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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두완 vs 이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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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384회 작성일 10-11-21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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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두완 교수는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그는 신문기자, 방송진행자, 국회의원, 대학교수 등 각각의 전문성을 갖춘 직업을 두루 섭렵한 흔치않은 사람이다.

지난 93년 이래로 봉두완의 공식적인 직함은 광운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 신문방송학과 정교수다. '돈 안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맡고 있는 감투는 더 많다. 그는 현재 성(聖)나자로 마을(나환자촌)돕기회 회장, 남북한 장애인 돕기 운동본부 고문,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민족 복음화추진회장, 적십자 봉사회 중앙협의회 회장,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맡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봉두완이란 인물에 주목하고, 박수를 보내거나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교수라는 그의 공식적 직함이나 존경을 받아 마땅한 봉사활동 경력때문이 아닐 것이다.


봉두완은 우리에게 영향력있는 언론인 혹은 탁월하고 독특한 진행능력이 돋보이는 방송인으로 인식되어 있다. 언론계에 입문한 이래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8년의 시간을 제외하면 언론인, 방송인으로서의 경력은 30여년에 이른다. 정치적으로는 약간의 부침이 있었지만 방송인으로서의 봉두완은 늘 정상의 자리에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앵커맨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 간다는 그의 나이가 벌써 66세임에도 그는 아직도 정상급의 방송인이다.

미국의 전설적인 앵커맨 월터 크롱카이터조차 65세에 은퇴를 했다는데 '봉카이트'라는 애칭으로도 불리우는 봉두완의 방송진행 능력은 아직도 절정의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친구 중에 99%는 현직에서 은퇴한 상태라는 그의 말을 염두에 둔 채 봉두완의 방송진행경력을 살펴보면 그의 '빛나는 재능'에 대한 실체는 더 명확해 진다. 봉두완은 공중파 3사의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을 모두 진행한 특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어디 이런 사람없나요? 말 잘하고, 호감주는 목소리에 딱딱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낼만한 사람, 편파적이라는 이야기 듣지 않도록 시각은 균형잡혀 있어야 하고, 사회 정치 경제 문화 환경 등 모든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일가견을 갖고 있는, 그러면서도 카리스마가 있고 대중적인 지명도가 있는 그런 사람 혹시 어디 없나요?"

이 황당하고 불가능할 것같은 구인광고의 카피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제작진들이 진행자를 물색할 때 늘 따져 보는 조건이란다. 그렇다면 공중파 3사 시사프로그램 제작진의 끊임없는 구애를 받고 있는 봉두완은 이런 불가능한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대단하다. 시사평론가나 방송인으로서 봉두완의 재능이나 상품가치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약간 더듬는 듯한 어투와 주저하는 듯한 눌변, 실수를 겁내지 않는 배짱과 용기, 청취자의 입장에서 전체 맥락을 짚어 주는 통찰력 등이 봉두완의 매력 포인트라는 게 방송 관계자들의 공통된 평가다.

1970년 TBC라디오 '뉴스전망대'에서 꽃피우기 시작한 봉두완의 탁월한 재능과 매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여전한 정도가 아니다. 이제 그의 풍자나 질타는 그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 주는 봉두완의 사회적 중량감이나 만만치 않은 인맥관계와 맞물려 그 파괴력이나 영향력에 있어서 가히 메가톤급이다. 봉두완의 놀라운 재능에 대한 부러움이나 감탄의 심정이 절로 생긴다.

그런데 이 대목쯤에서 하필 봉두완이라는 인물을 새삼스럽게 거론하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겠다.

대단히 변덕스럽고 방탕하며 무책임하기까지 한데 얼굴은 원빈인 남자가 있다. 플레이보이 기질에 질려버린 여자는 그 사내와 결별하고 싶어 하지만 그때마다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성격이나 기질이라고 하는 무형의 요소보다는 대리석을 깍아 놓은 듯한 그의 준수한 얼굴이 먼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때로 인간의 재능이란 '원빈의 얼굴'처럼 한 사람을 제대로 인식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봉두완은 이러한 인식의 걸림돌이 다른 사람에 비해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 인물이란 게 내 개인적 생각이다. 특히나 봉두완은 그의 빛나는 재능과 존경스러울만큼 이타적인 개인적 삶이 어우러져 더더욱 그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어렵게 한다.

"현장에서는 열혈청년처럼 펄펄 뛰면서도 또 한편에선 음지에 숨어 아무도 모르게 이웃을 돕고 있고, 또 자신에게는 누구보다 엄격한 수도승같으니 볼 때마다 신기하다."

봉두완에 대해서 이런 극진한 칭찬을 해 준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김수환추기경이다. 김수환추기경은 내가 개인적으로 그 누구보다도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분이다. 추기경님처럼 인격적으로 훌륭한 성직자가 그렇게 칭찬을 하는 인물인데 나같은 사람이 '인간 봉두완'에 대해서 왈가불가한다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봉두완에 대한 글을 쓰는 내내 그런 의문과 내적갈등으로 많은 시간을 고민해야 했다. .

이 글에서 봉두완을 바라보는 내 시각은 전혀 시사적이지 않다. 시사적이지 않다는 말은 그에 대한 뉴스적 호기심에서 비롯한 글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 현재 봉두완은 스캔들에 연루되어 구설수에 올라 있지도 않고, 방송에서의 엄청난 말실수로 편향적 진행 시비에 휘말려 있지도 않으며, 늦은 나이(?)에 정치재개를 시사하는 주목받을만한 언행을 한 적도 없다. 나는 이 글에서 봉두완이란 인물을 시사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찬찬히 다시 살펴 보려고 한다. 살다보면 예전에 보았던 헝클어진 사진더미가 마음에 걸려, '느닷없이' 책상서랍을 뒤엎어 놓고 정리를 시작하는 때가 있지 않은가. 바로 그런 것이다.


타고난 작가인가, 노력하는 소설가인가


소설가 이외수는 자신이 문학에 별로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의 자신감에서 비롯하는 의례적인 겸양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딱 중간정도의 인물이지요. 다만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면 굶주림과 불면에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 활용에는 남들보다 강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한 잡지와 인터뷰할 때 한 말이다.

1980년 발간된 창작집 '겨울나기'의 작가후기에서도 이외수는 그런 마음의 일단을 토로한다. "제 소설에 속지 마십시오. 저는 실패의 천재, 사랑도 실패하고 자살도 실패하고 소설도 실패만 합니다."

