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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동 vs 전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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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537회 작성일 10-11-21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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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그 떠나지 않는 되울림

혹시 휴양지로 유명한 클럽메드의 슬로건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아무 것도 안할 수 있는 자유”
나는 그 표어를 볼때마다 인간의 원초적인 자유의지를 묘하게 자극하는 말이라는 느낌이 들곤 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1차적인 자유도 중요하지만 아무 것도 안할 수 있는 2차적인 자유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1차적인 자유의지조차 버거운 삶을 살고 있다.

정신분석가 중에 프릿츠 펄스(Fritz Pearls)라는 사람이 있다. 프로이트를 존경하던 동시대의 정신분석가였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했다는 이유로 프로이트 학파에서 쫓겨나고 그로인해 정신의학사에서도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학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는데, 그 이론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것이다.

성격발달에 대한 그의 기본이론은 '환경 의존'으로부터 '자아 의존'으로의 변화이다. 다시 말해 부모나 사회의 가치관에 의존하는 삶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여 그것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핵심 과제라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도덕적 체계, 지적 체계, 종교적 체계에 의존하지 말고 '나의 실존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나 자신이 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갖지 못하거나 그런 의지를 환경에 의한 억압으로 펼치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하고 쓸쓸한 일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에 수반되는 행동에너지는 그만큼 중요하다.

언젠가는 인간의 2차적인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부담없이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만, 이 글에선 장세동 전안기부장과 개그맨 전유성이란 인물을 통해 우리의 1차적인 자유의지와 행동에너지에 한정해서 얘기하려고 한다.

그런 전제하에 펄스의 성격발달 이론을 극단적이고 현상학적으로 대입해본다면 장세동 전안기부장의 삶은 ‘환경의존형’이고 개그맨 전유성씨의 삶은 ‘자아의존형’이라고 할 수 있다.

5공 청문회의 스타(?)

먼저 장세동 전안기부장에 대해서 살펴보자.

지난 99년 초 국회에서 IMF관련 청문회가 논의되던 시점이었다. 청문회의 첫번째 증인으로 강경식 전부총리가 거론되던 중, 그의 비망록이 공개되는 바람에 화제가 됐다. 비망록에는 청문회 내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거나, 청문회를 자신의 소신을 떳떳이 밝혀 대중적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등 세세한 지침이 적혀 있었다.

그 지침은 5공비리 청문회 때 장세동이 보여준 행동을 분석한 뒤에 나온 것이라는 후문이다. 한마디로 장세동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확실히 장세동은 노무현이나 장석화 전의원처럼 5공 청문회가 낳은 또다른 스타(?)였다.

진짜 사나이 중의 사나이, 쾌남아, 의리의 화신이라는 찬사가 당시 청문회에 선 장세동에게 쏟아졌다. 서울시장감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장세동을 잡는 청문회가 아니라 장세동이라는 '의리의 남자(?)'를 온 국민에게 알리는 홍보성 이벤트가 된 셈이다.

현재 일반 대중이 알고 있는 장세동의 긍정적 이미지는 대부분 이때 쌓인 것들이다. 선거 때마다 빠지지 않고 그의 이름이 후보자로 거론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대중적 이미지때문일 것이다.

물론 일부 식자층에서는 그의 의리타령을 유치하기 짝이없는 뒷골목 건달패식의 사고방식으로 치부하기도 하고, ‘5공 원죄론’을 이유로 그에 대한 어떤 긍정적 평가도 반대한다. 그러나 장세동이란 인물의 대중적 이미지는 이미 그 자체로 대단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지난 98년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장세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장세동의 의리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가끔 텔리비젼에 비치는 그의 얼굴도 날이 갈수록 더욱 당당해 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전두환씨를 공격적으로 비호하는 것이 단지 의리때문일까? 나는 그의 심리상태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의 심리만큼이나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장세동에게 환호하는 대중의 심리라는 게 내 생각이다.

탈주범 신창원을 기억할 것이다. 신창원은 몇 년 동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일부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의적이라고까지 불리었지만 사실관계에만 주목한다면 내용은 싱거우리만큼 간단하다. 살인과 절도죄으로 복역 중인 재소자가 감옥을 탈출하여 도피행각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이 가지고 있는 신창원에 대한 이미지, 즉 그에 대한 인식은 좀 다르다. 그의 만만치 않은 싸움실력이나 자신의 여자를 보호하려는 남자다움, 남다른 의지력 등이 부풀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환호를 보냈다. 신창원의 이미지가 실제 신창원을 압도한 경우다.

'장세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질문에도, 장세동에 관한 ‘사실(fact)'과 장세동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recognition)'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가 포함돼 있는 듯 하다.

장세동은 자신이 군인이 되지 않았다면 건축학을 전공하는 대학교수가 되었을 거라고 말한적이 있다. ‘장세동 교수’라는 직함이 별로 어색하지 않을만큼 그는 충분히 지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그 때문인지 '충성과 의리'의 이미지를 독과점하면서도 자칫 그런 경우에 동반되기 쉬운 ‘단순, 무식, 경박’ 등의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실상 충성심으로만 따지자면 전임 경호실장들이었던 박종규나 차지철 혹은 이후락같은 이들도 장세동 못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에게 열광하지 않는다. 장세동처럼 충성스러우면서도 스마트하고 지적인 느낌을 동시에 주지 못하는 것이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장세동은 20년 전 자신의 부대에 근무했던 부하들 이름을 지금도 다 외울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그는 또 자기 통제력이 뛰어나며 사전준비가 놀랄만큼 치밀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는데, 5공 청문회가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해주었다. 그의 청문회 증언 등을 보면 무관답지않은(?) 어휘력으로 개념정리를 명확하게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정치란 진실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이 아니라 사회통념을 선점하기 위한 선전 내지 선동이라고 봅니다. 이럴 때는 용어가 중요해요. 신문사 편집기자들의 제목선택이 사회적 통념을 만드는데 중요합니다"

5공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는 많은 부분 언론에 책임이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그의 말이다. 논리의 타당성은 둘째로 하고 이쯤되면 완전히 5공의 율사 수준이다.

