또 그 반대로 일을 통해서 직업적 보람이나 삶의 의미, 이타심을 충족시키면서 살아 간다. 전문가라는 것도 따지고보면 결국 투철한 직업의식이나 최소한의 직업윤리에 대한 '인식의 틀'이 확고한 사람에 다름 아니다.

40년 경력의 직업적 정치인 김종필이 오너로 있는 정당의 지지율이 겨우 3%대에 머물고 있으며, 그가 정계에서 은퇴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60%에 달한다는 건(작년 2월 총선시민연대 조사자료)어떻게 보면 김종필의 애매한 직업관에서 비롯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가정을 전제로 '인간 김종필'과 '직업인 김종필'과의 함수관계를 따져 보면서, 김종필이라는 인물에 접근해 보는 것도 그렇게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기회주의, 애매모호, 2인자

99년 말 월간지 "신동아"에서 한국 정치학회와 공동으로 국회의원과 정치학자 280명이 직접 작성한 설문지를 토대로 유력 정치인 몇 명의 사상과 정치행태를 조사, 분석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조사결과 김종필의 정치스타일에 대한 불만으로는 기회주의, 변신, 편법, 생존적 처세 등의 단어가 1위(17.9%)로 꼽혔다. 다음으로는 애매모호함, 어물슬쩍, 의뭉, 선문답식(10.7%), 현실안주, 미온적, 2인자 처세(9.6%), 구시대, 수구적(7.5%) 등의 순서로 지적됐다. 아마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현재시점을 기준으로 이미지 조사를 해도 거의 비슷한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기회주의적 처신과 애매모호한 말과 행동", 그게 김종필에 대한 대다수 국민의 인식이다. 인식이라는 게 반드시 실체와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연관성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김종필은 40년의 정치인생 중 20여년은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 밑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2인자로 '온갖 험한꼴(?)'을 당하며 지냈고 80년 이후에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혹은 기꺼이 선택당한 2인자의 위치에서 20년을 살아왔다. 표면적으로는 똑같아도 질적으로는 굉장한 차이가 있을 수 있는 2인자의 위치였지만, 희한하게도 김종필의 행보에서는 내용상 아무런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나의 정치생활은 퍽 괴로웠다. 그 반대의 경우, 즉 즐거웠던 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는 김종필 자신의 말처럼, 그냥 '괴로운' 세월이었을 뿐이었던가.

김종필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5.16혁명에 참여했다. 5.16에 관련된 자료를 관심있게 살펴본 사람들은, 박정희의 참모들 중 혁명이 성공한 뒤 권력구조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정리된 구상을 갖고있던 거의 유일한 인물로 대부분 김종필을 꼽는다. 김종필과 함께 중앙정보부 창립을 주도했던 석정선씨는 "정권을 잡았는데 뭘 어떻게 할 것이냐 했을 때 모두들 김종필만 쳐다보는 입장이었다"고 증언한다. 공화당 사전조직의 실무 지휘자로 활동한 강성원씨도 "당시 김종필을 대면만 해도 국가 개조에 대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고, 그는 사심없이 국사에 몰두하고 있었다. 엄청난 결정들을 담담하고 또 대담하게 내려가면서 상황을 끌고 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패기만만한 혁명아의 한 전형이었다"고 전한다.

62년 김종필의 중앙정보부는 단순한 정보기관이 아니라 "정부안의 또다른 정부"였다. 그때문에 실질적인 2인자 김종필은 박정희의 냉혹한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 그는 63년 공화당 사전 창당작업 시비를 빌미로 외유를 강요당한다. 그때 유럽으로 간 김종필은 자동차를 직접 몰고다니면서 공산권이 아닌 나라는 모두 다녀봤다고 한다. 당시 자동차로 달린 거리가 9천 8백km였다니 그의 답답했던 심사를 짐작할만하다.

혁명직후 2년간 권력의 한복판에서 경험한 무소불위의 권력과 그에따른 살벌한 견제, '자의반타의반'이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유럽으로 날아온 김종필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너무 일찍 권력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알아버린 30대 후반의 사내에게 8개월간의 유럽여행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1차 외유에서 돌아온 이후 그는 권력자 앞에서 자신의 뜻을 세우는 일을 중단하게 된다. 일찍이 고향인 부여에서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밝히며 '일체의 낡은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개척자의 기수가 되겠다'던 김종필의 사자후(獅子吼)는 고양이소리처럼 작아진다.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권력의 비정한 속성을 일찌감치 터득한 김종필의 예기불안 심리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고 김종필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알아서 긴다는 것이다. 확실히 자기보다 막강한 힘을 가진 대상에 대한 그의 공포심이나 고개숙임은 상식의 수준으로 이해할 수 없을만큼 지나치다.

80년 5월초 동아방송의 대담프로에서 사회자로부터 중앙정보부의 월권행위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내가 중정을 창설했을 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변질이 있었어요. 최근 전두환장군이 정보부장서리가 되면서 정보부가 본연의 기능에 맞는 운영을 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퍽 고무적으로 봅니다. 우리 국가를 위해서도 아주 좋다는 생각을 해요."

당시의 실제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답변이지만, 이미 혁명군의 실세로 떠오른 전두환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전략적 발언일 수도 있다. 그렇다해도 100만 당원을 가진 정당의 총재로서, 또 당시 유력한 대권후보 중의 한사람으로 거론되던 김종필의 무게를 감안한다면 지나치게 비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5월 17일, 그는 보안사에 연행돼 46일 동안 감금되었다. 그는 그곳에 끌려갔던 모든 사람들이 지금도 몸서리를 치며 기억하는 보안사의 소위 '서빙고호텔' 시절을 회상하면서도 담담하다. 46일 동안 별로 큰 일없이 독서를 하면서 비교적 조용한 시간들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차피 모든 것은 혁명하는 사람들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뭐든지 요구하는대로 다 승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때의 조서를 토대로 발표된 권력형 부정축재자 순위에서 자신이 1위로 발표된 사실에 대해서는 두고 두고 분통을 터뜨린다. 신군부가 정권을 탈취하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 기간 동안 신군부를 향해 그가 했다는 말은 딱 한마디다.