소질없는 사람이 소질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쓰려면 어쩔 수 없이 몇배나 많은 시간을 고통으로 뒤척일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남들은 자기를 보고 '타고난 인물'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가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이외수같은 사람이 재능이 없어서 죽도록 노력한 것뿐이라면 과연 아무나 노력한다고 다 이외수처럼 될 수 있는 것일까. "이외수 당신이 재능없다고 그렇게 죽는 소리를 하면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은 도대체 뭐란 말이요?"하는 가벼운 반발심이 고개를 쳐들지도 모른다.

그건 마치 백억대 재산을 가진 부자가 '나는 저 사람에 비하면 소박한 서민축에 속할 뿐'이라며 천억대 재산가를 부러워 할 때, 그것을 보고 있는 집 한칸없는 진짜 서민의 허탈한 심정과 비슷한 것이다. 실제로 이외수의 경우 다작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소설은 항상 40-50만부가 고정적으로 팔린다. 더구나 출간한지 20년이 넘는 첫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에서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 소설은 '죽지않고' 계속 팔리는 스테디셀러다.

간간이 선보이는 그의 독특한 산문집도 15쇄 정도는 기본으로 찍어낸다. 출판에 있어선 일종의 흥행보증수표가 바로 이외수다. 이른바 '이외수 매니아'란 독자군이 형성되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순수문학을 하는 작가의 작품이 매번 판매면에 있어서 이 정도의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거의 '사건'에 가까운 일이다. 아마 우리나라의 모든 작가를 통틀어 2-3명 정도만 이런 희귀한 경우에 속할 것이다.

문학활동 초창기인 1980년, 어느 문학평론가는 이외수를 일러 '만들어진 작가'가 아니라 '태어난 작가'라고 평가했다. 타고난 듯한 상상력과 아름다운 언어의 연금술을 터득하고 있는, 한마디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작가라는 것이다. 그의 독특한 감성과 재능에 대한 찬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이외수는 자신의 재능없음을 한탄하면서, 鮮血로 쓰여진다는 말을 들을만큼 처절한 노력으로 자신을 '타고난 작가'의 반열로 밀어 올린다. 이 대목에 이르면 인간의 재능이란 게 도대체 무엇일까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살리에르와 대조되는 모차르트같은 형의 음악가, 영감이 떠올랐을 때 단 한번의 붓질로 그림을 완성하는 화가, 들이킨 숨을 내쉴 때쯤 회심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소설가.

어떤 이는 이런 사람만이 재능있는 예술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또 어떤 이는 뛰어난 재능이란 사실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 얻어진 하나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 문제는 인간의 지능을 비롯한 여러 능력이 선천적인 것인가 아니면 후천적 환경과 학습에 의한 것인가 하는 '오래된 문제'에 귀착된다.

과연 동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는 대중의 평가와 재능있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라는, 이외수 본인의 말 중 어느 것이 진실일까. '과연 나는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하는 의문으로 인해 생겨나는 부러움과 절망과 교만의 마음, 그 감정에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이외수는 또다른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다.


봉두완의 열렬 팬들


다시 봉두완으로 돌아가자.

봉두완이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은 청취율이나 스폰서 숫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한다. 제조회사보다 상표가 더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상품처럼 그것이 어느 방송국의 프로그램인가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다. 봉두완이 그 프로그램의 진행자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한 방송국 간부는 한달 넘게 매일 새벽마다 그의 집을 방문해서 공을 들인 연후에야 봉두완을 프로그램 진행자로 영입하기도 했다. 방송에서 봉두완이란 브랜드파워는 그렇게 막강하다. 나이에 관계없이 봉두완에게 애정을 보내는 청취자의 성원이 열광적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두고 있다는 한 직장여성은 봉두완에게 감탄하며 감사의 글을 보낸다.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에 담겨 있는 묵은 찌꺼기가 내려 가는 것 같아 항상 기분이 좋아요. 제가 궁금하고 물어보고 싶은 말들을 모두 하시고 때로는 질책과 칭찬을 하시는 선생님 정말 존경합니다. 연세가 있으신데 그렇게 왕성한 활동을 하시고 남을 위해 봉사도 하시고 젊은 저희들이 많이 배우려 합니다." 한 중년여성도 그에 대한 애정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우리 봉선생님, 정말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분이십니다. 항상 힘있는 음성이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우리 중년여성들이 너무 좋아해요. 힘 더 내시고 늙지마세요."

고등학생 팬도 있다. "고 2 소녀인데 학교에 갈 때 아버지 차에서 매일 듣다가 아저씨를 굉장히 존경하게 되었어요.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에선 아저씨 프로그램처럼 강렬한 카리스마가 느껴지질 않아요" 이쯤되면 젊은 오빠가 따로 없다.

그러나 진짜로 흥미로운 건 30대의 한 남자가 보낸 편지다. "국민을 대변해서 그렇게 바른소리만 하다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니까 조심하시구요. 하지만 걱정은 마십시오. 선생님의 뒤에는 시청자라는 든든한 빽이 있잖아요. 세상에 두려울 것이 뭐 있겠습니까"

흥미롭다고 표현하는 건 봉두완의 방송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은 늘 이러한 심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그 방송을 듣고 있는 사람이 더 조마조마한 느낌이 들어서 그에게 힘을 보태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 그게 바로 봉두완이다.

1980년에 그가 쓴 '뉴스전망대'라는 책을 보면 봉두완을 걱정하는 시청자들의 격려와 성원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피부로 실감할 수 있다. 물론 봉두완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20년도 훨씬 전에 그의 방송을 듣던 청취자나 2001년 현재 그의 방송을 듣는 청취자의 반응이 세월의 흐름에 관계없이 똑같다는 게 놀랍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그가 '바른 소리'때문에 결정적인 불이익을 당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방송진행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멋지고 중요한 일'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방송을 통해서 막강한 영향력과 명성을 얻었다.

봉두완은 1959년 동화통신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해 한국일보 주미특파원(1962-1968)을 지냈다. 그후 중앙일보 동양방송 논평위원(1969-1980)을 역임했는데, 이 기간동안 '뉴스전망대' '시사토론 동서남북'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등의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소위 '봉두완'식 진행을 선보여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TBC-TV와 라디오의 모든 뉴스프로그램을 봉두완 혼자서 진행할만큼 발군의 기량을 과시하던 시기였다. 서민의 대변자, 박력있는 진행, 발군의 카리스마 등 30여년간 이어져 온 방송인 봉두완의 트레이드 마크가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목할만한 방송인으로서의 활동은 오히려 그 이후부터다. 봉두완은 방송 중단 8년 6개월만인 1989년 주부대상 프로그램인 MBC라디오 '여성시대'의 진행을 시작으로 'MBC 전국패트롤 봉두완입니다'를 거쳐 KBS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를 진행한다. 특히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는 1998년 5월까지 3년 7개월간 방송되었는데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예전의 명성을 완전히 회복하며 또다른 전성기를 맞이한다.