실제로 많은 군출신 인사들이 활동하던 80년대에 그를 자주 접할 수 있었던 한 중견 기자는 그를 자신이 만나본 여러 군인들 가운데서 가장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실제로 장세동은 어떤 인물인지 그의 연대기를 잠깐 살펴보자.

알맹이 없는(?) 연대기

장세동은 1936년생으로 전남 고흥군 도양면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서울로 이주한 후에 성동공업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서울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육군사관학교 1960년 졸업앨범인 '북극성 4293'을 보면 장세동과 친한 동기생들조차 그의 출생지를 서울로 알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해방되기까지 경찰공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6.25때 실종됐다.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그는 원래 마음먹었던 서울대 건축과를 가지 못하고 1957년 육군사관학교에 16기로 입학한다. 이종찬, 천용택 전국정원장과 故강재구소령이 그의 육사 동기다. 1971년 35세라는 늦은 나이로 은행원이던 지금의 부인과 결혼했다.

1977년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 임명되었는데, 12.12사태 때의 경복궁 모임이 바로 30경비단장인 그의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5공이 들어서면서 그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장군으로 진급한 1981년 7월에 경호실장에 취임해 3년 7개월간 재직했는데, 재직 중인 84년 12월엔 중장 진급과 동시에 전역, 28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했다.

85년 2월 안기부장에 임명되어 87년 5월 박종철군 고문은폐사건으로 물러날 때까지 2년 3개월 동안 명실상부한 5공의 2인자 역할을 하며 한때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후계자로까지 거론된 적이 있다.

88년 5공비리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이후부터는 전두환 전대통령을 위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89년 1월 일해재단 설립비용 모금과 관련해 직권남용 혐의로 처음 구속된 그는 93년 3월에는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세칭 용팔이 사건)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96년 12.12및 5.18사건에서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각각 쇠고랑을 찼다. 현재 그는 66세의 나이로 전두환 전대통령의 잦은 나들이에 동행하며 여전히 당당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세동의 삶은 그가 ‘어른'으로 모시는 전두환 전대통령과 연결하여 살펴보지 않으면 그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아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장세동에게 전두환 전대통령은 존재 근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도령과 분리된 방자를 생각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제 장세동은 전두환 전대통령을 통해서만 의미가 생기는 사람이 돼버렸다. 한때 남들은 꿈도 꾸지 못할만큼 대단한 권력을 휘둘렀고 이제는 60대 중반의 나이에 두 아들의 아버지인 한 남자의 삶을 규정하는 표현치고는 지나치게 단정적이며 과격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의학적으로 살펴보면 장세동은 부모품을 떠나기가 두려워 시집도 안간 채 순종적으로 살아가는 노처녀의 삶처럼 종속적이고 불안정하다. 그 이유를 한번 살펴 보자.

'성은이 지극하시니 갚고 갈까 하노라'

장세동은 지금도 전두환 전대통령을 반드시 '어른'이라고 지칭한다. '어른'이라는 말 속에는 상대적으로 자신을 미성숙한 '어린 아이'로 규정하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육사 11기와 16기의 선후배 사이니까 실제 나이는 5살 정도밖에 차이가 안나지만 그가 '어른'을 대하는 태도는 엄격한 부자지간이나 봉건적인 군신 관계를 연상케 한다. 큰절을 올리는 것은 다반사고 자신의 생각이 어른에게 알려 지는 일 자체를 '외람되게' 생각한다.

그는 어른을 정성으로 모셨다고 말하면서 그런 면에서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토로한다. 훌륭한 분을 오랫동안 모실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은(聖恩)이 지극하시니 갚고 갈까 하노라'
어른에게 바치는 충성심을 칭송하는 사람들에게 장세동이 가끔 인용한다는 옛시조의 한구절이다.

그가 어른으로부터 받은 은혜나 은총, 그리고 국가로부터 받은 혜택을 다소라도 갚고 인생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그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싯구란다. 변함없는 충정을 노래한다는 면에서 현대판 '사미인곡(思美人曲)'이 따로 없다.

장세동이 이런 대단한(?) 어른을 처음 만난 건 1966년 그가 월남전에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구라파 출장길에 병원에 들렀던 전두환 중령은 장세동 대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1967년 11월 그가 월남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자신이 대대장으로 있는 수경사 30경비 대대 작전장교로 명령을 내놓았다.

상관과 부하관계로서 둘 사이에 최초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후로 두 사람은 파월 백마부대의 일원으로, 공수특전단장과 대대장으로, 대통령 경호실의 상관과 부하로, 무려 7년 8개월을 동고동락하게 된다.

그는 전두환전대통령과 가장 오랫동안 직접 상관과 부하관계를 유지하며 같은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2.12사태 때 장세동은 장태완 수경사령관 휘하에 있는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지만 당연하게 그는 전두환 국군 보안사령관의 명을 받들어 그의 사무실을 거사장소로 제공한다. 두 사람의 완벽하다고까지 할 신임과 충성 관계에 대한 그의 해석을 들어보자.

"인간관계란 무형적인 것이기 때문에 숫적으로나 양적으로 표현되거나 잴 수 없는 것이다. 그 분은 나에게 여러 형태의 가르침을 줬다.

