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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vs 정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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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592회 작성일 10-11-21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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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혼란

백지수표와 관련된 일화를 들을 때마다 생겨나는 의문이 하나 있다. 백지수표를 건네받은 사람은 도대체 얼마의 금액을 적어 넣었을까 하는 궁금함이다. 1000만원을 적으면서 망설이는 사람도 있었을테고 자신있게 10억원의 금액을 써넣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상황이나 일의 종류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금액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수표를 건네받은 당사자의 '자기 인지상'일 것이다. '자기인지상'이란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총합같은 것이다.

돈이 생기면 삼겹살을 사먹곤 하던 가난한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는 꽃등심을 먹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생겼지만 그 돈으로 삼겹살을 2배 시켜 ‘마음껏’ 구워먹는 것으로 대신한다. 자기가 부자라는 새로운 자기인식이 생기기 전까지, 그의 '자기 인지상'은 아직 가난하던 시절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자의식(self-awareness)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자의식이 명확하지 않을 때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기정체성(identity)의 혼란을 겪는다.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것은 '정신적 에이즈(AIDS)' 상태와 같다. 우리의 육체는 외부의 공격이 있을 경우 거의 자동적으로 침입자를 퇴치하는 방어시스템인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다.

장기이식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수술 후 다량의 면역억제제를 투여하는 것은 몸안의 면역체계를 의도적으로 무력화시켜 이식된 장기를 이물질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교란행위인 셈이다. 우리몸의 면역체계란 그만큼 본능적이고 강력하다.

그런데 에이즈는 우리 몸안의 면역체계가 작동하지 않아 사소한 감염에도 아무 저항을 하지 못해 결국 목숨을 잃게 만드는 무서운 병이다. 그렇게 본다면 '정신적 에이즈'는 일종의 정신적인 사형선고다.

정신적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확고한 자기정체성 확립이다. 상투적이고 상식적인 말이지만 '자기정체성'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김우중 전대우그룹 회장과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은 우리에게 '자기정체성'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인물들이다.

먼저 김우중 전회장에 대해서 살펴보자.

몰락한 신화

올해 2월 ‘자본가의 잘못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김우중 체포결사대’가 프랑스로 떠났다. 보도를 통해 그 광경을 접한 사람들은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우중이 누구인가.

‘세계경영의 전도사’, ‘재계서열 2위의 재벌총수’, ‘한국 최고의 비즈니스맨’이라고 불리던 사람이다. 한국 경제인 중 그만큼 해외에 널리 알려지고 또 해외에서 펀딩이 가능했던 인물도 없었다고 평가받았던 사람이다.

1967년 서울 충무로 뒷골목의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자본금 500만원에 5명의 직원으로 출발한지 30년만에 정말 ‘꿈’같은 대우신화를 창조한 사람이다. 대우는IMF직전까지만 해도 고용인원 32만(국내 10만, 해외 22만)명, 해외지사․현지법인․연구소․건설현장 등 글로벌 네트워크 590개(110개국), 총매출 71조원, 총수출 151억달러라는 경이로운 실적을 쌓아왔던 기업이었다. 그 기업의 총수가 바로 김우중이었다.

그는 한때 많은 젊은이들과 샐러리맨들의 살아있는 신화이자 우상이었으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화두로 세인의 찬사와 이목을 집중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는 ‘세계는 넓고 숨을 곳은 많다’는 식의 조롱을 받으며 도피자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더구나 체포결사대의 목적지 프랑스는 96년 김우중에게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등급의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여한 나라다. 세상사가 허무하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의 행태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건의 당사자인 김우중은 오죽하겠는가. 그는 나라전체의 경제위기를 김우중 일개인에게 전가하는 국민적 비난에 대해 강한 분노, 배신감과 허탈함을 느끼고 있다고 전해진다.

"나를 도대체 어디까지 몰아붙일 생각들인가. 내가 그토록 파렴치한 도둑놈, 사기꾼이라면 나를 믿고 같이 일해온 20만명이 넘었던 과거 대우직원들은 도둑놈의 부하들인가. 국민에게는 더없이 송구하지만 이런 분위기속에서 내가 어떻게 속죄하며 무엇을 해명하겠는가“
그의 이런 얘기에 반발심이 생기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만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은 김우중에 대한 무차별한 돌팔매질에 나도 한몫 거들고 나서는 꼴이 되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이다. 김우중의 오랜 친구이자 고문 변호사였던 석진강씨의 지적은 가슴에 와닿는다.

“일반적으로 실패의 원인을 찾는 것은 아주 쉬워요. 어떤 의견이 제시되었을 때 부정적으로 비판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건 실패한 다음에 이유를 갖다 붙인거지, 그것이 꼭 원인이 되었다고 보지 않는 것이 건전할 것 같습니다.”

백 번 공감한다. 매독이라는 성병을 정신과 의사가 치료하던 시절이 있었다. 매독에 감염되면 ‘스피로헤타 팔리다’라는 나선균이 뇌신경을 건드려 정신질환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항생제 한 대면 치료가 될 환자를 앞에 놓고 어린 시절부터의 기억을 말하게 하며 정신분석치료를 한 것이다. 드러난 결과만을 보고 그 원인을 유추할 때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 김우중’의 특질을 살펴 보는 일에도 그 교훈은 여전히 요긴할 것이다.