봉두완의 폭넓은 사회활동때문에 그의 프로그램에는 유달리 파워엘리트들이 많이 출연하여 화제성 발언을 쏟아 놓았다. 덕분에 95년, 96년 연속으로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는 여론주도계층이 가장 선호하는 동시에 가장 영향력있는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었으며, 97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 10걸에 선정되는 개인적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SBS 라디오로 자리를 옮겨 '봉두완의 SBS전망대'라는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는 더 목소리를 높여 이 시대 기득권층을 향해서 2년여 동안 쉴새없이 직격탄을 퍼부었다.


봉두완의 바른소리

봉두완은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 특히나 정치권에 대해서 듣는 사람이 민망할만큼 강도높은 비판을 일삼는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어느 하나 썩지 않은 곳이 없다며 참으로 토악질이 날 지경이라고까지 말한다.

권력의 핵심을 쫓으며 아직도 건재한 해바라기 정치인들은 낙향해서 글이나 읽으며 남은 평생 참회록이라도 쓰며 여생을 보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질타한다. 하청업체에 근무하다가 원청업체의 구매과로 직장을 옮긴 사람은 그 속사정을 잘 안다는 이유로, 하청업체가 제시하는 견적서 등을 더 까다롭게 따지면서 표독을 떠는 경우가 있다던데 그 말이 과히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봉두완은 5공 출범과 함께 정치에 입문한 사람이다. 이제는 지겹게 들릴 수도 있는 5공의 정통성시비나 원죄의식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만일 제 5공화국이 '새시대 새정치'를 표방하고 나서지 않았더라면 정치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고백이고 보면 원죄의식 운운할 것도 없다.

그는 81년 1월 15일 '역사적인' 민정당 창당 대회의 사회를 맡았는데 '해방 후 이땅에 생겼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사백여 개의 정당들을 생각하면서 민주정의당의 창당이념만은 영원히 후손들에게 물려 줘야 겠다는 사명감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고백한다.

지금도 그의 이력 어디에나 자랑스럽게 명기되어 있는 건 11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다. 81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마포,용산에 출마한 봉두완은 16여만표를 얻었는데, 그의 표현대로라면 건국이후 여당후보로는 처음 보는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했다.

당시 봉두완은 유세장에서 자신같은 사람이 정치권밖에서 마이크를 잡고 비판의 소리를 외쳐 대기에는 안팎의 사정이 너무 급박하다고 절규했다. 당시 유권자들은 민정당이 어떤 정당인지조차 모를 때였다. 단지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방송을 통해서 독특하고 탁월한 솜씨로 서민의 대변자를 자임하던 봉두완은 너무나 익숙한 인물이었다.

결국 봉두완은 MBC 앵커맨 출신 하순봉의원과 함께 앵커 및 아나운서들의 정계진출 원조라는 새로운 기록을 추가하면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서민의 대변자에서 민정당 초대 대변인으로 변신한다. 그는 국회의원은 자유직업 중에 최고로 우대받는 유일한 직업이라는 말을 한적이 있는데 그의 말처럼 11대와 12대 국회에서 봉두완은 최고로 우대받으며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봉두완은 13대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는다. 6.29 선언직후 군출신 인사들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건의를 노태우대표에게 했는데 그때 앙심을 품은 군부세력들이 복수극을 펼쳤다는 것이다. 공천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충격과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다고 한다. 배신감과 무력감으로 3개월간 팔다리가 마비되는 고통과 失語症의 증상을 겪었다니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짐작할만 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나치리만큼 낙관적이고 유머러스한 봉두완의 이미지만으로는 잘 상상이 안가는 대목이다.

그는 12대 국회의원 유세때도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사무실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명동성당에서 나오는 자신을 향해 돌과 계란, 모래를 던지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을 부여안고 왜 여당국회의원이 되어서 젊은이들을 실망시키냐는 한 젊은이의 울부짖음에 선거때 빌려 쓰던 여관방으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혼자 울었단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내가 왜 군인들을 따라 다니다가 이런 수모를 겪을까. 국회의원하는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일까. 내가 죄인인가? 내가 돌팔매를 맞을 정도로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자신의 정치적 과오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과연 듣는 사람의 마음을 꿰뜷고 있는 것같다는 봉두완의 멘트인가. 방송인 봉두완이 보여주는 날카로운 풍자의 칼날과 얄미울만큼 정확한 현실인식은 정치인 봉두완에게 적용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모양이다.

더 실망스러운 건 노태우대표에 대한 인간적 배신감과 공천제외라는 개인적 절망이 겹치면, 팔다리가 마비되고 실어증이 걸릴만큼 충격을 받지만, 자신이 진리요 정의라고 믿었던 가치관이 흔들릴 때는 그저 눈물 한방울 찍어내는 갈등으로 수습된다는 점이다. 어떠한 직책이나 어떠한 대가의 약속도 없이 무조건 신군부의 창당작업에 동참할만큼 그들이 제시한 '새시대 새정치'의 이념에 전폭적으로 동의했다면 그 가치관이 뿌리째 흔들릴 때 그런 식의 반응을 보여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자신의 이해관계에는 눈에 불을 켜면서도 '大義'를 추구하는 일에는 나몰라라하는 정치인을 질타하는 게 봉두완의 전매특허 아니던가. 그는 98년 2월 한 신문의 컬럼에서도 이런 아름다운 정신을 또한번 역설한다. '정치인들이 앞장서 스스로 뼈를 깍는 개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한 그리고 그 알량한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한 우리 조국의 앞날은 암울할 뿐이다' 라고.


봉두완의 이상한 정치구애

공천탈락 1년쯤 후 봉두완은 MBC라디오 '여성시대'에서의 워밍업을 거쳐 본격 시사프로그램 'MBC 전국패트롤 봉두완입니다'를 진행한다. 정치에 대한 한을 잠시 접은 채 특유의 대중적 감각을 바탕으로 '말도 못하게 친했던' 노태우정권에 대해서 독설을 퍼붓는다.

특히 수서사건과 관련해 강도높은 비판을 가하자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인기작전 펴는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도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청와대개입설까지 시사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그가 다시 예전의 럭비공같던 방송인 봉두완으로 돌아오는 모양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年) 연말 봉두완은 정치재개 의사를 밝힌다. "정치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무척이나 시달렸던 3년 6개월이었습니다. 치미는 분노를 달래는 한편 정치에 대한 샘솟는 관심을 누르느라 무척 애를 썼지요."