"젊은이들이 잘해주기를 바란다"

김종필의 민망한 발언들

군사혁명의 선배로서 기억에 남는 덕담을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85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뒷날 나에 관한 역사기록을 앞당겨 읽으면서 오늘을 산다'고 비장한 결의를 밝히던 김종필을 상기하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90년대 들어서는 더 당황스럽고 민망한 발언들을 수도 없이 쏟아 놓는다. 그중 압권은 3당 합당 직후에 그가 한 말이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노태우대통령이다. 그 다음은 김영삼 최고위원이다. 최고위원도 다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김영삼 최고위원과 나란히 걷지 않고 뒤따라 간다. 민주화가 됐다지만 무릇 사회와 조직에는 상하가 있어야 한다".

자신은 유교적인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임금이 임금답지 않더라도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고 배웠단다. 불교적인 집안에서 자라지 않아 윗사람을 '부처님 모시듯'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YS가 정권을 잡은 후에는 그 유명한 '홍곡(鴻鵠)과 연작(燕雀)'의 발언을 비롯 선비는 자기를 알아 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명언'들을 줄줄이 쏟아낸다.

김대중정권 창출의 한 축이었으면서도 97년 12월의 국회연설은 그의 깍듯한 몸가짐을 잘 보여준다.

"김대중 당선자께서 정계에 봉사하시려는 참뜻을 보람있게 나눠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합시다."

김종필은 기본적으로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에겐 대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한 정치인의 지적이 헛말은 아닌 듯 싶다.

김종필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그 특유의 '순리주의'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는 스스로 순리주의자로 자부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걸핏하면 이 논리를 구사한다. 김종필의 좌우명은 '上善如水'인데, 그 뜻은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으며 물 흐르듯 순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順天者는 生이고 逆天者는 죽는다'는 게 그의 굳은 믿음이다. 학교 이름을 지어달라는 지인의 부탁에 대학이름을 '순천향 대학'으로 지어줄만큼 김종필은 '순리'를 중시한다. 문제는 그의 '순리'라는 개념에 자의적인 해석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차라리 87년에 관훈클럽에서 언급한 '팔랑개비론'이 훨씬 솔직하고 인간적이다. 김종필은 자신을 종이 팔랑개비에 비유한다. 팔랑개비는 바람이 세차게 불면 힘차게 돌고, 약하게 불면 천천히 돌며, 바람이 멎으면 함께 멎어 버리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개인이란 한 나라의 바람이 세차게 불 때 그에따라 돌아갈 수밖에 없는 팔랑개비같은 존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10월에는 10월의 논리가 있고 11월에는 11월의 논리가 있다"

지난 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와의 단일화 작업을 재촉하는 주위사람들에게 했던 김종필의 말인데, 그의 상황론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구절이다. 오죽했으면 '상황론자'라는 別號까지 얻었겠는가. 상황론자들은 주도적이지않다. 당연히 자기책임으로 인한 괴로움이나 고뇌가 없다. 매사가 "니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지. 내가 먼저 찔렀냐'하는 식이다.

앞서 밝힌 조사결과처럼 김종필의 정치스타일은 '애매모호함' 그 자체다.
딱 부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상황론자들의 가장 큰 특징이기 때문이다. 원래 말을 많이 하지도 않지만 설사 말을 해도 풍부한 어휘력과 은유를 사용, 듣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을 하게 하는 것이 김종필의 특기다. 당운영에 대해서도 간접화법이나 두루뭉실하고 알 듯 모를 듯한 태도를 취해 당관계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자기 뜻을 펼치지 않는 건 아니다. 늘 '당이 결정해 주면 그 뜻에 따르겠다고 해놓고 정작 당론이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하루 아침에 틀어 버리는 사례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함께 일했던 당직자들은 얘기한다. '의뭉스럽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한 정치학자는 '지도자는 명쾌해야 하는데 김종필은 모호하다. 이것이 젊은층에서 인기가 없는 중요한 이유'라고 진단한다.

김종필의 정치는 어떤 면에선 '쇼당패 스타일'이다. 점잖지 못하게 고스톱 용어를 쓰게 돼서 좀 그렇긴 하지만 더 적절한 비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고스톱에서 쇼당이란 내가 1등을 할 수 없을 때 선택하는 차선의 전략이다. 쇼당패를 만들려면 판세를 읽는 절묘한 감각과 나머지 두 사람이 필요로 하는 패가 내 손에 있도록 상황을 몰아가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김종필은 천부적이다.

나한테는 별 필요가 없지만 상대편 누구도 내가 가진 패때문에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드는 게 김종필 정치 전략의 핵심이다. 여기에 힘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타이밍까지 절묘하다면 그 파괴력은 10배 이상 증폭된다.

한계중량을 들어 올린 채 다리를 부들거리면서 버티고 있는 역도선수는 새의 깃털 하나에도 균형을 잃고 쓰러질 수 있다. 이런 때 역도선수는 새의 깃털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 다가와도 코끼리가 덮쳐 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 막상막하의 상황에서 1등을 꿈꾸는 사람들은 김종필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김종필이 늘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몫을 누릴 수 있는 건 이런 메커니즘에 기인한다.

정치기술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거의 예술의 경지다. 말이 쉽지 단순히 현란한 정치테크닉만으로 이런 경지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성향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야 가능한 일이다. 인간 김종필의 내면세계가 궁금해 지는 대목이다.