다행히 이 글은 내가 1995년 대우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이틀 간의 워크숍을 진행할 때 적어놓은 메모를 기초로 한 것이다. ‘세계경영’이 한창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시기였는데 본의아니게 지금의 김우중과 대우그룹의 처지를 예견한 내용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당시 대우그룹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김우중회장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정도로만 여겼다. 예측능력을 자랑하자는 게 아니라 지금의 김우중을 보고 실패원인을 갖다 붙이는 것도, 대항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손쉬운 돌팔매질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내 나름의 변명정도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조증 무드의 증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우중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국내 자서전 시장의 판도를 연 책으로 평가받는다. 89,90년 모두 150만부 이상 팔리며 두 해 연속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1위의 기록을 세웠으니 그럴만도 하다. 김우중식 사고방식을 성공적 삶의 한 전형으로 받아 들이던 시기였다.

그런데 내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자서전의 제목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한글제목도 그렇지만 영문 번역판의 제목은 더 그렇다.

“Every street is Paved with Gold“ (모든 길은 금으로 포장돼 있다.) ‘한국 최고의 세일즈맨’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가 걸어온 모든 길은 노다지판으로 연결됐다는 평가에 안성맞춤인 제목이지만 동시에 김우중의 인간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제목이기도 하다.

정신의학적으로 볼 때 김우중의 일생은 조증무드(manic mood)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조증(躁症)은 충동을 동반하는 흥분상태, 활동과다 등을 보인다. 우울증과 반대인 증상이다.

어떤 한가지에 심취해 있거나 열광적 성향을 가진 ‘--狂’을 ‘매니아’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바로 조증의 영문 진단명 ‘매니아(mania)'와 같다. 조증이라는 의학적인 표현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매니아‘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하지만 광적인 집착, 열정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조증 무드에 있는 사람은 늘 자신감에 넘치고 매사를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본다. 기분이 좋고 늘 들떠있다. 할말도 많고 아이디어도 넘친다. 자는 시간이 아까워서 잠을 적게 자는데도 불구하고 기운은 솟는다. 자연히 일을 자꾸 벌린다. 그들은 늘 확신에 차있어서 일을 쉽게 시작한다. 한번 시작하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한다. 두려움도 없다.

얼핏 ‘그런 것이 병이라면 나도 한번 걸려보고 싶다’고 할만큼 매력적이지만 그건 독버섯의 색깔이 유난히 매혹적인 것과 같다. 더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그들의 지나친 낙천성은 나중에 발생할지도 모를 문제에 대한 대비를 불필요한 것으로 느껴지게 한다. 조증의 끝이 예외없이 남루하고 허망한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주변에서도 조증무드 때 사업을 확장하고, 지나친 투자를 했던 사람이 조증무드가 가라앉은 다음에 후회하며 그것을 감당하느라 고통을 당하는 경우를 간혹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증의 가장 큰 문제는 발이 땅에서 붕 뜬 상태에서 자기자신에게 주의(attenion)를 집중하지 않고 에너지가 외부로만 향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부풀어져 있고 고양되어 있다.

자연히 자기정체성을 의식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고 설사 의식한다 해도 부평초처럼 뿌리가 없는 정체성이다. 실제로 김우중에게 나타나는 조증무드의 특징들을 한번 살펴보자.

현실부정을 연료로 하는 '인간탱크'

첫째는 팽창된 자신감, 또는 과대망상적 사고이다.

그가 자서전에서 언급한 ‘도사론’은 조증무드의 이같은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100미터 높이의 산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도사가 있다. 그도 처음에는 우리처럼 1미터 밖에 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100미터의 산을 뛰어 넘을 목표를 세우고 날마다 조금씩 장대의 높이를 높여가며 높이뛰기 연습을 했을 것이다. 사람의 능력은 무한하다. 요는 그 잠재된 능력을 끄집어 내어 사용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도사와 범인의 차이도 따지고 보면 거기서 생긴다. 겸연쩍은 얘기지만 나의 별명이 ‘도사’다.”

너무 황당해서 듣는 사람도 겸연쩍다. 무협지를 보면 초인적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남자들의 본능적인 ‘자아팽창’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무협지다.

그래서 첨단 테크놀러지가 그물망처럼 깔린 정보통신시대에도 남자들은 원시적인 칼을 휘두르는 무협지에 열광하는 것이다. 김우중도 홍콩 무협영화의 열렬한 팬이었다.

IMF로 인해 금리가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많은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을 무렵 김종필 국무총리가 폴란드 대우지사를 들렀다. 김우중은 여기서 “수출을 최대한 늘려 금년(98년)과 내년에 연속으로 5백억달러 이상 무역흑자를 내면 99년말이면 IMF를 무난히 극복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사태의 심각성을 “그까짓 수출로 갚으면 되지”라며 특유의 낙관론으로 덮어 버린 것이다.

한 대학교수는 이런 김우중의 성향을 ‘영웅본능’이라고 표현한다.
“대우가 실패하게 된 내부원인은 팽창욕구나 질주본능이 기업체질화된 데 있다. 조절이 안되는거다. 이것을 좋게 표현하면 ‘영웅본능’이다.”

김우중의 ‘영웅본능’은 대우가 무너지기 직전인 99년 8월 전경련주최 제주도 세미나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전경련 회장이었던 김우중은 대기업이 구조조정을 하면 실업자가 너무 늘어나 나라가 흔들린다면서 정리해고는 호황 때 하는 것이지 불황 때 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구조조정이 시대의 흐름이었던 당시로는 상당히 도발적인 異說이 아닐 수 없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기에임에도 조금도 굴하지않고 전진하는 인간탱크를 보는 듯하지만 또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건 현실을 부정하는 조증적 행동이기도 하다. 조증무드에 빠진 사람은 현실을 直視하지 못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현실에서 크나큰 좌절과 실망, 열등감에 휩싸일 때 무기력해지면서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현실을 직면하게 됐을 때의 좌절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심약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 현실이 주는 좌절과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클 때, 사람은 자신의 절망이나 무기력감을 완전히 부정(否定)하고 오히려 그 정반대의 감정상태를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조증이다.