다음해 국민당소속으로 용산지역에서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봉두완은 서정화, 한영애에 이어 3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당시의 민정당이나 국민당이 모두 다 신생 정당이었고 출마직전까지 방송활동을 했던 상황까지 똑같았음에도 81년 16여만표를 얻었던 자신의 지역구에서 10여년이 지난 92년 겨우 3만2천표를 득표하는데 그친 것이다.

그후 봉두완은 국민당 정주영 대통령후보의 홍보위원장으로 그의 이미지전략을 진두지휘하면서, 2만명규모의 '사랑과 실천봉사회'조직을 통해 천주교신자를 중심으로 교구별 득표전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렇지만 정주영후보도 봉두완처럼 3위로 낙선을 하고 말았다.

94년 10월 KBS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를 통해 다시 방송에 복귀한 봉두완은 방송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지만 심심치 않게 공정성 시비에 휘말렸다.

97년 6월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이 프로그램의 공정성에 강한 의문을 표시했다. 봉두완이 고정출연자인 연합통신 김모 논설위원에게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으냐고 질문했는데 김위원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또 봉두완은 대선전에 노골적인 이회창후보 편들기 발언으로 세차례나 선거방송 특별위원회의 주의를 받았다.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후보단일화를 '두 김씨의 야합'이라고 공박했고, '그냥 두 분이 해자시라 이거예요'라는 표현까지 썼다. 또 3김정치를 밀실에서의 야합이라고 맹비난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연설내용만 소개해 편파시비를 불러 일으켰고, 방송기자 클럽 주최 '이회창 대통령후보 토론회' 사회자로 선정되어 이회창후보와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에는 양상이 좀 달라진다. 김대중대통령 당선자의 '국민과의 대화' 사회자로 선정되어 그의 유연한 방송진행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더니 신문컬럼을 통해서는 김대중찬가를 부른다.

"자유당말기부터 정치부 기자생활을 했지만, 김대중대통령 당선자만큼 IMF같은 위기의 극복을 위해 하느님이 도구로 쓰기 위해 준비했던 사람도 없구나 하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98년 2월 한나라당 맹형규대변인은 봉두완의 편파적 진행을 문제 삼아 KBS사장에게 진행자 교체를 요구한다. '이 말을 하면 한나라당에서 전화가 온다'거나 '한나라당인지 두나라당인지 모르겠다, 한나라당에 실망했다'는 등의 멘트를 통해서 의도적으로 한나라당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편파적 방송을 했다는 것이다. 맹대변인은 또 봉두완이 공정성이 생명인 언론을 이용해 해바라기성 행태를 드러내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즉각적인 반박에 나선다. 한나라당의 항의방법이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70년대에도 방송내용에 대해 불만이 있으면 정부든 정당이든 내게 조용히 항의했지, 한나라당처럼 공식성명까지 내가면서 떠들썩하게 구는 일은 없었다.

이한동대표가 경복고교 동창이고 맹형규대변인도 고교후배인데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대화방식을 통해서 항의의사를 전달할 수 있지 않느냐, 나야말로 한나라당에 대해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낀다." 물론 이런 사적 영역에서의 불만외에 방송의 공정성이라는 공적영역에서의 훈계도 잊지 않는다. "누가 누구의 편을 든다고 호통치고, 자기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방송 그만하라 말라고 한다면 그건 한참 잘못된 일이다. 국민을 무시하는 행위며 언론을 탄압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를 고스톱판의 룰로 심판하지 말라"

인기 앵커맨 출신 맹형규대변인과 펼친 방송의 공정성에 대한 설전은, 92년 대선때 봉두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92년 국민당은 대선을 앞두고 심해지고 있는 방송의 불공정 보도와 편향적 진행에 대응하기 위해 '편파방송 특별대책 위원회'라는 기구를 조직했는데, 당시 국민당 홍보위원장이었던 봉두완은 이 기구의 핵심적인 특위위원으로 언론사를 상대로 공정방송을 촉구했다. 확실히 세상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한나라당의 요구에 대해 KBS라디오측은 봉두완의 뛰어난 방송진행 실력을 감안해 구두경고하는 선에서 마무리짓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방송인으로서 봉두완의 재능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를 다시 한번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타인의 참회를 강조하려면

아직도 매번 선거때마다 출마설이 나도는 봉두완은 몇년전부터 정치인들과는 커피 한잔 안마신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엄격하게 이 원칙을 지키면서 살고 있다. 봉두완은 자신이 정치를 중간에 그만 두게 돼 말년에 원숭이처럼 웃음거리가 되지 않았다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정치에 다시 손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단다. 그의 종교적 신념과 맞물려 봉두완은 정치를 악의 소용돌이라고 규정한다. 그럴수록 그가 정치인이나 정치권에 들이대는 잣대는 더 엄격해 진다. 그는 누구보다 참회의 정신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봉두완은 '잘못을 부끄러워하라. 그러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루소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거짓으로 가득찬 사회를 정화하는 첫걸음은 참회하고 진실을 고백하는데서 비롯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나 많이 가지고 배운 사람이 그 어느 누구보다 앞장서서 참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120% 공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지도층인사 중에서 이런 참회의 자세를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게 봉두완의 생각이다. 그러니 봉두완에게 비판받고 조롱당해야 할 인물은 '고기 반 물 반'처럼 세상에 널려 있다. 이런 인물들은 봉두완의 매서운 질타로 남들 앞에서 원숭이처럼 웃음거리가 되거나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봉두완은 자신이 '개인의 목소리'가 아닌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때문에 그렇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내 앞에서 사우나도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땀흘리는 출연자들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속이 시원해서 좋다고들 한다" 봉두완이 가지고 있는 참회의 사상이나 통렬한 비판의식이 잘못됐다는 말을 하자는 건 아니다. 오히려 존경받고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다만 그러한 참회의 정신이나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도 적용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의 방송을 듣던 한 청취자는 봉두완에 대한 짜증스러움과 안타까움을 글로 적어 띄운다. "봉두완의 방송을 듣다보면 정말 봉씨가 국회의원 깔 때 하는 말처럼 '청취자노릇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코미디 프로라 생각하고 가끔 듣기는 하지만 정말 못 들어 주겠다. 자신이 예전에 국회의원이었을 때 했던 말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러나 봉두완은 그림자없이 맑고 투명한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태도를 근거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청교도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 자신에 대한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거나 더 나아가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 자신의 올곧고 순결한 삶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재임기간 중 도덕적 대통령이라고 자부하던 YS가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것은 이런 심리적 매커니즘에서 기인한 것이다.