첫째는 정이 담뿍 담긴 격려와 충고의 말씀이 있었고 또 내가 소화시키지 못할 정도의 꾸짖음과 채찍질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그 분의 행동과 체취에서 풍기는 무형적인 교훈이 있었다. 내게 영향을 준 것은 무형적 교훈, 채찍질, 충고의 말씀 이런 순이었다. 이런 것들이 종합돼 그 분의 은혜에 대해 반사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정성과 충성을 바쳤다"

결국 전두환 전대통령의 인품에 매료되었다는 얘기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전두환 전대통령은 자신의 끈끈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정상의 권좌를 차지한 사람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나는 적이 없는 사람이야'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단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사조직과 공조직을 통합하여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 한 비결은 그가 동기생과 후배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육군에서 가장 청탁이 많은 장교로 알려져 있었는데 자신을 위한 청탁이 아니라 동기생이나 후배장교들을 위한 인사청탁이 주된 것이었다고 한다.

인간관계에서 그의 가장 큰 능력은 동기생이나 부하들로 하여금 '저사람은 누구보다도 나를 제일 신뢰한다'고 믿게 만드는 힘이라고 한다. 거기에 덧붙여서 받는 사람의 예상보다 늘 '0'이 하나 더 붙어 있곤 하는 촌지 액수도 그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시키는 데 한몫을 한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실제로 장세동이 감옥을 다녀와 '휴가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자 전두환 전대통령은 물경 18억원을 그에게 위로금으로 주었고 그 후에도 8차례에 걸쳐 모두 30억원을 하사했단다. 아무리 대가를 바라고 바치는 충성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주군이 이 정도의 배려를 하면 감읍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머리가 있는 충성은 충성이 아니다

그가 '어른'에게 바치는 정성과 충성은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거치면서 절정에 달한다. 대통령이 산책로에서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리면 심기가 불안해 지고, 그렇게 되면 의사결정에 악영향을 끼친다면서 도로의 정지작업 정도로는 성이 안 차 길에 새똥이 쌓여 굳은 것을 녹이는 약품을 개발하도록 했단다. 대통령의 심기안정이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으로서 가장 큰 임무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른바 '심기경호'다.

그는 경호실장 시절에 '어른'이 찾으면 늘 3분 이내에 출두했으며 연락 받는 즉시 머리 손질을 하고 '어른'이 쓰는 것과 똑같은 향수를 뿌리고, 권총을 찬 뒤 윗옷의 양 호주머니에 지도를, 그리고 메모용 수첩을 반드시 윗옷 안호주머니에 넣고 갔다고 한다.
지도는 수행 도중에 대통령이 산의 높이나 낯선 건물에 대해서 물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하기 위해서다.

그는 또 술자리에서도 각하의 말씀을 하나라도 놓칠까봐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메모를 했다고 한다. 각하가 술맛이 떨어지겠다고 핀잔을 주었을 정도라니 기가 질릴만 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행동에 붙이는 이유가 자못 숙연하기까지 하다.

사석에서라도 대통령께서 공무에 관계되는 말씀을 하시면 적어 두었다가 관계 부서장에게 통보해 주려고 그랬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입 속에 혀가 따로 없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의 이런 유별난 충성심을 5공 정권창출의 기여도 측면에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10.26사건에서 12.12사태 사이에 전두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과 함께 권력의 의지를 다졌던 핵심측근으로 다섯명을 꼽는다고 한다.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총무국장, 이학봉 수사국장, 장세동 수경사령부 30단장, 김진영 33단장이 바로 그들이다.

전두환 본부장에 대한 영향력과 정권 탄생 모의에 있어서의 기여도는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김진영, 장세동의 순서라는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혼자만 전남 출신인 장세동은 전본부장과의 개인적 친분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경상도 출신이 주류인 다른 측근과는 인간적으로 크게 가깝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본부장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 경직되어 있었다는게 중평이다. 5공 출범기에 장세동은 2허에 비해 권력의 핵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던 게 사실이고 주도세력 사이에서도 그는 정권창출의 기획자라기 보다는 실천자라는 시각이 팽배했다.

5공 창업의 기획자 허화평은 전두환 전대통령을 절대 권력자로 보기 보다는 주식회사 대표이사쯤으로 생각하고 자신도 주주로서 당당하게 행세했다. 허화평은 장영자 사건을 계기로 대통령의 친인척이 관련된 비리에 대해서도 전두환 전대통령과 이순자씨의 의견과는 달리 단호하게 처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대통령의 처삼촌까지 구속하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충성심이란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최인호의 역사소설 한 대목이 있다. 신궁의 활솜씨를 가진 성주가 있었다. 그는 활솜씨가 뛰어난 99명의 궁사를 뽑아 자신의 그림자처럼 훈련을 시킨다. 그가 활을 들면 동시에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기면 똑같이 따라하며 그가 화살을 겨누는 방향으로 99개의 화살이 겨누어 지도록 끊임없이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어느날 그는 자기 부하들의 충성심을 테스트하기 위해 마당에서 꽃을 돌보고 있는 자신의 애첩을 향해서 갑자기 활을 겨눈다. 주위에 있던 부하들이 동시에 활을 겨누었고 주군은 자신의 애첩을 향해 서슴없이 화살을 당긴다.

물론 애첩은 고슴도치가 되어 죽고 만다. 그런데 부하 중 한명이 머뭇거리며 활을 쏘지 않은 것을 보고 성주가 그에게 묻는다. 왜 나와 같이 행동하지 않았는가. 부하가 말한다. 소장은 그 애첩에 대한 주군의 지극한 사랑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죽으면 주군의 상심이 너무 클 것 같아서 차마 화살을 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성주는 자신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부하를 죽인다. 생각하는 부하는 필요없다는 것이다. 머리가 있는 충성은 충성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머리쓰는 부하 허화평은 장영자사건에서 자신의 주장을 펴다가 결국 권력의 핵심에서 퇴장당한다. 그후부터 전두환 전대통령 참모의 제 1기준은 충성심이 되었다고 한다.