정신의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현실을 부정하며 조증에 빠지는 사람은, 절망스러운 현실에 좌절하며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보다, 심리적으로 더 약한 사람이다.

좌절의 삶을 ‘환희의 삶’으로 환치하는 것이 차라리 좋은 방법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질구질하게 우울에 빠져있느니보다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조증의 현상은 기쁨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라기 보다 좌절된 자존감을 보상하려는 병적인 시도의 파생물이기때문에 궁극적으로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조증은 현실을 부정하는 바탕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반이 실로 위태로운 것이다.

전경련 손병두회장은 김우중의 현실감각에 대해서 “김회장은 무엇이든 쉽게 생각했어요. 이런 천품으로 인해 성공했고 나중에는 실패했는지 모르지요”라고 말한다.

김우중은 모든 걸 직접 확인하고 챙기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세미나를 할 때 탁자와 의자의 배열까지 일일이 따질만큼 꼼꼼한 사람이라서 ‘과장급 회장’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꼼꼼함은 ‘워낙 본인이 뛰어나니까 아랫사람이 일하는 게 마음에 안들어서’ 가지게 되는 팽창된 자신감의 한 표현이다.

김우중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곧잘 환경을 강조한다고 한다. ‘압축성장’을 외치는 권력과의 교묘한 결탁이 대우의 신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환경이 좋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게 김우중 옹호론자들의 얘기다.

실제로 김우중의 ‘환경친화력’(?)은 ‘지나칠만큼’ 뛰어나다. 1980년대 초반 신군부 시절,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당시 ‘전재산 사회환원’ 발언 등 여론과 신군부의 압력을 의식한 김우중의 ‘튀는 행동’에 대해 무척 불쾌해 했다고 한다.

그때의 일과 관련하여 김우중은 95년 노태우 비자금사건 공판 때 법정에서 ‘권력자가 무서워 돈을 뺏겼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권력자인 사람들의 얘기는 또 다르다. 80년 신군부가 권력을 접수할 당시, 제일 발빠르게 새로운 권력자들을 찾아온 것이 김우중 부부였다는 것이다.

대우의 구조조정 본부에서 근무했던 한 임원의 말은 김우중의 대단한 자신감과 위태로운 현실감각을 잘 보여준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김회장은 자신감에 넘쳐 수십년 동안 혼자서 수십개의 접시를 동시에 돌리는 묘기를 부렸어요. 그러나 IMF사태라는 태풍이 불어닥치자 이 접시들은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속도전의 황제, "킴기즈칸"

조증무드의 두 번째 특징은 생각과 말, 행동의 속도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한 기자는 김우중과 대화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김회장의 말은 말보다 생각이 앞선다. 그래서 한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문장이 시작되는 까닭에 말이 겹쳐 나오는 경우가 많다.”

조증무드의 특징적 현상이다. 아이디어가 넘치다보니 말이 그 아이디어를 담아내기에도 바쁘게 된다. 이때는 말을 한다기 보다 ‘말이 밀려나오는(pressure of speech)’ 형국이 된다.

김우중은 잠을 네 시간이상 자지않고, 식사를 해도 가장 빨리 나오고, 빨리 먹을수 있다는 이유로 항상 설렁탕과 비빔밥만 시켜 먹었다. 낮동안에도 30분마다 사람을 바꿔 만날만큼 바쁘게 움직여서, 체력좋고 기력이 왕성한 총각만을 수행비서로 쓰는데도 그들의 체력이 달려서 1-2년단위로 비서가 바뀌었다고 한다.

해외 출장시 큰 여행용 가방은 짐찾을 때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무더위와 추위가 교차하는 한달간의 해외 출장에도 양복 2벌, 와이셔츠 2벌, 양말 2켤레만을 손가방에 들고 가며, 걸을 때도 뛰듯이 다녔단다.

세계경영을 주창한 93년 이후에는 사흘 중 이틀을 해외에서 보냈는데 한 해의 비행거리만도 56만km가 넘었다니 가히 공간이동을 연상케 하는 속도감이다.
한 경영학과 교수는 대우의 세계경영 현장을 두루 다녀본 후 “김회장은 한마디로 콜럼부스같았다. 신대륙을 개척한거다”라고 말했다. 김우중은 한 교수에게 ”당신네 학자들은 이론을 연구하지만 나는 이론을 만든다“라고 말한 적도 있을만큼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대단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김우중이라는 한 개인에게 의존했던 대우그룹은 우수한 인력이 많았지만 시스템이 부재했던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400개가 넘는 해외 현지법인을 구축했지만 기술력과 제품의 수준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해 김우중은 평소 “죽기 전에 세계 1위 제품을 만드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속도(量)가 내용(質)을 너무 앞질러서 생긴 현상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동아일보 김화성 기자가 쓴 ‘기동성’에 관련된 글을 잠시 살펴보자.

“칭기스칸의 몽골군이 세계를 정복한 것은 기동성때문이었다. 속도전에서 이겼기 때문에 자기들보다 수백 배나 큰 세력을 지배할 수 있었다. 칭기스칸이 대제국을 건설했을 때 몽골인구는 고작 100만명. 이 중 칭기스칸의 기마군단은 20만명. 칭기스칸은 이들만 갖고 1억여 명을 지배했다.”

그러나 칭기스칸의 위성제국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정복한 이민족을 몽골인으로 동화시키는 현지화를 병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 정복 속도가 빨라서 시스템이 뒤따르지 못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유럽인들은 김우중을 “킴기즈칸”이라고 불렀단다. 아시아인이 유럽을 공략한 것은 13세기 칭기즈칸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며 김우중을 칭기즈칸에 비유한 것이다. 칭기즈칸이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군단을 주력삼아 영토를 확장했듯이 김우중은 칭기즈칸 전략의 핵심인 ‘기동성을 상품화했다‘는 것이다.