'작은 일에 감사하는 태도, 시간을 소중히 여길줄 아는 태도, 남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여 무시하지 않는 태도, 주어진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태도, 삶의 고난과 시련이 닥칠 때 굴하지 않고 믿음 안에서 꿋꿋이 이겨 나가는 태도 그리고 자신은 괴롭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려는 굳은 결심.'

봉두완의 자녀들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손꼽는 덕목들이다. 확실히 봉두완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진지하고 교과서적이다. 감히 그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한다는 자체가 민망할만큼 도덕적이고 이타적이다. 그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타인에게 베푸는 삶의 한 전형을 보여 준다.

97년 KBS 노동조합이 공개한 봉두완의 1년간 출연료는 7천6백50만원이었다. 그러니까 한 달에 6,7백만원쯤을 버는 셈인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이 돈을 하나도 남김없이 자신이 관여하는 봉사단체의 운영비나 은퇴한 옛동료들의 밥값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자신은 2천원짜리 구내식당 밥으로 아침 점심을 때우면서도 카톨릭대학 발전기금으로 5천만원을 약정하는 사람이 봉두완이다.

그는 '돈 안되는 일'에 돈을 쓰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이며, 자녀들의 결혼식에 30명의 하객만을 초청할만큼 검소하고 소박한 정신이 몸에 배인 사람이다. 나환자나 장애인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유별나다. 봉두완은 아름답고 가치있게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체험적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다.


TBC 고별뉴스와 봉두완의 두 잣대

그런데 나는 가끔 천연소다수같은 그의 '바른 소리'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가슴이 시원하고 한편으로는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찜찜함은 그가 98년에 한 신문에 기고한 컬럼의 다음과 같은 구절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를 기억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기 위해선 과거의 잘못부터 되짚어 봐야 한다." 그가 입버릇처럼 주장하는 참회론의 또다른 표현이다. 이 구절을 그대로 봉두완에게 되돌려 보자.

봉두완은 81년과 92년, 선거직전까지 방송진행자였던 우월한 지위를 바탕으로 정치판에 뛰어 들었다. 특히나 81년 신군부세력과의 결탁에 대해서는 처음의 순진한(?) 소신만을 강조할 뿐 그 어디에도 그가 그렇게 부르짖는 참회의 기록은 없다. 그렇다고 그가 5공의 당위성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소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인용한 84년 때의 유세기록을 봐도 그렇고 90년 MBC라디오 '여성시대'의 진행과 관련한 인터뷰 기사를 보아도 그렇다. 그는 그 인터뷰에서 '민정당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던 잘못에 사과하는 뜻으로 더욱 열심히 방송하겠다'고 다짐한다.

'心因性 기억상실증'이란 질환이 있다. 뇌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도 심리적인 이유로 기억이 사라지는 특이한 병이다. 이 병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선택적'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자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분만 선택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간을 당한 여자가 강간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는다거나 극단적인 재난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사고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주제넘게 봉두완식으로 한번 말해보자. 우리 사회에는 이런 '선택적 사고'를 하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아직 한번도 제대로 된 과거청산이 이루지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목소리를 그대로 빌려서 말하는 게 더 실감이 있을 듯 싶다. "우리 사회에는 자신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사는 자들로 가득하다.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들이 울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들에게는 관심밖의 일이다. 많이 가지고 배운자들이야말로 그 어느 누구보다 앞서 참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언제까지 이런 말들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향한 구호로만 그쳐야 하는 것인가. '선택적 사고'는 얼마나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지 모른다.

1980년 11월30일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작업으로 동양방송(TBC)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봉두완은 10년째 진행해온 TBC라디오 '뉴스전망대'의 고별방송에서 몇번씩이나 목이 메인다.

"여러분께서 그동안 아껴 주시던 이 '뉴스전망대'는 내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여러분과 작별해야 될 순간에 이르렀습니다. (목이 메임).....그러나 역사는 쉬지 않고 계속 이어져 갑니다. 자, 새로운 출발을 해야죠. 활기차게.....(울음으로 잠시 중단) 열심히 살아 갑시다...... 오늘은 1980년 11월 29일, TBC뉴스전망대에서 바라본 오늘의 세계, 저는 더 이상 더듬지 않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12월 6일자 신문에는 봉두완이 바로 그 언론통폐합을 추진한 민주정의당 마포.용산 지구당 조직책에 임명되었음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TBC의 고별방송에서 눈물을 흘렸던 한 남자 아나운서는 바로 그 다음날 KBS통합 축하쇼에 나와 밝은 얼굴로 '새시대'를 외쳤다가 국민들의 '입뭇매'를 맞았다. TBC 고별쇼에서 '아직도 내사랑'이란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던 여가수는 TBC를 통합한 KBS측으로부터 출연정지 통고를 받았다.

그런 일들이 다 소박하나마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도 봉두완은 TBC를 회상하는 글을 통해 아직도 여전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낸다. "TBC출신들은 이스라엘민족처럼 여기 저기 흩어져 살고 있다. 도대체 뭘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무슨 권한으로 신문 방송을 통폐합한단 말인가. 역사의 흐름을 군데군데 끊어 버리고 한데 어울려 살란다면 그것이 인류에 대한 죄악인 나치와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

고별방송에서 목이 메었던 TBC 논평위원 봉두완과 민정당 조직책 봉두완 그리고 영원한 방송인이라는 봉두완은 전혀 별개의 인물인가. 혼란스러운 건 비단 나만의 과장된 감정일까.

봉두완이 특유의 박력과 명쾌한 진단으로 이 혼란의 사슬을 끊어주었으면 좋겠다. 봉두완은 '전망'이란 말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가 진행한 프로그램의 이름에는 대부분 '전망대'라는 말이 들어있다. '전망'이란 멀리 바라보거나 앞일을 미리 내다보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방송인 봉두완의 전망 능력을 신뢰한다. 복잡한 시사문제도 그가 먹기좋은 '전주비빔밥'처럼 잘 버무려서 들려주면 모든 게 명확해 진다. 늘 개운한 마음만으로 이 탁월한 능력을 가진 언론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영원한 방송인 봉두완'을 향한 한 시비꾼의 '화살기도'다.


이번에는 이외수를 살펴보자.