르네상스적 교양으로 무장

김종필은 인간의 전체 근수를 달았을 때 3김씨 중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이며 정치인 가운데 르네상스적 교양으로 무장된 유일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소설가 홍성유는 JP라는 인물은 가까워지면 질수록, 친분이 두터워지면 질수록 알 수없는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고 말한다. 87년 당시 언론인 오효진은 몇 개월에 걸쳐 김종필을 밀착취재하는 과정에서 그가 이룩한 정치적인 성과보다는 인간적인 능력면에서 그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만도린, 피아노, 전자 오르간, 아코디언같은 악기를 수준급으로 연주한다. 예그린 악단도 만들어 후원해 주었고 서예와 그림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 그의 작품을 받고 싶은 사람이 줄을 서있을 정도다. 한때는 일요 화가회를 이끌기도 했고, 지금도 시인묵객들과 넓은 교유를 유지하고 있다. 더구나 그는 비행기도 탱크도 배도 몰 수 있다. 그의 집엔 장서가 자그마치 2만권이나 된다. 지금도 매일 책을 읽고 있다. 그와 얘기를 하다보면 동서의 고사와 일화, 수많은 싯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 나온다."

그밖에도 그의 예술적 감각이나 재능을 보여 주는 일화는 수없이 많다. 68년 3선개헌 반대를 주도하다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 뒤 한라산 기슭에서 선그라스를 끼고 담배를 문 채 그림을 그리고 있는 김종필의 사진은 로맨티스트라는 그의 이미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김종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낭만적 정치인으로 불리운다. 나는 무슨 이유인지 김종필을 생각할 때마다 고급요정에서 기생의 속치마에 글씨를 써주거나 난을 쳐주는 정치인의 이미지가 그려지곤 했는데, 실제로도 그에게는 그런 풍모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치란 복잡한 산수문제를 푸는 것처럼 하는게 아니야. 이렇게 여인네 궁둥이 슬슬 만져가며 하는거여"

그가 언젠가 요정에서 한 말이란다. 낭만의 뿌리는 인간이다. 그는 늘 인간중심의 사고를 강조한다. 이게 김종필 정치스타일의 최대 장점이자 치명적 약점이다.

'인간중심의 사고'란 분명 누구도 함부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만큼 강력하고 근원적인 삶의 명제다. 문제는 이 잣대를 너무나 무차별하게 적용한다는 것이다.

87년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종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궁정동 안가의 연회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국민들의 시각이 못내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것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될 것으로 봐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다면 공자님이나 부처님을 모시는 게 낫지요. 또 그래가지고는 세상이 다스려지지 않아요. 나는 어떤 면에서는 완벽한 것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약한 면에서 그 인간을 다시 볼 수도 있는 게 아니냐 싶어요."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최소한 갖추어야 할 복장이나 규칙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정치인 김종필에겐 그런 의식이 전혀 없다. 인간사이의 따뜻한 유대관계만 공고하면 만사가 오케이라고 한다. 그는 애초부터 인간 김종필과 정치인 김종필을 구분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총론만 있고, 각론이 없다

69년 3선 개헌안을 반대하던 김종필은 어느날 갑자기 태도를 바꿔 국민투표를 앞두고 전국을 돌면서 개헌안지지 유세를 다녔다. 87년 한 기자가 당시 정치인 김종필의 그런 모습을 보고 씁쓸해 한 국민들이 많았다는 얘기를 하자 너무나 인간적인(?) 김종필의 대답이 이어진다.

"말도 마세요. 다니는 나는 오죽했겠소!"

김종필은 예전부터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상황이 닥치면 '역사는 날 알아줄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때의 역사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표현대로 '오래 사는 게 이기는 것'인가.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 혼연일체가 되어 '암수한몸'처럼 움직이는 사람, 그게 바로 김종필이다. 경계선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늘 총론만 있고 각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는 인간의 야수성에 대한 철학적 고민에 빠져 있는 병사보다는 사격술이 능한 병사가 더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김종필은 평화시의 잣대로 전시의 상황까지를 재단하려 한다. 죽림칠현처럼 '고담준론'만을 일삼는다. 그런 잣대는 위기의 상황에선 효용성이 거의 없다. 그가 고비 고비에서 쉽게 포기하고 주저 앉아 버리는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거기에 있다.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만 하면 김종필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말이 있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한 사람인데 어떻게 감상적이고 우유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한때 물태우라고까지 불리던 노태우 전 대통령도 12.12 때 목숨을 걸고 부대를 출동시킨 사람이다. 타인이 인식하는 자기라는 것은 자신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다발적이고 우세하게 나타나는 그의 성향인 것이다.

자민련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어 주기 위한 날치기 법안의 현장에서 국회의원들이 벌이는 몸싸움을 본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얼마나 쓸쓸하고 우울했는지 모른다. 그들이 한심해서가 아니었다. 평소의 사상이나 그 인품에 반해서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몇 사람의 의원이 육탄돌격을 하는 장면때문이었다. 여당의 한 초선의원은 자민련의 교섭단체 요구에 대해 "시험에 떨어져 놓고 커트라인을 낮춰서 붙여 달라고 요구하는 꼴"이라고 비난했다가 지도부의 압력을 받고 몸싸움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들의 내면에서 일렁이고 있을 자아분열적 괴로움이 생생하게 감지되었다.

이럴 때도 아마 김종필은 저 뒤에서 두 눈을 꾹 감은 채 입술을 내밀고 있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화선지 위에 不對心淸閑(사소한 일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으면 마음이 맑고 여유롭다)을 휘갈기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애창곡 한 구절처럼 '미워도 한세상 좋아도 한세상'인데 저렇게까지 거칠고 빡빡하게 할 필요가 무에 있을꼬. 연장질이 잦은 요즘 애들의 세태에 끌끌 혀를 차는 낭만파 주먹의 큰형님, 그게 김종필이다.