김우중의 속도감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대우그룹의 경이적인 성장사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김우중이 ‘대우실업 주식회사’를 창업한지 10년만인 1977년에 자본금 500만원은 560억으로 1만 2000배, 수출은 58만불에서 3억 2000만불로 550배, 매출액은 2억원에서 2200억원으로 1100배, 순이익도 400만원에서 140억원으로 3500배, 종업원은 5명에서 3만 5000명으로 7000배가 늘어나는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스피드를 앞세운 김우중식 영토확장의 시작이었다.

좌절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김우중과 짝지워 연상되는 그의 ’일중독증‘이라는 것도 실상은 조증무드의 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일중독은 생각과 행동의 속도증가가 빚어낸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일중독자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에 끌려가는 사람이다. ’이 정도 일하지 않고 이렇게 힘든 경쟁사회에서 어떻게 살아 남느냐‘는 게 일중독자들의 항변이지만, 그들은 사실 필요에 의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이 없으면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지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실제로 대우 설립 뒤 그가 휴가를 간 것은 90년 장남의 사망시 두문불출했던 1주일 뿐이었고, 온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은 김우중의 생일과 모친 기일 뿐이었다고 한다. 김우중은 자신의 일중독증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도대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일을 벌리는 편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무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우중의 해외출장에 한 달간 동행했던 소설가 최인호의 말은 더 구체적이다.

“김 회장의 스케줄 중간에 5분이라도 틈이 생기면 비서가 저에게 와서 시간을 메워 달라고 부탁을 해요. 김회장은 쉬고 있을 때 완전히 무기력한 사람처럼 보이고 안절부절 못합니다.”

그러나 일을 하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안정을 되찾는다. 마치 술이 떨어지면 금단증상으로 손을 떠는 알콜중독자가 술 한모금에 떨리던 손이 안정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실하게 일에만 몰두하는 경영자의 표상을 보여준 것이 김우중의 빛이라면 일중독증이라는 병리현상을 사회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드는 데 일조를 한 것이 그의 그림자다.

소설가 이문열은 김우중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김회장은 자고먹는 시간을 아까워할 정도로 사업에만 몰두한 중독자였다. 비록 경영상 잘못을 했더라도 개인적 치부를 위해 사기를 저지른 파렴치범으로 보지는 않는다.”

한 대우맨이 김우중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비슷한 맥락이다.
“나는 그를 실패한 경영자가 아니라 어떠한 여건과 환경속에서도 소신과 집념을 꺽지않은 ‘위대한 사상범’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일을 제외하고 김우중의 유일한 취미는 바둑이었다. 그와 10여차례 바둑을 두어본 서능욱 9단은 “김회장의 바둑은 공격적이며 기력에 비해 대세관이 좋고 전투에 강하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아 실수가 많고 가끔 황당무계한 수를 둔다”고 평했다.

결과적으로 김우중은 실패했다. 실패해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이제 한국 경제사에서 하나의 ‘전설’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김우중이 대우직원 모두에게 보낸 작별의 인사를 들으면서 이 글을 끝맺자. 그의 마지막 작별인사는 회한과 허무로 얼룩진다.

“여러분과 함께 했던 꿈과 이상 또한 이제 가눌 수 없는 고독이 돼 제 여생의 반려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뜬구름이 된 제 여생동안 그 모든 것을 면류관으로 삼아 온몸으로 아프게 느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중략) 제가 기억속에 묻히는 이 순간을 계기로 대우와 임직원 여러분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김우중은 작별서한에서 자신의 여생이 뜬구름처럼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성취하고 전진하지 않는다고 실패한 삶은 아닐 것이다. 김우중은 그동안 너무 많이 이룩했고 너무 빨리 나아갔다.

자기의 뒤뚱거리는 모습을 대면하지 않고 낙관주의로 일관하는 사람은 정신적 복통으로 결국에는 좌초한다. 때로는 좌절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한때 많은 사람들의 꿈과 전설과 신화가 되기도 했던 ‘경제 거인’답게 마지막까지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모양이 예쁜 정치인

이번에는 정동영 최고위원에 대해서 살펴보자.
정동영은 ‘본능적 울림’이 많은 사람이다. 무슨 말인가.

사람들이 정동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거의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호감이 가는 정치인, 가장 이미지가 좋은 정치인을 꼽으라면 거의 예외없이 상위권에 랭크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정동영이다.

일부에선 그의 앵커전력이 호감도를 높이는 것이라며 그의 이미지에는 거품이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앵커 출신 국회의원들이 유난히 많았던 15,16대 국회에서 집권당 최고위원에 선출될 정도로 정치적 입지를 굳힌 것은 사실상 정동영이 유일하다는 게 정치평론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96년 그가 정계에 입문할 때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직접 정동영을 기자실에 데리고 내려가서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는데 크게 기여할 인물‘이라고 소개 했단다. 뉴스앵커 시절에 ‘정동영 앵커가 마이크를 잡으면 진실을 말하는 것 같다’고 표현한 한 신문 기사도 비슷한 맥락이다.

16대 총선 때는 전국 각지의 민주당 후보들이 ‘정동영을 지원연사로 보내달라’고 아우성을 칠 정도로, 이른바 정치판에서 ’오빠부대‘를 거느리고 있는 몇 안되는 현역의원이란다. 그의 긍정적 이미지는 그만큼 파괴적이고 무차별적이다.