이외수는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다. 상징적으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다. 밤새 국립 천문대의 천문학 박사와 별자리에 대해 토론하면서 천체 망원경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또 '거액'을 들여 일제 극현미경을 구입해 연못 침전물을 떼어 그 속에 담겨 있는 대륙보다 넓은 세계를 살펴 보기도 한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좋아하는 남자

이러한 성향은 그의 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우리의 삶에 관한 근본적 물음들이 망원경적 시각이라면 소름끼칠만큼 치밀한 그의 묘사는 현미경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1994년 이외수는 '감성사전'이란 전혀 새로운 책을 선보였다. '감성'이란 코드로 201개의 단어들을 재규정한 일종의 이외수식 사전이다.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투명한 詩라거나 '영혼'은 우주 무임승차권이라는 식의 해설을 실어 놓은 책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독특한 감성에 열광했다.

그러나 이외수는 감성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황금비늘'이란 그의 소설에는 조선시대 맹인들의 삶을 기술한 대목이 나온다. 이외수는 단 몇줄의 그 문장을 쓰기 위해 17권의 '대동야승'을 독파한다. 소설의 리얼리티와 자료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다. '꿈꾸는 식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정신과 병동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해서 정신과 의사를 수도 없이 만난 것은 물론이고 본인 스스로 정신병동에 입원할 생각까지 했다고 고백한다.

이외수식 감성과 리얼리티, 이 또한 상징적 의미의 망원경과 현미경이다. 감성이란 재능적인 측면이 많지만 리얼리티의 추구는 성실하고 치열한 노력과 노동을 전제로 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노력하는 재능'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타고난 언어의 연금술사'란 평가는 마치 끌로 파는 것처럼 한 문장 한 문장을 새기는 그의 집념에 대한 또다른 표현이다. 한 동료 소설가는 이외수의 글에 대해 '은종이를 비비듯 신선한 음향을 뿌리는 감성의 문장'이라고 평가한다. 확실히 '문장'에 대한 이외수의 집착은 거의 광적이다.

그와 인터뷰를 했던 문학담당 기자는 소설에 대한 이외수의 집념은 남다른 데가 있는데, 자신이 보기에 그건 소설보다는 오히려 문장에 대한 집착같다고 말한다. '은, 는, 이, 가'라는 조사(助詞) 하나의 선택에도 어찌나 공력을 들이는지, 소설쓰기가 끝나면 조사까지 전부 외운다는 이외수의 말이 실감난다고 덧붙인다. 그렇지만 이외수는 자신에게 '언어의 마술사'라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술사는 속여야 하는데 자신은 속임수로 글을 쓰지 않고, 느낀 그대로 정직하게 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낱말과 문장에 대한 이외수의 광적인 집착은 자신의 재능없음에 대한 한탄으로 이어진다. "웃기는 게, 어울리지 않는 낱말들이 한 문장 안에 함께 들어가면 글은 금방 나를 거부해 버립니다. 교감과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거지요. 이걸 달래려면 다시 며칠 밤을 뼈깍듯 해야 하는데,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재능이 없는 소설가예요. 아마 지금까지의 작품들은 내가 워낙 떼쓰고 발악을 하니까 소설이 옆구리나마 조금 보여준 것뿐일 겁니다."

그의 독특한 '문장론'은 역사가 길다. 25세 때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이외수는 2년 후 소설 공부를 위해 강원도 산골에 있는 객골분교의 소사 근무를 자청한다. 이 곳에서 그는 무섭게 문장공부에 몰두한다.

"나는 한솥 가득 밥을 지어서 바깥에 내다 놓았다. 얼음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더럽게 눈물겨운 겨울이었다. 얼음밥은 도저히 수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망치와 못으로 깨뜨린 다음 으적으적 씹어먹는 수밖에 없었다. 정신뿐만 아니라 내장까지도 투명해 지는 느낌이었다." 몇솥째의 얼음밥을 해먹은 후에 그는 '묘사적 문체'의 핵심을 터득한다. 다른 작가들은 대부분 서술적 문체를 사용하는데 자신은 묘사적 문체를 사용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언어를 생명체처럼 대하는 감각이 '묘사'인데 이건 서술보다 몇배나 어렵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표현인 '시간을 죽인다'는 표현도 그가 제일 처음 쓰기 시작한 묘사적 문체란다. 30여년 동안 이외수의 문학 또는 예술활동은 이런 '얼음밥' 정신을 근간으로 한다.

그는 인간의 의지나 정신력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사람이다. 80년대 초반 '칼'이라는 장편소설을 잡지에 연재할 때는 하루에 세 시간만 잠을 자면서 집필에 몰두했는데 어떤 때는 무박오일을 한잠도 자지 않고 원고지와 씨름을 하기도 했다. 식사도 하루에 한끼씩만 먹었다. 배가 부르면 의식이 흐려지고 육신이 나태해 지기 때문이다.

이외수가 지렁이를 자신의 사부로 여기는 것도 따지고 보면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지렁이의 속성 때문이다. 꿈틀거릴 수 없는 자는 살아남을 수가 없고 자기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땅속에 숨어 있으면서도 쉼없이 꿈틀대며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지렁이처럼, 자신은 사람들의 정서를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땅인 원고지를 끊임없이 파고 든다는 것이다.

'벽오금학도'와 '황금비늘' 등 장편 2권을 쓰는 8년의 세월동안 그는 방문을 뜯어내고 특별주문한 교도소 철문을 달아 놓고는 밖에서 걸어 잠근 후 그 안에서 글을 썼다. 일종의 '글감옥'을 만든 것이다. 속칭 '식구통'이라 불리우는 구멍으로 밥을 받아 먹고 용변도 안에서 해결했다. '기인 이외수'의 또다른 해프닝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그런 차원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외수의 '얼음밥' 정신을 보고 있자면 예전에 군대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는 유격 훈련 장면이 떠오른다. 빨간 모자를 눌러 쓴 조교는 훈련생들이 기진맥진할 때까지 소위 '피티체조'를 시킨다. 밧줄 하나 잡을 힘이 없을 때까지 피티체조를 시킨 후 유격훈련을 실시해야 정신력만으로 그 위험한 훈련을 무사히 치뤄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군복무 경험이 없어 그런 이론이 실제로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건지 그건 잘 알 수 없지만, 시퍼런 칼날같은 정신력을 유지하기 위한 이외수의 피티체조는 육체의 극한을 넘나든다. 그러니 육신이 온전할리 없다.