김종필은 평상시 지갑을 사용하지 않고 100만원짜리, 10만원짜리 수표를 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필요한 순간에 '용돈이나 하라'며 즉흥적으로 오리발을 주는 스타일이란다.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시금치 한 단을 사면서 한 푼이라도 더 깍기 위해 실갱이하고 있는 아낙네의 삶이 탐탁치 않아 보일 수도 있다. '저렇게 돈에 집착하면서 험하게 살 필요가 있는가?' 말은 맞다. 누군들 김종필처럼(?) 고상하고 낭만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겠는가.

김종필은 늘 絶代善이나 중립자의 시각을 先占하고 있어서 적극적인 비판을 펼치기가 쉽지 않다. '세상에는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는 일들이 많다'라거나 '모든 일에는 一長一短이 있다'는 따위의 명제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건 농담을 하는 상대에게 정색을 하고 반론을 펼치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다.

김종필은 자신을 비판하려고 마음먹은 상대방에게 그런 허탈한 느낌을 안겨 주는 사람이다. 그는 최고 권력자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시심(詩心)을 꼽으며 감성적 우월감을 과시하곤 한다. 그렇지만 그의 삶을 보고있노라면 평소 그렇게 중요하다고 믿어왔던 인간의 감성이란 것에 대해 강한 회의를 품게된다.

일 안하는 머슴론

김종필은 조선시대 영조(英祖)이래 가장 오랫동안 권력의 핵심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언제나 양지만을 쫓아 변신하는 권력형 인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김종필이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에겐 권력 그 자체가 1차적인 목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두 가지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첫번째, 남편과 사별한 여자가 있다. 남편이 남긴 약간의 재산을 그녀는 자식들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돈이 있어야 자식들이 자기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며 노후도 보장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기제로 돈을 활용하는 것이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김종필은 중정부장을 그만 둔 그 다음 날부터 검은 지프에 미행을 당한 두려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 권력에서 멀어지게 될 때 곧 닥쳐올 뿌리깊은 공포상황때문에 그는 악착같이 권력주변에서 맴돌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번째, 재벌이었던 선친에게서 충분한 재산을 물려받은 남자가 있다. 그는 예술적 소양이 뛰어나서 음반 회사도 운영하고 문화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며 육영사업 등을 벌인다. 그는 영리를 추구하는 사업가라기보다 오히려 문화예술인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사업이란 자신이 원래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어주는 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종필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김종필에게 있어 권력이란, 김종필이란 한 개인이 추구하는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삶을 실현시켜 주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 처럼 보인다. 실제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김종필이 자신있게 내놓을 만한 정치적 업적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雲庭 김종필'이 문화계에 끼친 공로는 만만치 않다. 또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그는 개인적인 삶의 즐거움이나 윤택함도 동시에 챙겼다. 가수 패티킴은 그녀가 새해 인사를 가는 유일한 정치인이 김종필이라고 말하면서, 대중예술에 대한 김종필의 깊은 애정과 전폭적인 후원에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그런 식이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한 한 방편으로 김종필이 정치를 이용했다면 과장된 해석일까.

그는 박정희 정권하에서 역임한 4년 6개월간의 총리 시절에 대해서 거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국무총리라는 게 대단한 자리가 아니라 아무나 대통령이 임명하면 되는 자리라고까지 폄하한다. 현직 총리가 어딜가나 자유가 없었다고도 한다. 인간적인 교류외에 특별한 일을 했을리 없다.

그런데 아무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던 김대중정권하의 파워총리로서 재임한 1년 6개월의 기간 동안에도 그가 뭔가를 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집권 여당의 대표를 한칼에 사퇴시키고 장관 임명과정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지분을 요구하고 관철시키는 파워를 가졌지만, 국정 현안에 대해 어떤 중요한 발언을 하거나 결단을 내렸다는 얘기는 전혀 없다.

자신의 개인적 삶을 즐기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힘은 좋은데 일은 안하는 머슴'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왔을까. 그에게는 애초부터 특정한 자리가 주는 무게나 의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직접적으로 그와 관련된 1차집단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직업인이면서도 별반 대중을 의식하지 않는다. 9선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4.13총선 후 거의 6개월 동안 골프만 치러 다니면서도 늘 당당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보통 사람들이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을 하는 것이나 JP가 골프를 치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라고 당시의 자민련 총재 대행이 했다는 말과 "왜 유독 우리집 양반이 골프치는 것만 그렇게 비난하느냐. 박세리나 박지은이 골프치는 것은 국위선양이라고 하면서" 라고 그의 부인이 했다는 말은 평소 김종필의 생각을 잘 대변해 주는 듯하다. 구분이 없다는 건 확실히 무서운 일이다.

지난 4.13총선이 끝난 후 숭실대 서병훈교수는 김종필의 '국민불감증'과 희박한 '직업의식'을 다음과 같이 질타한다.

"선거가 끝난 뒤 자민련의 김종필 명예총재가 국민 앞에 잔뜩 화난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점이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정말 납득이 안간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무참하리만큼 몰락했다. 그렇다면 김종필은 한 정파의 수장으로 책임을 통감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는다. 자책감에 괴로워 하기는커녕 오히려 역정을 낸다. 김종필의 찌푸린 얼굴을 보노라면 정말 너무 피곤하다."

얼마전 김종필은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이를 전해 들은 한 야당의원의 한마디가 걸작이다.

"그 사람이 불출마 선언을 하는 건 반에서 꼴찌하는 학생이 서울대를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쯤되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김종필처럼 '르네상스적 교양으로 탄탄하게 무장된 사람'이 왜 이런 '험한 뒷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지 안타깝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고약한 사람이로고'하는 김종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약하다'는건 김종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이란다. 그렇다면 내친김에 한번만 더 '고약하게' 굴고 끝을 맺자.