인지도가 곧 호감도는 아니라는 상식적인 판단기준으로 보자면 그의 경우는 참 희귀한 케이스다. 이화여대 주철환교수는 PD의 시각으로 볼 때 그가 ‘썩 괜찮은 상품’이라고 말한다.
‘한 인간의 내용물(의지)과 형식(태도)이 긴밀히 융합되어 하나의 통일성을 갖추게 된 예사롭지 않은 사례’라고까지 평가한다.

소설가 양귀자씨는 정동영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압축해서 이렇게 표현한다. “그가 20년 가깝게 방송인으로 살아오면서 우리에게 남긴 이미지는 섬세하고 진지하며 또한 신뢰가 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난 8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그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자 한 시사주간지 기자는 조금 유난스럽다할만큼 그러나 일면 수긍이 갈 수밖에 없는 현실상황을 기사에 담는다.

“그야말로 황금같은 기회를 잡았다. 그 학력(서울대 국사학과), 그 나이(47세), 그 언변(민주당 대변인 역임), 그 자질(문화방송 앵커출신)에 최고위원까지 달았으니, 그것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을 탄 첫 최고위원이라는 점에서 ‘큰 꿈’을 꾸는데 두고두고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정동영의 ‘큰 꿈’이나 ‘정치적 성향’이 어떠한지를 살펴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직업상 별수없이 정치적 소재가 등장할 수밖에 없지만, 도대체 정동영 이미지의 어떤 면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신뢰를 주는 지 그걸 살펴 보자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떻게 해서 그런 호감도(good image)가 형성될 수 있는지 그 까닭을 알아 보자는 것이다.

살다보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고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좋게 보이고 싶은 건 인간이 가진 일종의 본능이다.

정동영이란 인물의 스타일이나 개인적 성향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경이적인 호감도를 누구나 부러워 하는 건 그런 잠재의식의 한 표현일 것이다.

한 기자는 정동영을 가리켜 ‘모양이 예쁜’ 정치인이라고 말한다. 깨끗한 용모와 세련미, 정확하고 설득력있는 화법, 왠지 내면이 따뜻할 것같은 느낌 등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인 듯 하다.

정동영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손해보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정치적 자산이나 능력보다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만 우세하면 정치를 업으로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손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혼신의 힘을 기울여 연기를 해도 연기파라는 말보다 ‘얼굴로 민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장동건의 ‘미남 콤플렉스’와 비슷하다고 할까.

그러나 아무리 이미지라는 것이 실체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고 해도 전혀 연관이 없을 수는 없다. 99년 정동영은 한 대학의 초청강연에서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얘기를 하며 이미지와 실체의 연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비판합니다만, 그러나 이미지 정치의 위험성, 함정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라는 것이 알맹이와 전혀 동떨어진 상태에서 다른 이미지로 만들어 지는 것은 또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미지 뒤에 당연히 있어야 할 알맹이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신뢰와 정직성, 인간미가 구비되지 않으면 금방 허상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정동영 자신의 이미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18년의 방송생활, 6년의 정치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실체와 관계없이 그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 정동영의 실체는 무엇일까.

공명(孔明)도 뿌리치지 못 할 겸손

정동영은 지나칠만큼 인간적 겸손함이 몸에 배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지난 최고위원 경선에서 정동영은 패기넘치지만 결코 건방져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소장파 후보들과는 달리 보수적 노장층 대의원의 거부감이 적었단다.

나는 지난 여름 우연하게 공항에서 정동영을 본 적이 있다. 배웅을 나온 사람은 젊은 보좌관인 듯 했는데 배웅자가 인사를 하자 정동영도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TV에서 본 것처럼 몸을 반쯤 돌린 상태에서 한쪽 손을 드는 정치인 특유의 행동을 예상했던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어떤 기자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 밀알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정동영의 말을 ‘고정 레퍼토리’라고까지 표현한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다. 전략적 차원에서 하는 겸양의 수사(修辭)라고만 보기에는 너무 무의식적이고 초지일관하기 때문이다.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후 대권에 관련된 질문을 받자 그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거론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지만 아직 채워지지 않았고, 정신적으로도 아마추어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좋은 정치인이 되는 길인지를 찾아 빈부분을 채워 나갈 것이다.”

늘 그런식의 대답이 주조를 이루자 한 기자는 그래도 정치인인데 어떻게 그토록 한가하고 인간적인 소리만 하느냐고 따져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한 가지다.

“이 자리 자체가 과분하다. 정치인에게는 기본적으로 권력의지가 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지만 스스로에게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개인의 한계는 명확하다. 뜻을 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으나 욕심을 내면 불행해 진다고 생각한다. 항상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생각한다.”

한 두 번 정도는 정치인다운 욕심을 드러내는 발언을 할법도 한데 아무리 눈을 씻고 지난 6년 간의 인터뷰 내용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다 비슷한 내용들이다. 하기사 96년 그의 정계입문 첫 선거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될 때부터 그랬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기쁨보다 어깨가 무겁고 과연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선거였다. 항상 물러날 때를 생각하는 자세로 의정활동에 임하겠다.”
첫 번째 당선소감에서 물러날 때를 생각한다니, 정치인이 이래도 되는걸까 하는 의문까지 생겨날 정도다.

그는 최고위원 경선 당시 열렸던 개편대회에도 가장 먼저 와서 가장 늦게 가는 사람이었단다. 당선된 후에는 최고위원들 간에 자리배치 문제로 설왕설래가 있자 경선에서 5위를 차지했음에도 7위를 차지한 정대철 최고위원에게 얼른 자리를 양보했다.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간유형은 아니지만 얼핏 그가 가장 감명깊게 읽었다는 ‘삼국지’의 유비가 연상된다. 유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겸손과 厚德은 때와 장소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유비의 삼고초려에 결국 유비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한 공명은 큰 한숨을 내쉬며 탄식을 한다.