장세동은 그런 조건에 가장 부합되는 인물이었고 그런 상황때문에 그의 충성심은 한층 더 그 강도가 높아졌을 것이다.

본능에 반(反)하여?

그러나 사람들이 장세동에게 환호를 하는 건 주군에 대한 그의 의리나 충성심이 직업적, 객관적 관계가 종료되었음에도 계속되었기 때문인 듯 싶다. 5공이 끝난 뒤 경호실장이나 안기부장으로서 객관적인 책임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어른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가 기울인 노력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도 많이 남겼다.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 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 "어른을 구속하려 들 경우에는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막을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나는 어른의 뒤를 따라 가겠다" "가만히 있어라. 내가 링에 올라가면 모두가 불행해 진다" "용팔이 사건에는 나 이상의 배후가 없다" "신고합니다, 각하.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에게 의리의 사나이 돌쇠니, 그림자 인생이니 하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97년 한나라당 김덕룡의원의 측근 중 한사람이 부정한 돈을 받아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 사람은 자신의 보스인 김의원의 명예나 위상보다도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변명성 발언을 쏟아 놓아 김의원을 곤경에 빠뜨렸다.

그는 김의원의 고교후배로 야당시절부터 김의원을 따르고 도와줬던 사람이며 당시 김덕룡 대통령만들기 작업에도 참여했던 핵심 참모여서 김의원의 실망감이나 배신감은 더 깊었다고 한다. "전두환을 끝까지 보호한 장세동같은 사람이 한 사람만 있었어도...." 그때 김의원 캠프에서 쏟아진 장탄식이란다.

5공의 경호실장 장세동과 6공의 경호실장 이현우가 동시에 감옥에 간 적이 있었다. 교도소안에서도 장세동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환호하고 이현우가 나타나면 야유를 했다고 한다. 이현우는 자기가 모시던 노 전대통령을 끝까지 비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타인을 먼저 생각해서 자기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장세동의 '본능에 반하는' 한결같은 충성심은 대중을 감동시킨다.

지난 98년 그가 사면 복권되던 날 보도된 저녁 TV 뉴스는 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다.
"오늘 두 전직 대통령과 함께 특별사면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5공의 핵심이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심복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5공 시절의 업이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자 전씨와 함께 몰락의 길을 걸어 세차례나 수감생활을 해야 했던 장씨의 그림자 인생.(중략)

그런 장씨의 그림자 인생은 권부의 핵심에서 물러나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도 계속됐습니다.
이 때문에 배신과 변절이 다반사인 정치판에 식상한 일부 국민들은 무지막지한 군사 독재의 첨병이었던 그를 의리의 화신으로 화제에 올리는 아이러니가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입원해 있던 경희대 병원에서 사면 복권 통보를 받은 장씨는 오늘도 전씨 소식을 더 궁금해 했습니다. 장씨는 앞으로 계획을 묻는 질문에도 '먼저 어른을 찾아뵙고 결정하겠다'며 여전히 전씨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했습니다."
장세동은 어떻게 초지일관 그런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것일까.

강준만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장세동같은 인물은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바꾸어 정당화시키는 일에 거리낌이 없다고 한다. 그는 누가 그런 현실을 비판하면 ‘개새끼’라고 소리치는데, 그 소리는 확신과 신념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 보면 어떨까.

몇가지 물건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은 사람이 오랜 생각 끝에 하나를 선택했다고 가정하자. 선택 후 사람의 반응은 선택 전과는 달라진다. 자기가 선택한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었다고 확신하며,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때론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해 적극적인 선전자로 변하기도 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상표충성도(Brand Loyalty)'는 그런 심리적 이유로 생겨난다.

그런데 자기가 선택한 상품에 대해서 불안감이 큰 사람일수록 선택 후의 합리화 경향이 심해진다고 한다. 혹시 장세동이 지금까지도 ‘전두환’이라는 상표에 지나치게 충성하는 정도도 혹시 그의 내적 불안감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장세동의 의리나 충성심 전체를 깍아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에게 혹시 이런 속마음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는 일조차 금지된 것은 아니잖은가.

"나도 한두번쯤은 내 행동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도 생각이 있고, 똑똑하다면 똑똑한 놈 아닙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전두환에 대한 충성심이나 의리를 계속 외쳐대는 것외 에는 사실 대안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내 의리를 그토록 칭찬해주었는데 이젠 너무 지쳤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아요? 지금 와서 등을 돌려 나에게 득이 될 게 뭐 하나라도 있어야지요. 그러니 참아야지요. 갈 때까지 이대로 가는 수 밖엔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남성판(版) 순결 콤플렉스

그런데 그의 ‘어른’은 늘 전력투구형 충성심에 익숙해 있는 모양이다. 아나운서 김동건씨가 어떤 기자와 인터뷰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전두환 전대통령이 신기합니다. 어떻게 한 인간을 그 많은 사람들이 추종할 수 있을까 하는 점때문이죠. 장세동, 안현태 등 수없이 많잖아요.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전대통령과 함께 식사를 할 기회가 있어 물어봤어요. '장세동, 안현태 이런 분들이 왜 그렇게 충성합니까?'그랬더니 뭐라 대답한줄 아십니까? '그 사람뿐이 아니여. 그런 사람말고도 많아요'라고 웃더군요"