1961년 10월에 김종필은 정보부장의 자격으로 대만의 건국기념일인 쌍십절 행사에 참석한다. 그때 장개석 총통이 35세의 이 革命兒에게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혁명을 해 본 노인으로서 충고를 한마디 할까 합니다. 혁명을 한 사람은 대개 불행해 집니다. 혁명을 한 사람은 하루에 한번씩 자신을 혁명하지 않으면 안되니 이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김종필은 다른 혁명동지들처럼 불행해 지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가 애송하는 시구(詩句)처럼 아직도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의 길이 남아 있다면 그 동안만이라도 장총통의 충고처럼 하루에 한번씩은 자신을 혁명할 수 있어야 되는 게 아닐까. 마침 김종필의 또 다른 좌우명도 '날로 새로워 지도록 수양을 쌓는다'는 '일일신 우일신'이 아닌가. 칠십 중반의 노인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라고 느껴진다면 몇 마일의 길을 더 가지 않고 책을 보면서 쉬거나 편안하게 잠을 청하면 될 일이다.
아무도 안 말린다.

앙드레김만 보면 웃는 이유

예전에 부산영화제에 관련된 TV프로그램 중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리포터가 부산 영화제 현장에서 만난 스타들의 축하메시지를 보여주었는데, 영화배우 강수연, 진희경, 문성근 등의 축하메시지가 나오고 있었다. 그들 다음에 앙드레김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이 나타나자마자 갑자기 스튜디오에 앉아 있던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아무런 멘트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특별히 전과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 게 아니었는데 그랬다. 나는 그 장면이 너무나 인상깊게 느껴졌다. 방청객들은 왜 앙드레김을 보는 순간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사람들처럼 웃음을 터뜨렸던 것일까.

99년 8월의 옷로비청문회를 기억할 것이다. 앙드레김이 "이 땅을 떠나고 싶을만큼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는 사건이었음에도 청문회장에 나온 그를 묘사한 대부분의 신문기사들은 지나치게 감각적이었다. 그가 어떤 옷을 입고 나왔는지, 어떻게 화장을 했고, 어떤 식으로 말을 했으며, 그의 본명은 무엇인지, 어떻게 웃었는지를 상세하게 전해 주었다. 그게 대중들의 주된 관심사일거라는 나름의 계산된 편집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일반인들이 그 사건을 보는 시각도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앙드레김에 대한 관련 자료들을 보면서 그가 섬뜩할만큼 치열한 장인정신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고집하고 있는 예술가 중의 한사람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또 실생활에서 믿기지않을만큼 진지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거나 실없이 戱畵化하는 일에 대단한 흥미를 보인다.

이런 현상은 단지 그의 독특한 스타일이나 말투에서 비롯하는 문제만은 아닐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인간 앙드레김의 내면세계를 정교하게 살펴보는 작업이 선행된 다음에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비단 그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어떤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 패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앙드레김의 패션철학이나 작품세계가 주된 관심사겠고, 야망을 불태우고 있는 젊은 사람은 그의 성공스토리에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며, 여성잡지를 뒤적거리는 어떤 여성은 그가 유명연예인들과 맺고 있는 폭넓은 교우관계나 그가 얘기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더 마음이 끌릴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앙드레김의 독특한 성향이 그의 치열한 직업의식이나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어떤 식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한다. 우리의 삶에서 일이란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동감있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인물이 바로 앙드레김이기 때문이다.
국민디자이너, 패션大使, 남성 디자이너1호, 올림픽디자이너 등 앙드레김에겐 별명이 많다.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대중성이나 개인적인 선호도를 별개로 한다면, 우리나라 패션 분야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브랜드는 '앙드레김'이라는 자연인의 이름일 것이다.

"앙드레김이 새삼 무슨 홍보가 필요하겠어요?"

옷로비 청문회 건으로 몇천만원어치 광고효과를 보았다는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앙드레김이 했다는 말이다. 인지도에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는 그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반문이었을 것이다. '국민디자이너'라는 닉네임이 괜히 붙었겠는가.

82년, 전세계 패션을 주도하는 패션강국 이탈리아 대통령은 앙드레 김에게 문화공로 훈장을 수여했고, 97년에 앙드레김은 패션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지난 88년 서울올림픽에서의 기념패션쇼 이후 지난번의 시드니올림픽까지 연거푸 4차례 올림픽무대에 서왔는데, 프랑스와 이탈리아, 미국 등 각국마다 내노라하는 유명 디자이너가 많지만 올림픽 행사에 초청받기는 그가 유일하단다. 올림픽디자이너라는 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은 경력이다. 샌프란시스코 시는 99년 11월 6일을 '앙드레김의 날'로 선포했다. 해외에서 패션외교사절이라고 부를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위상을 보여 주는 놀랄만한 사건이다.

오해와 편견들

그럼에도 국내에선 작품활동 이외의 터무니없는 루머와 오해로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게 앙드레김의 고백이다.

이러한 오해는 그의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이나 성향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직업이 가지는 특수성(?)과 맞물리면 루머나 오해는 더욱 증폭된다.

"남자가 만든 옷이라고 입지 않으면 어떻하니?"

40여년 전 남성디자이너 1호로 출발한 아들이 걱정스러워 그의 부친이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부의 남자들은 아직도 편견의 잔재를 드러낸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옷을 '작품'이라고 표현하는 그의 태도에 코웃음을 치기도 하며, 한쪽에서는 '국민디자이너'라고까지 불리는 그의 명성에 비추어 지나치게 대중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런 의견들에 대한 앙드레김의 패션철학은 확고하다. 그는 자신의 옷을 상품으로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 오페라나 발레, 연극과 같은 예술장르에서 감동을 느끼듯 패션의상도 충분히 감동을 자아내는 창작예술이라는 것이다. 패션으로 새로운 예술적 장르를 개척해 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의 말답다.