“아아, 그대에게 天命이 없는줄 알면서도 그대의 뿌리칠 수 없는 인품때문에 나 공명은 그대를 따라 나서는구려.”
의도적이지 않은 이런 ‘타고난’ 혹은 ‘몸에 배인’ 겸손에는 당할 장사가 없다.

왕따를 당해도 내지를 건 내지른다

지난해 12월초 소위 ‘권노갑 파동’이후 한동안 정동영은 정치적 화제의 중심인물이었다. 정동영 자신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 조차 불편해 하는 듯 하지만, 그 과정과 파장을 찬찬히 관찰해 보면 정동영이란 인물의 또다른 성향이 잘 드러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다. 대통령과 집권당 최고위원들의 청와대 간담회 도중 정동영이 대통령앞에서 ‘국민의 눈엔 우리 당 권최고위원이 YS정권 때의 김현철처럼 투영되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것이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정동영에게 박수를 보냈고 권최고위원은 얼마후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더 보태고 뺄 것도 없이 그게 전부다. 그 와중에 당내에서는 자신을 정계입문시키고 뒷받침해준 ‘어른’을 내친 그에 대해 ‘배은망덕하다’거나 ‘손봐주겠다’는 말들이 나왔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일반국민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정동영은 그 사건이후 당내에서 철저하게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권노갑 파동’이후 4개월이나 지난 시점인 올해 3월말 권노갑 전최고위원이 갑작스럽게 공개적인 사과요구를 한 게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 4월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은 동교동 실세인 권최고위원의 퇴진을 대통령께 건의한 이후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공개적인 발언을 한다. 여당에 대한 정치공세의 적절한 소재로 사용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그만큼 공개적인 왕따가 이루어졌다는 한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와 관련된 5월초 한 중앙일간지의 만평도 예사롭지는 않다. 정대철 최고위원이 경찰청장을 감싸안고 있는 대통령을 향해 “짜르세요”하고 소리치자 등에 ‘왕따 정동영’이라고 쓰여진 사람이 머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숙인 채 “‘정선배’도 내 짝 났다”고 혼잣말을 한다. 그 만평의 제목은 ‘직언 2탄’이다.

또 올해 6월초 정동영이 중심인물로 부각된 소장파 의원들의 정풍운동도 비슷한 맥락의 사건이다. 그 사건들에 대한 정치적인 의미나 해석은 각자의 판단에 맡기자. 그보다 궁금한 것은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한 것 같은 정동영이 어떻게 해서 그런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밖에서는 새로운 ‘정치적 스타’가 탄생했다고 환호했지만 안에서는 철저하게 소외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정동영은 그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견했던 것일까 아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그 어느 쪽이었든 정동영은 결국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른 계산된 발언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정치적 발언을 옹호하거나 폄하하자는 게 아니고, 그는 이런 경우 뒷일 생각않고 ‘내질러’ 버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내가 말한 ‘본능적 울림’같은 것이다. 갸날픈 외모와 달리 정치적 파괴력이 만만치않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그런 성향에서 기인한다.

정신분석적으로 정동영같은 유형의 사람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상적’인 것에 대한 열정과 집착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사자는 그것을 ‘이상적’인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다.

일상적인 일에는 지나칠 만큼 관대하고 개방적이지만 자신의 내면적 가치, 내적 신의가 위협을 당하면 곁에서 보는 사람이 섬뜩할 만큼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정동영은 10월 유신이 선포된 1972년에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했다. 72학번 동기생들의 징역형을 다 합하면 1백년이 넘는다는 말이 나올만큼 투옥과 수배가 반복되는 시절이었다.

정동영도 73년 유신반대 첫 학생시위로 기록되는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데모에 참가했다가 감옥생활을 했고, 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3개월 간 복역한 후, 출감하자마자 ‘특수학적 변동자’가 되어 군에 강제징집되었다.

군대에서도 그의 ‘폭발적인 내지름’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군복무 중 그는 예전의 사건에 연루되어 보안사로 연행된 뒤 열흘 동안 두들겨 맞은 후 ‘공포의 열흘’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자대로 복귀한다.

그런데 내무반 고참은 자기에게 말도없이 윗사람에게만 보고를 하고 휴가를 다녀온 줄 알고 정동영과 내무반 동료들에게 전체기합을 주었다. 여기서 부터는 정동영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보자.

“엉덩이가 불이 나면서 전체 내무반에는 신음소리가 낭자했다. ‘나쁜 놈들. 잘못했으면 나만 팰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왜 괴롭혀!’ 이런 생각이 든 순간 내 눈에 불이 붙었다. 벌떡 일어나 침상의 곡괭이를 들었다. ‘다 집어 치워!’ 일순간 관물대에 일사불란하게 정리해둔 소총과 수통, 철모, 군복이 하늘로 튕겨지면서 내무반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내 정신이 아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사건은 내무반 내부의 일로 무마되었지만, 그 사건이후 정동영은 고참들에게 찍혀 왕따를 당했단다.

최고위원 경선과정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에피소드도 정동영의 이런 성향을 잘 보여준다. 처음에 그가 내세운 메시지는 특유의 겸손함을 앞세운 ‘노장청 통합론’이었다. 노장 일색이 아니라 청년도 한 자리쯤 끼어 넣어달라는 수세적 메시지였다.

그러나 지방 개편대회에서 지구당 위원장들의 좌절감과 분노하는 바닥민심을 절절이 전해들은 정동영은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이미 교정지까지 나와있는 자신의 홍보전단을 전면적으로 뜯어 고친다.