한 순진한 처녀가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를 만났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으로 그 사내는 플레이보이였다. 처녀는 남자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밤새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달콤하게 추억하지만 바람둥이 사내는 그 시간에 또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

순진한 처녀에겐 그 남자가 유일한 대상이지만 플레이보이에게 그 처녀는 여러 여자중 하나일 뿐이다. 장세동은 순진한 처녀일 수도 있다. 딴 남자를 생각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이 순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배,배, 배신이야. 배신'
한동안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유행어다. '넘버3'라는 한국 영화에서 얼치기 두목 조필(송강호)이 졸개들의 절대적인 충성심을 강요하면서 더듬거리던 대사다. 남자들은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것을 죽기보다 두려워 한다. 신의가 없는 남자는 남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10.26때 김재규의 명령 한마디에 대통령 경호원들을 사살하고 거사에 가담했다가 사형을 당한 박선호 당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고백은 충성이나 신의에 집착하는 남자들의 안스러운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수사할 때 수사관이 나보고 바보라고 했다. 김부장을 쏘거나 밀고했으면 되는데 그러지 않아서 이렇게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배신했으면 김부장은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신의가 중요하다. 신의가 없는 상관은 죽은 상관이다"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배신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남자들의 삶의 터전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충성이나 의리에 대한 남자들의 무의식적 집착은 그 뿌리가 놀랄만큼 깊고 집요하다.

천연기념물인 '정이품송'에 대한 민간설화는 ‘충성심’의 원시적 속성을 잘 보여준다. 어느날 세조가 한 마을을 지나는데 소나무가 길게 드리워져 있어서 통행이 불편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순간 소나무가 자기 가지를 스스로 들어 올려서 세조의 가마가 걸리지 않고 잘 지나가게 했단다. 후에 세조는 이 나무의 충성심을 잊지 않고 정이품 벼슬을 하사하였다. ‘전설의 고향’버전으로 해설을 하자면 이런 것이다.

“생명이 없는 미물이라도 간절하게 주군을 향해 충성을 다하면 그렇게 높은 벼슬 자리에 오를 수도 있다는 ‘무조건식 충성’의 아름다운(?) 교훈을, 그 소나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진돗개를 명견으로 꼽는 첫번째 이유도 진돗개의 충성심때문이다. 진돗개는 주인에게 절대 복종하는 성질이 있어 한번 정해진 주인은 몇년이 지나도 잊지 않고, 주인과 한번 맺은 인연은 죽음으로까지 지켜 나간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진돗개에게 경의(?)를 표하기까지 한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사람들이 장세동에 열광하고 호감을 가지는 건 그가 남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배신에 대한 잠재적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는 인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희생? 아니 기생(寄生)

그러나 ‘무조건식’ 충성심으로 무장한 ‘어른 중심의 세계관’은 그의 정상적인 균형감각을 마비시킬 수밖에 없다.

100억원짜리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 건립, 전대통령 사저 주변 공원화계획, 4천만달러짜리 대통령 전용기 도입,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경호규정 신설, 호사스럽다는 비판을 받은 지방 청와대 신설 등은 그가 경호실장 재직 시절에 벌인 일들이다.

그는 그런 일들에 대한 비판이 일자 '어른'을 중심으로한 논리만을 가지고 국민들의 무지를 한탄한다. '소설 전두환'이란 소설에서는 전직 안기부장을 이렇게 묘사한다.
“자신의 주인에게 복종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사람.”

확실히 그는 위에서 밑으로 내리꽂는 하향식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다. 수십년간을 군대라는 조직에서 보낸 것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군인은 명령에 거의 무조건 따르도록 훈련된, 사고방식이 아주 단순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사회를 끌고 나갈 수가 없어요”

12.12사태 와중에 부하들에게 총격을 받았던 정병주 전특전사령관이 군인의 특성에 대해서 한 말이다. 정상적인 사람이 과연 군대라는 특수사회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소설가 구효서는 그의 병영소설에서 그런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서 정상적이라 하는 것은 건강한 사고, 양심적 심성, 비판적 사회인식, 진실된 인간애 같은 것들을 일컫게 될 터인데, 이렇게 말하면 이미 군대 생활 잘하고 제대한 분들 중에서 성질 급하고 피해의식에 젖은 양반들은 대뜸 그럼 나는 비정상이었다 이거지?하고 달겨들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이 아니다. 애써 변명하자면, '비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적'이었다는 얘기다. 비정상과 비정상적인 것은 엄연히 다르다. 울며 겨자먹기, 즉 까라면 (싫더라도)까야지 할때'싫더라도' 라는 감정을 소유할 수 있으면 그는 ‘비정상’이라고 할 수 없고 ‘비정상적’이라 할 수 있다"

장세동의 충성심은 과연 '비정상'인가 아니면 '비정상적'인 것인가. 그도 이제 6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다. 이미 충분한(?)이 어른이 아직도 다른 어른의 삶에 동반된 삶으로만 존재한다면 그건 곤란하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식으로 상대방과의 객관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충성심은 '비정상적'이 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도 불복종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비정상'인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의존심을 상대에 대한 자신의 희생이라고 착각하면서 은근히 댓가를 원하고, 안되면 상처받고,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얼마나 낭비하고 있는가.

기회가 된다면 서두에서 언급한 정신분석가 펄스의 기본사상을 장세동 전안기부장에게 꼭 들려 주고 싶다.

"내 일은 내가 하고 당신 일은 당신이 하는 것. 내가 당신의 기대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당신 또한 나의 기대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것.
당신은 당신, 나는 나, 우연히 서로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
그렇지 못할 땐 어쩔 수 없는 일"

비가 와도 강행합니다

이번에는 개그맨 전유성씨에 대해서 살펴보자.