재능을 뛰어넘는 정신력

현재 이외수의 모습에서 그가 학창시절에 농구, 탁구, 핸드볼 선수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랜 기간 엎드려 글을 쓴 탓에 허리가 고장났고, 너무 원고지를 가까이 대고 쓰는 버릇 때문에 왼쪽 눈의 수정체가 파괴되는 증상이 생겼으며, 과도한 음주와 불규칙한 식사 때문에 그의 위장은 하루 한끼 약간의 죽정도를 받아 들일 수 있는 상태라고 한다. 폐결핵을 4번이나 앓은 탓에 한쪽 폐는 완전 기능상실이며 골다공증도 심하다.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 그 좋아하던 술을 입에도 댈 수 없어 대신 차를 마신다.

사실 이외수의 음주는 그 양(量)이나 기벽(奇癖)에 있어서 일종의 전설이다. 결혼 첫 해인 1976년, 그는 병원에서 알콜중독 진단을 받는다.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무박삼일을 마셔야만 직성이 풀리는 주량이었고, 어느 때는 석달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신적도 있을 정도였단다.

술에 취하면 개집에서 잠을 자거나 쓰레기 통속에서 잠을 자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고, 한달 동안 마신 술병이 담벼락과 같은 높이로 마당에 쌓이던 시절이었다. 45킬로그램이던 몸무게는 38킬로그램으로 줄어 들었고 급기야 자의식과 전혀 상관없이 손이 떨리는 수전증이 오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이외수는 술을 끊겠다고 결심한다. 갑자기 술을 끊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으니, 단계적으로 양을 줄이면서 끊으라는 의사의 지시가 있었지만, 그는 알콜중독의 진단이 내려진 그날부터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이외수는 그 당시 자신이 가진 재산이라고는 정신력 하나밖에 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석달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술생각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콘크리트벽에 이마를 들이 받으며 수도자가 고행하는 기분으로 고통을 견뎌 내었다.

결국 그는 정신력 하나만으로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났다. 나는 직업상 알코올중독 환자를 간혹 접한다. 그래서 이외수처럼 술을 끊는 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고통과 의지력을 요구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외수는 의지나 정신력의 중요성을 역설할뿐 아니라 실천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럴 경우 재능이라는 건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외수는 자신이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재능없음에 대한 열등감이 그나마 오늘의 이외수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새에 대한 인간의 열등의식이 비행기라는 괴물을 만든 것처럼 모든 진보란 열등의식을 그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이 광기로 불타고 있다고 모두가 화가일 수는 없으며, 한쪽 귀를 자른다고 모두가 고흐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전생애를 바쳐서 열등감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외수 예술의 또다른 한축인 그림에서도 이런 정신은 그대로 적용된다. 그의 그림은 소설가의 심심파적을 넘어선다. 원래 그는 화가가 꿈인 사람이었고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있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춘천교대 시절 대학미전에도 입상한 경력이 있는 화가 지망생이었지만 '재능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에 '능력에 절망해서' 소설을 쓰게 되었단다.

그러나 지금 이외수는 작고한 화가들까지 포함해서 선정된 '춘천 미술인 1백명'에 포함될만큼 인정받는 화가다. 94년에는 이외수 仙畵 개인전을 열었는데 신세계 갤러리 개관 이후 최대의 관객이 몰렸다고 한다. 이외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익필(翼筆)을 사용하는 화가인데, 익필은 부드러운 붓털대신 장닭의 꽁지깃으로 만든 깃털붓을 말한다. 깃털은 물이나 먹이 묻지 않고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먹물을 찍는 순간 화선지에 옮겨 단숨에 그려야 한단다.

말 그대로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림을 그려야 했을테니 내공(內攻)의 예술혼을 중시하는 화가 이외수가 겪었을 고통이 어떠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이 전시회에 서른 다섯 점의 그림을 출품했는데 몇 년동안 하루 8시간씩 붓하고 씨름하느라 어금니가 다 빠지고 원래 새까맣던 머리가 다 세 버렸으며, 파지만 해도 여러 트럭이 실려 나갔단다.


자신의 피를 요구하는 구도자적 삶

이외수를 보고 있으면 들끓는 성욕을 끊으려고 돌로 자신의 성기를 짓이기는 수도자의 처절한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이외수 매니아의 상당수가 아직은 치열한 삶의 정신이 파랗게 살아 있는 대학생들이란건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81년 문학평론가 이광훈은, 이외수는 언제나 대학생처럼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고 적었다. 젊은 시절 그의 '겨울나기'나 '꿈꾸는 식물'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파랗게 날선 '칼'을 품어본 경험이 있던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얼마 전 서울대생 1000명을 대상으로 '좋아하는 작가'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을 때도 이외수는 당연하게 10위 안에 선정되었다. 한 20대 청년은 올해 쉰 다섯 살이나(?) 된 이외수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한다.

"선생님, 요새 황금비늘을 읽고 있어요. 어제는 선생님의 시집을 읽으면서 가슴이 묘하게 아려서......'가을동화'보고도 울지 않았는데, 눈물이 날뻔 했어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강력하게 제 생활을 빨래해 주시는 분, 그래서 선생님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도 오직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선생님의 순수함이 영원히 물들지 않기를..... 새하얗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이외수를 보면서 나는 그가 가지고 있는 확실한 재능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공감능력'이다. 그는 그의 아내가 임신만 하면 입덧을 같이 하는 특이한 버릇이 있단다. 헛구역질은 물론이고 입맛이 떨어지며, 심지어는 개살구같은 것을 한번 실컷 먹어보고 싶다는 충동 때문에 거의 환장할 지경까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내가 큰 애를 임신했을 때는 입덧이 유난히 심했는데 한겨울에 그의 아내가 갑자기 참외를 먹고 싶다고 말하자, 그도 견딜 수 없이 참외가 먹고 싶어서 혼난 적도 있단다.

물론 창작에 대한 이외수의 치열함은 '유사입덧'의 특이현상을 능가한다. 그는 자신을 54세의 임신한 남자로 표현한 적이 있다. 언제 세상에 태어날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자신의 영혼의 모태 속에는 소설이라는 이름의 태아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게임에 빠진 아들과 어울리기 위해 게임도사가 된 사람이 이외수며, 그의 나이나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젊은 네티즌들과의 채팅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는 수준급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또한 이외수다.

그의 공감력은 단순히 상대방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표피적인 교통(交通)기술이 아니다. 그의 공감력의 바탕에는 누구의 가슴에도 눈높이를 맞출줄 아는 이외수표 '천혜의 순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다지 정갈하지 않은 그의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음 본 아이들이 서슴없이 그의 품에 안긴다는 것도 그 한 증거가 될 듯 싶다. 머리로 쓴 작품은 독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고 가슴으로 쓴 작품은 가슴을 아프게 하므로 자신은 늘 기력을 다해 가슴으로 작품을 쓴다는 이외수의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인도의 한 성자가 다리 위에서 강물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다리 아래로 배 한척이 지나 가고 있었다. 벌거벗은 노예가 땀을 뻘뻘 흘리며 노를 젓고 있는데 주인은 배가 느리다며 채찍으로 노예의 등을 후려쳤다. 그 순간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성자의 등에 채찍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외수의 공감력은 마치 성자의 등에 새겨진 채찍자국같은 것이다. '기인 이외수'의 이면에 따뜻한 가슴이 있는 '인간 이외수'가 존재할 수 있는 건 그런 이유다.