‘확 바꿔놓겠습니다’라는 공격적 메시지에다 더 나아가 ‘혁명적으로’ ‘뒤집어 놓겠다’는 초강경 어구를 동원했다. ‘나를 당선시키면 당을 확 뒤집어 엎어 버리겠다’고 한 것이다.

많은 당직자들로부터 지나치다는 비난의 소리를 들었지만 정동영은 대의원 35%의 지지를 얻어 5위로 최고위원에 당선된다. 아무런 당내 조직도 없던 정동영이 최고위원에 선출된 것은 이러한 자신의 심경을 듣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할 줄 아는 빼어난 연설솜씨 덕분이었다.

테크닉을 넘어선 공감력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정동영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 것은 폭발적인 연설능력이다. 기승전결이 있고 고저장단이 뚜렷한 그의 연설은 특유의 정확한 발음과 힘있는 제스처, 청중의 감정상태에 부응하는 탁월한 조어력, 감성적 목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상 가장 ‘선동성이 뛰어난’ 대중연설가 중의 하나는 히틀러다. 한 역사학자는 ‘히틀러에겐 자신의 개인적 좌절감을 독일 국민 전체가 겪는 고통인 양 표현하는 재능이 있었다‘고 말한다.

갑자기 히틀러 얘기를 하는 건 정동영이 스스로에 대해 ‘선동성만 강한 정치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이따끔씩 갖는 듯 하기 때문이다. 그 의구심에 대한 해답의 일부는 정동영 자신이 이미 밝힌 바 있다.

“최고위원 선거기간 중에 제 연설솜씨가 화제가 됐는데 말솜씨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메시지가 중요했다고 봅니다.”
아직도 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의 정동영 기자를 인상깊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새벽까지 참담한 표정으로 보도하던 모습이 공감이 갔다’는 격려전화를 많이 받았다는데, 그에 대한 정동영의 말을 들어보자.
“내 얼굴은 구조대원처럼 열이 올라 있었으며 표정은 비통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표정관리에 신경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마이크를 잡은 나는 차라리 구조대원이고 싶었다.”

그렇다. 매끈한 말과 연설 테크닉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가수는 노래를 잘해야 한다‘는 당연한 말처럼 립싱크 테크닉은 잠시 사람의 마음을 홀리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정동영은 꼭 필요한 시점에 자신의 全체중을 실을 줄 아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일견 남들이 보기엔 공부하지 않는 학생의 책처럼 유별난 ‘흔적’이 없어 보이지만 꼭 필요한 부분에는 거의 빠짐없이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것이다.

얼마전 한 여중생이 정동영의 홈페이지에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보내왔다. 정동영은 그 학생에게 이렇게 답장을 보낸다.

“저는 3월에 대구에 들러 정신대로 끌려갔다 오신 조윤옥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살아 생전 고국땅을 밟고 싶었지만 죽은 다음에야 돌아오신 분입니다.(중략) 장례식 내내 할머니께서 겪으셨을 설움과 한이 가슴속에 밀려 왔습니다. 제가 할머니의 그 오랜 한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마음만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대구시민모임’이 시민사회 단체장으로 치른 이날 장례식에는 유족 서너명과 시민모임쪽에서 몇 분만이 참석했을 뿐입니다. 정말 우리가 조할머니의 문제를 역사로 인식하고, 그 의미를 진심으로 깨우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행여라도 훗날의 홍보를 위해, 양로원같은 곳에서 사과상자를 옆에 놓고 기념사진을 찍는 정치적인 제스츄어를 연상하지 않았으면 싶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쓰여진 편지도 아니고 또 정동영이란 인물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렇게 적극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동영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인상깊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광해군을 꼽는다. 광해군이 통치하는 15년동안은 실리외교를 펴서 전쟁없이 백성이 편안하게 살았기 때문이란다.

개인 하나 하나가 ‘우주’와 같은 존재인데 개인이 죽으면 무슨 국가나 무슨 이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제대하는 날 주머니돈을 털어 대형거울을 사서 “인간회복”이라는 글자를새겨 선물하고 나온 것도 비슷한 이유다. 사람들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에게서 왠지모를 신뢰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이런 ‘공감력(empathy)’때문이 아닐까.

지난 10월 몇 명의 초등학생이 학교숙제 때문에 정동영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귀엽고 천진하지만, 정치의 본질이라고 할 수도 있는 문제에 관해 정동영에게 숙제를 내준다.

“특별히 물어볼 것은 없고, 그냥 숙제를 하다가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은 어떤 훌륭한 일을 했는지 써야 하는데.....잘 몰라서(죄송) 이곳에 들어온 겁니다. 그리고 제 이메일에 정동영 국회의원님께서 어떤 훌륭한 일을 하셨는지 편지를 써주셨으면 합니다.”

정동영은 즉시 그 어린이들에게 답장을 띄운다. 그가 보낸 답장의 구체적 내용을 밝히기 보다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 각자의 상상에 맡기는 게 더 여운이 있을 듯 싶다.

본능적(?) 스트레스

아주 자주 정동영은 국회의원을 평생 직업으로 늙을 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하곤 한다. 연수원에 갔을 때는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고 너무 행복해서, 이렇게 눈내리는 산을 보면서 살고 싶다고 기도했단다.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꿈에 대해 얘기한다.

“내 꿈은 아침에 새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것이고, 아침에 눈떴을 때 제일 먼저 산허리를 보고 싶다. 차한잔, 감미로운 음악, 그런데서 행복감을 느끼지 최고위원이 돼서 좋은지는 실감도 나지 않는다.”