기자들이 전유성을 인터뷰한 기사를 볼 때마다 생기는 궁금증이 있다. 그에 관한 인터뷰 기사는 모두 '천편일률'적이라 할 만큼 똑같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 지구상에서 처음 듣는 얘기'가 되도록 끊임없이 애쓴다는 전유성의 노력은, 기자들이 쓰는 그의 인터뷰 기사에서는 여지없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취재기자가 남자든, 여자든, 학생기자든 권위있는 잡지의 중견기자든, 그 구성이나 내용은 서로 상대방의 논문을 베낀 대학원생들의 논문처럼 대동소이하다. 토크형식이나 다큐형식으로 그를 다룬 TV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물론 전유성에 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이 글도 그런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에 관한 인터뷰 기사나 프로그램에서 반복되는 레퍼토리나 컨셉트란 대충 이런 것들이다.

개그맨이란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며 가장 썰렁하게 웃기는 동시에 잘 웃지 않는 개그맨이다. 가수 진미령과 야외 결혼식을 올릴 때 썼다는 '비가 와도 강행합니다'는 청첩장 역사상 최고의 명카피로 통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패러디한 '남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유럽여행 견문록의 제목은 청운 초등학교 동창생인 유홍준 교수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삼계탕집 오픈식의 특별이벤트로 닭위령제를 지냈다. 그동안 펴낸 책이 아홉권이며 컴퓨터 관련 책 4권은 도합 100만권이 넘게 팔렸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8개의 TV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다가 하루아침에 중단하고는 지리산에 혼자 들어가 두세달 살다왔다. 올라올 때 지리산에서 서울까지 13일동안 걸어왔다는 등 그의 엉뚱하고 기발한 행동들이 글의 재료다.

이런 인터뷰 기사에 곁들이는 사진들이란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나, 뒤돌아서서 바지춤을 내리고 소변을 보는 모습들이다. 결국 이런 기사들에서 그를 규정하는 키워드는 ‘새로움과 재미남’을 화두로 삼고 살아 가는 ‘자유인’ 전유성이다.

신기한 것은 늘 비슷한 톤의 비슷한 내용이면서도 계속 여성지, 시사지, 주간지, 스포츠신문, 교양지 등과 대학신문, 네티즌을 대상으로 하는 웹진에까지 두루두루 인터뷰 기사가 실린다는 것이다.

코미디언 이주일처럼 늦은 나이에 벼락처럼 데뷔를 한 까닭도 아닐 것이고, 남희석이나 조성모처럼 소위 뜬다는 연예인도 아니고, 한석규처럼 베일에 가려 늘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타도 아닌데 전유성은 그렇게 자주 인터뷰에 등장한다. 그에게 대중이 원하는 상품성이 있다는 하나의 반증일 터이다. 그렇다면 대중이 그에게서 느끼는 매력의 핵심은 무엇일까.

개그맨이 되어버린 철학자

우연히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젊은 네티즌들이 전유성에 대해서 토론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이 전유성의 개그를 비판했다. 너무 썰렁하게 웃기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다. 그런 안쓰러운 모습을 안 보았으면 좋겠다. 웃기는데도 수준이 있는 법이다. 그게 비판의 요지다. 내 관심을 끈 것은 그에 대한 반론을 폈던 한 네티즌의 반응이다.

"글쎄 수준이라기보다는 취향이 다르다고 해야 좀더 옳겠죠? 전 예전엔 전유성씨를 안 좋아 했어요. 나오면 딴데 틀기도 하고 막 욕하고 다니고 그랬거든요. 근데 나이들면서(?) 아니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의 유머가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탁월한 발상은 화려한 달변이나 요상한 몸짓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나를 감탄하게 만들죠. 그는 우리가 원하는 개그맨이나 코메디언의 모습은 아닐 수 있어요. 난 그렇게 많은 것을 머리와 마음에 담아 두고도 늘 그렇게 어눌하고 어색한 모습으로 무대에 서있는 전유성씨가 우습기만 하던데......
어쨌든 전 그가 부럽습니다. 사회생활하면서 그 사람처럼 머리가 팍팍 돌아가고, 아이디어가 넘친다면, 그렇게 부지런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나도....."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20대 남성일 듯 싶은데 그런 나이에 전유성을 좋아한다는 게 의외였고, 또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흥미로웠다. 개그맨으로서도 그렇지만 삶에 관한 포지티브한 전범(典範)으로 전유성을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전유성이란 인물은 무대보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의 삶이 더 매력적이고 얘깃거리가 많은 사람이다. 전유성의 직업을 무엇이라고 하면 좋을까? 그는 주종목(?)인 개그맨 이외에도 연극과 영화 기획자, 카피라이터, 외화번역 후의 대사 윤색 작업도 한다.

한때는 그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대기업 이사라는 직함을 가진 적도 있다. 컴퓨터 길라잡이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등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며 전천후 광고모델이기도 하다. 근자에는 한 대학의 코미디학과장으로 또 벤처기업의 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하루 10분은 자기 직업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자기 자신과 직업에 대한 정체성이 없으면 존재근거가 흔들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인터뷰 기사들은 전유성 개인의 신변잡기에서 시작되는 듯 하지만 결국은 삶의 철학에 대한 얘기로 넘어간다. '개그맨이 되어버린 철학자'란 주철환의 표현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가 20대 때 대마초 사건에 걸려 육 년 반 동안 방송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게 된 적이 있었다. 단역이지만 인기절정인 동양방송의 “쑈쑈쑈”에도 출연하며 자신의 개그를 구사하던 시절이었는데 그 사건으로 그는 한 달 동안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주변에서 걱정 반 농담 반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으나 그는 오히려 한달 동안의 정신병동 생활이 즐거웠노라고 대답했다 한다. 뭔가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 틈에서 뭔가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나친 감은 있지만 전유성답다. 그는 남들과 다른 것, 즉 차별화 전략을 삶의 제 1장 1절로 삼는 사람이다. 그의 아이디어 발상법 6가지 원칙 중 그 첫번째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부터 지워 나갈 것'이다. 그런데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먼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걸 알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무엇인가를 끄집어 내야 하는데 이게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말이다.