실제 그의 옷은 거리에서 볼 수는 없지만 유명스타들에게 입혀져 많은 사람에게 보여 진다. 자신이 직접 입을 수 있어야 '그게 바로 옷'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겐 좀 답답한 말일 수도 있다. '의상에는 꿈과 환상이 있어야 한다'는 앙드레김의 지론과는 사이클이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드레김에 대한 오해나 편견의 대부분은 이러한 직업적 특수성(?)보다는 그의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이나 성향에서 시작된다. 간단하게 한번 살펴보자.

앙드레김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단골 심사위원이다. 여성의 미에 대한 그 나름의 안목을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는 한 증거다. 또 그의 직업상,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여성들과 타트너가 되어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60대 중반이 된 앙드레김은 아직도 미혼이다. 인터뷰 사진을 위해 시작했다는 그의 화장술도 구설수에 오른다. 정성껏 화운데이션을 바르고 짙은 마스카라와 그리 진하지 않은 립스틱을 섬세하게 바르는 그의 메이컵은 女裝이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젖먹이 때 입양한 아들을 직접 기저귀를 갈아가며 키웠고, 요즘에도 아침마다 대학생 아들이 입고 나갈 옷을 3세트씩 침대 위에 놓아주는 지극한 모성성을 발휘한다. 그런 면에서 앙드레김은 인간의 감각적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는 날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국내외 14개 신문을 정독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해외 패션쇼가 없는 경우 그는 대부분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그의 의상실에서 작품구상과 제작에 매달린다. 자신의 직업에 지나치리만큼 엄격한 사람이라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 스케쥴엔 변동이 없다. 저녁에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87개 나라 대사관에서의 중요기념일 리셉션에 참가하거나 국내에서 열리는 음악회, 무용, 연극, 콘서트 등을 관람하며, 그 나머지 시간에는 텔리비젼을 본다.

대신 그는 안하는 게 많다. 술과 담배, 커피는 물론이고 골프도 안하고 헬스클럽도 다니지 않는다. 포커나 고스톱을 해본 적도 없고 노래방을 가본적도 없다. 또래의 친구도 없다. 5남매 중 넷째지만 부모형제가 모두 세상을 떠나서 명절 때는 꼼짝없이 아들과 둘이서만 지내야 한다. 그에게는 '문화적 풍성함'과 '일상적 가난함'이 공존한다.

흰색이나 청결에 대한 그의 집착은 거의 결벽증 수준이다. 먼지 한톨없이 항상 쓸고 닦으셨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는 그의 청결벽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손님이 앉을 자리에는 미리 향수를 뿌리고 대화 중에는 10분마다 한번씩 크리넥스로 입가를 닦는다. 스탠드나 필통같은 물건들이 놓여 있던 자리에서 10cm이상 어긋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단다. 또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알려진 흰색 옷을 그는 하루에 세 번씩 갈아입는다. 만나는 사람은 많은데 집중해 일하다 보면 땀이 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25년부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흰색 옷만 입는다. 얼핏 보기엔 늘 똑같은 옷처럼 보이는데 디자인이나 소재가 조금씩 다르다는 게 그의 말이다. 국산 코튼으로 된 옷감을 이용해 계절에 따라 조금 두껍거나 얇게 하는데 겨울에는 조금 두꺼운 면천을 사용하고 재킷도 솜을 넣어 누빈 것을 입는다. 이런 옷이 한 30벌쯤 된단다. 맨날 똑같은 양복만 입고 다니는 부호의 옷장에 거의 구별이 안가는 양복들이 백벌쯤 있었다는 에피소드를 연상케 한다. 그런 성향은 그의 작품활동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는 일부 사람들로부터 매일 똑같은 옷만 만든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의 대답을 들어보자.

"제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담기 때문에 제가 만드는 작품 역시 항상 통일된 느낌을 주겠죠. 하지만 늘 똑같은 옷만 만들면 누가 제 옷을 사러 오겠습니까?"

그는 전체 골격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다양한 변형을 통해 완성도 높은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다시 말해 디테일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물론 나는 그의 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할만한 자리에 있지도 않고 그럴만한 안목도 없다. 단지 앙드레김의 창작스타일에서 느껴지는 그의 성향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의 작품마다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는 꼼꼼한 刺繡 紋章은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디테일하게 수를 놓아 옷감을 디자인하는 게 큰 즐거움이라는 그의 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디테일중시, 완벽주의, 반듯함, 결벽증, 도덕주의자는 정신의학적으로 보면 하나의 뿌리에서 나타난 여러 잎새들이다. 앙드레김도 예외는 아니다.

진검승부의 작품 제작

그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목숨을 건다고 할 만큼 치열하고 엄숙하다. 진검승부의 연속이다. 그는 매년 2-3회씩 해외 패션쇼를 갖는데 한번 패션쇼를 할 때 필요한 옷이 150-175벌이란다. 그렇다면 일 년에 최소한 300벌 이상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의 표현을 빌려 본다면 300점 이상의 '작품'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리적인 제작시간을 전혀 감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의 하루에 한 개씩의 작품구상과 아이디어스케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퇴근 후 사람들과 어울려 호프집에도 가고 노래방에도 가는 따위의 평범한 생활은 해볼 짬이 없다. 일년에 절반 정도의 저녁시간을 각국 대사관 리셉션 참가로 보낼 수밖에 없다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정식 디너 파티에는 가지 않는다. 저녁 시간을 몽땅 빼앗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신 언제건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나올 수 있는 스탠딩파티에만 참석한단다. 대부분 의상실 근처에서 간단하게 해치우는 점심식사 시간도 30분을 넘기지 않는다.

그룹전을 하면서 서로의 패션쇼를 축하해 주는 디자이너 세계의 최소한도의 예의조차 무시해 버린다. 그렇게 할 거 다하고 놀 것 다 놀면서 언제 작품 구상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예술은 고독 속에서 탄생된다'는 글을 읽고 마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낯간지러운 고백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건 40년의 생활이 실제로 그렇게 일을 중심으로 치열했기 때문이다.