그는 아내의 생일날엔 무슨일이 있어도 전날 밤에 자신의 손으로 미역국을 끓여서 아내의 생일상을 준비한단다. 지금도 이외수 책의 대부분을 출간하고 있는 출판사 사장과 맺은 인연은 한편의 휴먼드라마다. 자살을 생각할만큼 극한상황에 몰린 젊은이 한 명이 이외수를 찾아와 그의 책을 출간하길 원했다. 너무나 처절한 그의 모습이 마음에 걸린 이외수는 어렵사리 산문집 한 권분량의 원고를 넘겨준 뒤 어느날 저녁 우연히 그 출판사를 찾았다.

"밤 12시에 가보니 전직원이 라미네이트 코팅이 돼서 반짝반짝하는 책표지를 걸레로 하나하나 닦고 있어요. 새책을 왜 닦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정성을 다하라고 해서 그런다고 해요. 그 이야길듣고 울었습니다. 이런 사람이면 내가 평생 도와주겠다고 결심했죠."

그 일화를 듣고 쓰러져가는 출판사 사장이나 편집장들이 수도 없이 그를 찾아와 한동안 '제목바꾸기'식의 이외수 산문집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외수가 글장사'를 한다는 극렬한 비난에도 그는 모두 아홉권 쯤 되는 그 책들의 인세를 단 한푼도 받지 않았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모두가 '눈물겹고 가엾은' 사람들이었을 뿐 '돈을 벌겠다는 것도 아니고 직원들 밀린 월급이라도 주겠다는데야 어쩔 도리없이' 제 살 자르는 심정으로 '그냥 눈 딱 감고' 원고뭉치를 건네 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매니아들에게 들려주는 이외수의 육성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동물은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고 인간은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지요. 그대가 만약 동물적인 사랑에 성공하고 싶다면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고 그대가 만약 인간적인 사랑에 성공하고 싶다면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인간 이외수'가 아닌 '작가 이외수'의 공감력은 그의 피와 혼을 요구한다. 그의 작중인물들은 피흘리는 투사와 같다. 단지 남의 피를 요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피로 대신할 뿐이다. 전쟁의 투사는 남의 피를 요구한다지만 구도자는 자신의 피를 요구하기 때문이란다. 그의 이런 정신은 1971년의 문단데뷔 당선소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외수, 이 망할 자식아. 세상이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너만은 절대 썩지 말고 영악스럽게 글을 쓰도록. 그러나 요절하지는 말도록. 마침내 나와 나의 언어들이 아름다운 비극으로 남아서 순수, 그 누구도 잊을 수 없는 눈물이 되기를 빌며 살기를."

그는 그 약속을 쉰 다섯 살이 되도록 지키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젊은이들이 이외수란 인물에게 보내는 존경심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열병도 30개월 정도만 지나면 일상적인 감정상태로 돌아 온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에서는 일종의 중독성 물질이 분비되어 극치감이나 흥분감 등을 느끼게 되는데 이 물질의 유효기간이 30개월 정도라는 것이다.

사랑같은 달뜬 감정이 지속되면 결국 정신적 에너지가 소모되므로 인체가 스스로 자기방어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사랑처럼 좋은 감정도 그러한데, 하물며 이외수처럼 평생동안 서슬퍼런 날을 벼리면서 칼같은 작가정신을 유지하려면 심신의 상태가 어떨 것인가.

그는 장편을 쓰면서도 항상 처음부터 거듭 읽고 고치고 또 그 다음을 쓰는 방식으로 끔찍할정도로 반복하기 때문에 작품을 끝낼 때쯤이면 조사 하나까지 깡그리 외운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에 대해서 진저리가 쳐진다고 말할 정도지만 그런 게 작가정신이라고 믿는단다. 이렇게 작업을 하면서도 이외수는 늘 자신의 재능에 절망한다.

"밤을 새워 글을 써본들 무슨 낙이 있으랴. 언제나 닿아오는 것은 절망뿐이다. 써놓고 다시 읽어보면 엿같다는 생각만 든다. 마누라는 옆방에서 잘도 잔다. 백매를 쓰고 천매의 파지를 만든다. 그리고 다시 써놓은 백매를 태워 버린다. 울고 싶은 심정뿐이다. 기침을 한다. 목구멍에서 약간의 피비린내가 나고 있다. 어디까지 망가져 있는 것일까. 그러나 망가져도 좋으니 하나만 쓰게 해다오."

이 정도면 그가 강조하는 구도자(求道者)의 자세가 따로 없다. '한 소리'를 얻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며 제 3자의 입장에서 재능이 있네 없네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이외수를 향해서 들이대는 재능이란 잣대는 그런 것이다. 그에게 '타고난 작가'란 칭송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뼈를 깍는 구도자'의 모습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81년 '장수하늘소'의 작가 후기에 쓰여진 이외수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마지막 피 한방울이 마를 때까지 온갖 방법으로 다 시도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실패해 버렸지만 주여 마흔 여덟장의 화투를 다 모아야만 고도리에서 스톱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단 석장이면 됩니다. 언제쯤 필요한 석장이 제게 쥐어질는지 저로서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놀라운 '재능을 가진 구도자'가, 필요한 석장의 화투패를 쥘 때까지 오래 오래 건강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봉두완과 이외수는 우리의 삶에서 재능이란 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또 재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들이다. 때로 재능은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우리같은 凡才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세상에서 제일 가는 재능을 얻고 싶어 하는 무의식적 욕구를 만나게 된다.

야사 하이페츠는 20세기 최고의 바이얼리니스트로 일컬어 지는 사람이다. 그는 음악비평가조차 그의 숭배자나 예찬자로 바꾸어 버릴만큼 압도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지만 그로 인해 미샤 엘만을 비롯한 다른 일류급 바이얼린 주자들은 헤어나올 수 없는 열등의식에 시달려야 했다.

재능이란 동전의 양면처럼 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뉴욕의 신체 장애자 회관에 적힌 시의 한구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재능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받았다. 신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만일 당신이 신에게 꼭 한 가지 재능을 요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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