언젠가 모대학에서 주최하는 고등학생 대상의 백일장에서 학생들에게 '내일'이란 시제를 주고 글을 써내도록 했단다. 거의 모든 학생이 '내일과 희망',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류의 소재로 비슷한 주제를 담은 글들을 써내 심사위원들이 허탈해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일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것 중에 딴 사람도 생각했음직한 것들을 지워보라. 남는 생각이 있기는 한가.

그런데 전유성이란 사람은 거의 습관적으로 매일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거다. 그는 어릴 때 읽은 '빙점'이라는 소설이 발상의 전환이라는 화두를 자신에게 안겨 주었다고 말한다. 주인공 꼬마가 돈을 잃어 버린 뒤에 "내 돈을 주은 사람은 얼마나 운이 좋을까?"하는 대사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내 것은 없다, 내 의지가 있을 뿐

남들이 하지않고 생각하지 못한 최초의 것을 경험하는 기분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프리미엄은 돈주고도 못산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주인없는 땅에 내 마음대로 깃발을 꽂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전유성식 철학의 중심은 펄스가 말한 ‘자아 의존’이다. 자유의지에 의한 그런 무한대의 경험은 자신의 정체성이나 사물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명확하게 한다.

익히 알려진대로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는 스타일이고 못마땅하다 싶은 일을 당하면 억지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대처한다.

불교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40을 바라 보는 딸이 시집갈 생각을 안한다고 하소연하는 아주머니가 전화를 걸어 "딸에게 시집 좀 가라고 전유성씨가 방송을 통해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이럴 때 대부분의 진행자는 싫어도 참고 부탁을 들어 주게 마련이다.

‘올해는 꼭 결혼해서 어머니 걱정 좀 덜어 드리세요’식의 상투적인 멘트를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전유성은 이렇게 물었다.
"딸이 방송을 듣고 있나요?"
"안 들어요"
"안 듣고 있는데 내가 얘기해봤자 무슨 소용 있어요?"
"그래도 해주세요"
"난 그렇게 못해요. 시집가라고 하는 엄마 말도 안듣는 딸이 개그맨 말 듣고 시집가겠다고 결심한다면 그 여자가 잘못된 거 아니예요?"

방송이 끝나고 항의전화가 빗발쳤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단다. 자기 말이 백번 옳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자식을 아끼는 부모라도 자식의 자유의지는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다.

어떤 아줌마가 전유성에게 다가와 자기 아이가 그를 좋아한다면서 사인을 해달라고 말했다. 아이는 저쪽에 서있고, 엄마가 대신 사인을 받아다 주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부 열심히 해라' 그렇게 써달라고 그에게 주문한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닥치면 그는 완전히 돌아 버린다고 한다. 쌍욕만 안할 뿐이지 거의 두들겨 팰듯이 그 아줌마를 닥달한단다. 부모가 부적절하고 무리하게 자식의 인생을 침범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일에 가장 크게 분노한다. 물론 호불호가 지나쳐 오버를 하는 때도 있다.

그가 선배와 함께 베란다같이 생긴 창문이 있는 어느 카페 앞에 잠시 앉아서 얘기를 하는데 주인 여자가 뛰쳐나와 왜 남의 가게 앞에 앉아 있느냐고 화를 냈다. 선배가 그녀에게 말했다.
"보아하니 장사가 잘 안되는 것 같은데 그게 다 이유가 있는거예요. 이럴 때 '여기 앉아 있는 것보다 안에 들어오시면 좋은 자리가 있는데요'하면 얼마나 좋아요. 당신같이 여기 앉아 있는다고 화를 내는 그런 마음씀씀이때문에 손님이 안오는 겁니다."

전유성은 선배의 말이 너무나 지당하다 싶었고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뒤늦게 흥분한 것이다.
"정말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요? 우리가 손님으로 가도 화를 냈을 거예요? 내일 아침에 유리창이 깨져 있으면 내가 깬 줄 아세요."
그날 밤 그는 정말로 그 카페의 유리창을 깨 버렸단다. 좀 어이가 없을만큼 과격하고 자기중심적이다.

그의 아내 진미령은 솔직히 결혼 전에는 전유성에게서 좋은 점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그 남자를 좋아할 이유가 생겼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굳이 자기 것이라는 이기심을 버리고 함께 공유하고 살아가는 마음으로 자기의 아이디어를 서슴없이 동료나 후배,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점이라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는 주위사람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에 대한 전유성의 답변은 간단 명료하다.

"남들이 나보고 아이디어가 많다고 하지만, 어떤 아이디어가 김형곤에게 맞는다고 생각되면 김형곤 주고, 최양락에게 맞으면 최양락 주고, 그러니까 내 아이디어가 많아 보이는거죠. 다들 자기가 쓸 아이디어만 찾거든요."