그는 패션쇼를 하는 당일엔 모델들이 먹을 김밥을 집에서 준비해 간다고 한다. 혹시 다른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서 중요한 행사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강박적인 느낌이 없진 않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이나 집착이 놀랍다. 앙드레김은 패션쇼에 그의 창작 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쏟아 넣는다.

외국에서 열리는 패션쇼를 준비할 때면 그는 이미 7-8개월 전에 사전답사를 다녀올 만큼 애정을 기울인다. 실제로 그가 생각하는 패션쇼란 단순히 디자이너가 만든 옷을 선보이는 1차원적인 개념을 넘어선다. 그는 패션쇼란 오페라나 클래식 콘서트처럼 웅장하고 감동적이어야 하며, 의상과 음악과 미술이 한데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패션쇼를 기승전결로 1시간 30분동안 펼쳐지는 '패션오페라'로 규정한다. 온 가족이 관람하는 예술공연이라는 생각으로 기획을 한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한번도 그의 패션쇼를 정식으로 감상하지 못했다. 아마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옷을 입어본 사람이 극소수임에도 그가 국민디자이너로까지 불리우는 것처럼 앙드레김의 패션쇼는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의 새로운 장르로 인식되고 있다.

96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스핑크스를 배경으로 펼쳐진 그의 패션쇼는, 패션이 독창적 예술이자 문화상품이며 중요한 외교수단임을 입증한 무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곱 벌의 옷을 겹쳐 입은 모델이 한꺼풀씩 벗을 때마다 한국 전통색의 의상이 드러난다는 1人舞는 사진만 보아도 마음이 설레인다.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예술의 한 형태라 할 만하다. 백남준이 '비디오아트'라는 예술장르를 처음 만든 것처럼 앙드레김은 '패션오페라'라는 예술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것이다.

무공해 감정을 가진 앙드레김

아직도 미장원에 가는 일이 겸연쩍어 이발소에서 머리를 다듬을만큼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지만, 자신의 패션자존심이 훼손되면 휴화산이 폭발하듯 분노를 표출한다. 언젠가 한 일간지에 앙드레김이 패션디자이너가 아니라 무대의상 디자이너라는 컬럼이 실렸다. 연예인과 일부 사모님을 위해 파티옷, 결혼식 옷과 같은 '조명발 받는' 옷을 만드는 앙드레김같은 사람은 무대의상 디자이너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많은 인터뷰기사에서 앙드레김은 이 컬럼에 대해 저질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격렬한 감정을 드러낸다.

앙드레김 인터뷰기사 중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탁월하게 평가하는 것은 99년 9월 '신동아' 김현미기자가 쓴 '앙드레김과의 5시간 격정인터뷰'란 제목의 기사다. 이 기사에는 앙드레김의 독특한 감정적 프로필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흔치 않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앞서 말한 무대의상 디자이너와 관련된 대목에서다. 김현미기자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보자.

"스타들이 제 옷을 입고 무대에 서는 것이 잘못됐나요? 대답 도중 갑자기 감정이 격해지는 듯 목소리가 떨리더니 벌떡 일어나면서 '도저히 인터뷰를 할 수 없다'고 소리를 질렀다. '37년동안 디자이너로 살아왔는데 또 다시 이런 대답을 해야 한다니 지겹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지나치리만큼 예의바르고 손짓 하나하나까지 조심하던 태도와는 180도 달랐다. 검은 마스카라로 강조한 눈은 이글이글 분노에 겨웠고 '지겨워 지겨워'를 외치며 자신의 의상실 안을 서성이는 그는 흡사 성난 황소처럼 보였다. 10여분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서성이더니 자리로 돌아와서 휴지 한 장을 꺼내더니 번져버린 립스틱을 신경질적으로 닦았다. 화장을 지운 그의 맨 입술선은 매우 선명했고 입매는 단호했다."

자신의 부드러움이 친화적이고 사교적인 삶의 한 방식일 수도 있다는 그의 고백이 실감나는 장면이다. 그는 늘 자신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기자님'들의 역할이 컸다며 평소 기자를 존경한다고 말해온 사람이다. 사적인 관계가 아닌 유력 언론사 기자와의 인터뷰 장소에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모습을 보인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앙드레김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언제나 깍듯한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객관적이고도 완벽한 통제 속에서 그의 속감정은 기복이 매우 심하고 불안정한 것이었으며, 기회만 있으면 튀어오르려는 움츠린 용수철과 같았던 것이다. 그러한 성향은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동전의 양면이다.

자신의 꾸중에 눈물만 흘리는 아들의 모습이 가슴 아파서 며칠씩 디자인 작업을 전폐할만큼 여리고 감정적인 사람이 앙드레김이다. 옷로비 청문회의 이름 시비와 관련하여 '선비는 號로 작가는 필명으로 부르는 것이 예의이듯 패션디자이너 앙드레김은 앙드레김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쓴 어떤 기자의 글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뭉클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앙드레김이 말할 때 보면 감각적 성향의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한 단어를 수식하는 형용사가 길게 따라 붙는다.

"엘레간트하고 노블하며 인터렉츄얼한........."

가만히 살펴보면 그가 쓰는 단어의 갯수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사랑, 평화, 그리움, 애잔함, 아름다움, 고독, 환상, 꿈, 희망, 꽃, 눈, 무지개 등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에나 나옴직한 단어들이다.