전유성만큼 말코같은 떨거지들을 잘 보살피고 돌보는 사람을 일찍이 본적이 없을 정도라는게 대다수 후배들의 얘기다. 한마디로 의리가 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성향때문인지 이규형같은 후배들은 그를 교주로까지 추종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타적이거나 의리가 강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미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고 공언한 사람이 아닌가. 그의 ‘결과적인 나눠주기’는 그가 자신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자신은 주연보다는 조연에 더 어울리고 기타로 쳐도 퍼스트 기타가 아닌 베이스 기타이므로, 주연하려 들다가는 조연도 못하고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전유성이 지금까지 연예계의 막후 실세로, 대부로 의도하지 않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는 순전히 자기를 아는 힘때문일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발 없는 생각은 한 발짝도 못 간다

그의 후배들은 늘 그의 독서량과 여행량, 만나는 사람들의 양(?)에 경악하며 그 부지런함에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그는 연예인 중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이다. 98년 연말에는 교보문고에서 한 해 동안 가장 책을 많이 산 5명 안에 뽑히기도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책이란 것은 가장 값싼 돈으로 가장 안 심심하게 해주는 놀이 기구란다. 책 중에서도 특별히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집'을 가장 많이 읽는다는 그의 실제 삶은 시처럼 함축된 언어와 상징같은 것이 많이 담겨 있다.

그의 삶과 일상의 행동들은 길게 설명되는 산문적인 것이 아니고, 너무나 절제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처럼 앞뒤 연결이 안 되는 듯 보이는 엉뚱함과 변화무쌍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인은 튀는 사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완성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행동없는 자유의지란 공상가의 심심파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전유성은 완전한 '자유인'이라 할만하다. 그는 생각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거침이 없다.

일을 하다가 갈증을 느낀 사람이 있다. 그때 그 사람의 주관심사는 ‘갈증’이고 ‘일’은 부관심사이다. 그러나 물을 마시고 나면 주관심사였던 ‘갈증’은 그에게 배경(背景)이 되어 물러나고 부관심사였던 ‘일’이 그제서야 비로소 주관심사가 되어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주관심사와 부관심사가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며 그 순환이 원활할 때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주관심사로 무언가가 떠올랐는데 그것을 해소시키기 위한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의 삶은 거기서 막혀 버리고 만다.

춤을 배우고 싶어하는 직장인이 있다. 현재 그에게 주관심사는 ‘춤’이고 부관심사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춤을 추게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만 있다. 그러다보면 그의 주관심사는 계속 해결되지 못한 채 배경으로 물러나지 않는다. 그런 한 그의 ‘일’은 항상 부관심사로 쳐져있기때문에 일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늘 생각만 있고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는 일종의 '정신적 변비현상'이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30대 중반 이후에는 신변의 작은 변화에도 장고(長考)를 거듭하게 된다. '정신적인 변비'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만 반복하다가 결국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하면서 '무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며 자위(自慰)하고 만다.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숨기면서.

이런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유성은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철저히 자기 책임하에 두고 과감히 행동에 옮긴다.

전유성이 일이 없이 여기 저기 떠돌던 시절의 일이다. 점심 식사무렵 그가 친구 사무실을 찾았다. 친구와 식사를 하러 나가려던 전유성은 날씨가 너무 덥다면서 바지를 벗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가위로 자신의 바지를 잘라서 반바지로 만들어 입고 나갔다.

그런 식이다. 그는 생각이 들면 주저없이 바로 행동에 옮긴다. 여름에 긴바지를 입고 있다가 가끔 자신의 바지를 반바지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실제로 자르기는 어렵다. 바로 그런 행동력이 전유성에게 거침없는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갈등 속에서 번민하며 망설이고 있을 때 전유성은 질주하는 야생마처럼 앞으로 뛰쳐나가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의 인생을 계속 실험하고, 느끼며 향유하고 있다.

상상이나 꿈, 취미생활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자유를 느껴볼 수는 있다. 취중에 잠깐씩 자유스런 느낌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인생전체에서 자유를 느끼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전유성은 어려서 부터 '구두끈을 맬 때마다 어디론가 가고 싶었던'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다고 자신을 진단한다. 그런데 거기에 덧붙여 그는 감성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결단력의 소유자다. 그는 사람들이 상상속에서나 해봄직한 일들, 취중에 농담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면 즉시 그것을 행동에 옮기고 싶어 하는 행동에너지가 넘쳐나는 사람이다. 자유의지와 행동에너지가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는, ‘머리와 발’을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사람인 것이다.

펄스는 ‘자아 의존’의 삶에서 행동력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정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무의식적 욕구를 거침없이 행동으로 옮기며 사는 전유성에게 부러움과 당혹감과 호기심을 느낀다. 그에게서 내가 펼쳐 보고 싶은 무의식의 세계를 엿보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50대 초반의 전유성이 아직도 그렇게 많은 인터뷰 속에서 일관되게 '자유인'의 이미지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유인이란 ‘자아(自我)의 진도’가 남보다 빠른 사람에 다름아니다.

언제까지 '자유인'을 꿈꾸기만 할 건가?

한 명상가가 수련생들에게 말했다.
“당신의 생명이 1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 그 1개월 동안 당신이 꼭 하고 싶은 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람들은 진지하고도 고통스럽게 때로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의 마지막 소망을 종이에 적었다. 고향으로 내려가 노모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다 생을 마감하겠다는 중년의 남자, 늘 권위적이기만 한 자기 보스에게 눈을 부라려 보겠다는 소심한 샐러리맨, 자신의 전재산을 정리해 카리브해의 호화유람선을 타보겠다는 20대 처녀, 자신의 장기를 이식하겠다는 청년, 내가 사랑하던 모든 사람의 발을 정성껏 씻어 주겠다는 주부.

명상가가 그들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소망을 왜 지금 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는 겁니까?”
당신의 자유의지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 자유의지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게 막고있는 장애요인은 또 무엇인가. 그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절반의 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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