그런데 60대 중반의 앙드레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단어들을 구사한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코믹할 수도 있고 멋적은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그는 너무도 진지하다. 때론 예술가라는 그의 타이틀을 감안해도 유치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지만 달리 보면 천진무구한 감정의 소유자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무공해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앙드레김은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무공해 상태로 쏟아낸다. 작고한 시인 천상병과 닮아 있는 대목이다. 앙드레김이 TV 프로그램 중 원시부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가장 좋아한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섹시함을 터부시

그의 감정이 사춘기 소녀 수준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성적매력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는 심리구조가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앙드레김은 섹시함을 터부시하는 흔치 않는 디자이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아직까지 섹시함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예술가를 본 적이 없다. 앙드레김은 아직 한번도 미니스커트를 만들지 않았단다. 지나치게 선정적인 의상은 한순간 남자들에게 섹스어필할 수는 있겠지만 교양미가 없어 보여 영원한 매력을 가져다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화보를 촬영할 때도 여자 모델의 가슴이 많이 드러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연출을 한다. 그는 대학생인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것 같자 '들뜨거나 허영스러워 보이지 않는' 여자를 사귄다면 얼마든지 좋지만, '섹시함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당부한다. 디자이너가 아니라 마치 修士를 지망하는 청교도같다.

미국을 대표하는 패션디자이너 캘빈클라인은 1980년 "브룩실즈의 노팬티광고"로 진(JEAN)시장을 단번에 장악해 버린다. 그 광고에서 브룩실즈는 "나와 캘빈클라인 진(JEAN)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라고 말한다. 섹스어필이라고 반드시 선정적 의상이 필요한건 아니다. 인간의 성 에너지에서 비롯하는 가장 매력적인 정신적 힘은 상상력이다. 주제넘게 디자이너의 대가에게 충고를 하자는 게 아니다. 섹시함이란 인간의 감성 중에 가장 진화된 형태, 즉 세련된 형태의 감성이며 성에너지는 인간 창의력의 근원인 것이다. 성적 상상력은 인간의 창의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그게 정신의학적인 한 견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성적 상상력을 억압하는 앙드레김이 아쉽다.

앙드레김은 지금도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 이유의 첫 번째는 자신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공시대'라는 TV프로그램의 출연을 두 번씩이나 거절한 것도 같은 이유다. '사람들이 인식하는 성공의 잣대'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아직 자신의 빌딩조차없는데 성공했다는 게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가 자주 밝히는 그의 재산은 의상실이 세들어 있는 건물의 전세금,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연구소 설립을 위해 마련해 둔 교외의 작은 땅이 전부란다. 1966년 에펠탑에서의 성공적인 패션쇼 이후 국내에서 의상실을 여러 개 내고 고객수를 늘리는데 몰두했다면 엄청난 돈을 벌고 사업적인 성공을 거뒀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국위선양을 위해 해외 패션쇼에 쏟아 부은 에너지나 비용을 아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윤택한 삶을 누렸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일찍이 앙드레김 자신이 한 인터뷰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1천년 전 신라왕들의 삶이 기록으로 남은 것처럼 나는 1천년 후의 사람들에게 '20세기에 독창적 패션의 예술세계를 세계에 알린 디자이너'로 남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더 윤택한 삶(?)을 위해 독창성을 포기하고 돈벌이에 집착했다면 앙드레김이라는 '예술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가난(?)하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흰색 다이너스티를 타고 자신의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예술가는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앙드레김은 행복한 예술가다. 청빈을 강요하자는 게 아니다. 그가 자신의 작업이나 업적에 대해서 좀더 프라이드를 가져 달라는 것이다. 그게 그를 아끼고 지지하는 팬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그의 팬클럽을 자처하는 몇몇 젊은이들의 홈페이지를 방문해본 적이 있는가. 앙드레김의 사인도 받고 잠깐이었지만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다는 친구, 어렵게 얻은 그의 작품집을 보면서 잠을 설쳤다는 흥분된 목소리, 가정사정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앙드레김을 생각하면서 꿈을 키우고 있다는 스무살 청년, 언젠가 의상실을 찾아가 그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쉬지 않고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고 있다는 지방의 어느 여고생. 이런 젊은 친구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의무가 있지 않겠는가.

드디어 적당한 사업파트너를 찾았는지 머지않아 '앙드레김' 향수를 비롯한 화장품이 나올 예정이란다. 또 앙드레김 상표를 사용해서 청소년을 위한 캐주얼의류와 홈패션 그리고 골프의류도 준비 중이라니 흥미진진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스튜디오가 있는 작은 빌딩을 갖고 싶다는 그의 꿈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하면서 한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로얄티지불을 위해서 그의 사업파트너가 제시한 '앙드레김'이라는 브랜드의 자산가치는 도대체 얼마였을까. 코카콜라나 맥도날드처럼 '앙드레김'이라는 브랜드를 일정한 금액으로 환산해 보라. 상상의 나래는 끝이 없다. 그러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은 나같은 사람들에게 '앙드레김'이라는 브랜드의 자산가치는 경영학적으로만 의미가 있지 않다. 심리적으로 또는 정서적으로 '앙드레김'이란 이름은 독특한 자산가치를 지닌다. 어떤 이름을 떠올리면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 듯이 앙드레김이란 이름은 우리를 '꿈과 환상'에 젖게 한다. 때로 예술가다운 '무공해 감정'으로 사람들을 민망하게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랴. 지나친 문제의식이 작품감상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의상을 디자인하는 패션디자이너로서, 패션오페라를 기획하는 엔터테이너로서 직업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독특한 예술가, 앙드레김. 아직까지 20대에 가졌던 패션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80세가 넘어서도 계속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단다. 꼭 그렇게 되길 바란다.

밥위에 카레를 끼얹어 먹을 때 카레를 끼얹은 부분이 5, 흰밥이 보이는 부분이 3일 때 카레라이스의 맛이 가장 좋게 느껴진다고 한다. 미술에서도 5대 3의 비율은 황금비라 부른다. 사람은 이 구도에서 가장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일과 삶에 있어서도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무엇이 5가 되고 무엇이 3이 되어야 황금비가 되느냐에 관한 선택권은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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