물론 이 잡지는 여성지가 아니라 주로 남성들이 구독하는 시사주간지였다. 집권당 최고위원 자리에 있는 정치인이자 ‘큰 꿈’과 관련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이렇게 비정치적으로 말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행동보다 반성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할만큼 ‘본능적 흔들림’이 많은 그는 자기가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를 자주 느끼곤 하는 것 같다. 따지고보면 자기 정체성의 실체는 바로 그런 바탕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동영의 인터뷰기사들을 읽다보면 흥미로운 현상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많은 인터뷰어들이 ‘정동영이 몹시 피곤해 보인다’는 표현을 하고있다는 사실이다. 한 여성 인터뷰어는 그가 너무 지쳐 보여서 마음속으로 쓸데없는 모성애까지 발휘되었다고 말한다.

확률적으로 볼 때 그가 그 많은 인터뷰 때마다 유난히 피곤한 일이 있었을리는 없고 또 그가 273명의 국회의원 중 제일 열심히 일을 해서 그렇다는 이유도 낯간지럽다. 그렇다고 그가 육체적으로 허약한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는 1주일에 한번씩 의원들과 함께 하는 조기축구회 센터포워드이자 한일의원연맹 축구대회에서 주전으로 활약할만큼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정신과 의사의 직업병을 발동하여 그 원인을 한번 진단해 보자. 살다보면 아무 질병이나 환경적 요인이 없었음에도 ‘요즘 피곤하시냐’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그 원인은 ‘심각한 스트레스’일 확률이 높다. 실제로 스트레스성 질환을 판별하는 진단항목 중에는 ‘요즘 특별한 이유없이 쉽게 피곤하다’는 문항이 들어 있다.
만약 ‘스트레스에 의한 피곤증’이라는 내 진단이 맞는다면 정동영은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끊임없이 받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정동영은 방송인 아버지에게 자부심을 느끼던 아이들이 국회의원인 아버지를 친구들 앞에서 그전처럼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아득해진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단순히 국민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정치에 대한 혐오감, 정치인에 대한 불신 그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일까. 자신도 그런 손가락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정치인 중의 한 명이 정동영아닌가.

우리나라 선거사상 최초로 국회의원 2연속 최다득표 당선, 야당 대변인으로 시작해 여당대변인에 이르기까지 40개월 동안의 장수 대변인, 40대 최고위원 등 ‘기록 제조기’로서의 명성도 다 그러한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일들이다.

게다가 그의 말처럼 정치자금이라는 측면에서도 정동영은 행운아다. 정치입문 후 지난 6년간 1천여명의 소액 후원자들이 보태주는 후원금 덕분에 누구에게 손벌리지 않고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동영은 자신의 내면적 이상인, 정치현실에서의 ‘인간회복’에 대한 유별난 집착(?)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하다. 정동영의 ‘본능적 울림’이 ‘정치현실’이라는 실체를 스스로에게 유난히 버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살다보면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반드시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정동영도 그런 생각을 자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울타리'

정동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정치인(?)’답지 않은 독특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작금의 정치생리와 정동영이라고 하는 한 인간의 관계가 찰떡궁합처럼 보이지 않는 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정동영이 이룩한 정치적 위상이 단순한 거품인기가 아니라 앞서 살펴본 것처럼 철저한 자기정체성을 근거로 한 것이라면, 지금 그가 겪고 있는 일종의 갈등현상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치를 예고하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이광모감독이 전혀 새로운 영화문법으로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영화를 만들어서 국내외적으로 극찬을 받을 때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독특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한국영화는 ‘이광모’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얼마간의 과장이 용인된다면 필자는 이 표현을 정동영에게도 그대로 적용해 보고 싶다.
“한국의 정치인은 ‘정동영스타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의 우상이었다는 아버지 얘기로 이 글을 끝맺자.

전북도의원을 지내기도 했다는 정동영의 부친은 그가 열일곱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정동영에게 있어 아버지는 아직도 절대적인 존재인 모양이다. 틈만나면 자신은 아버지를 그 누구보다도 존경했다고 말한다. 그의 아내의 말을 들어보자.

“남편에게 있어 시아버지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살아 생전에는 정서적인 버팀목이었고 돌아가신 뒤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 가셨을 때 사람들은 “순창의 울타리가 무너졌다”고 했고, 정동영은 “나의 울타리도 무너졌다”고 말했다. 그때 정동영의 아버지는 마흔여덟이었다. 1953년생이라니까 정동영도 이제 마흔여덟의 나이다. 불길한 연상을 하자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자신의 아들에게 철옹성같은 울타리로 느껴졌다는 그의 아버지가 가지는 의미를 찬찬이 되새겨 보자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정동영에게 정치적인 질문을 인간적으로 던져보자.
“만일 지금 한국의 정치판에서 정동영이라는 정치인이 사라진다면, 당신을 좋아하고 지지하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어떤’ 울타리가 무너질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어떤’ 울타리가 생각난다면 그게 바로 정치인 정동영이 끝까지 지켜줘야 할, 정치적 신념이다.

혹시 ID카드를 분실하시지는 않았습니까?

ID카드(Identity card)는 신분증명서를 뜻한다. 중요시설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 혹은 같은 단체에 속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징표로 목에 걸거나 가슴에 패용하는 카드다.

현실세계에서 ID카드를 분실하면 그 즉시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만, ‘자기정체성(Identity)’이라는 ‘마음의 ID카드’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자칫하면 분실되었다는 사실조차를 모르고 살기도 한다.

요리에 맛을 돋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맛술을 조금씩 마시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알콜중독자가 되어 버리는 ‘키친 드렁커’처럼, 고단한 삶의 餘震이 우리의 정체성을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앞에서 “노”라고 말할 수 없는 풍토를 개탄하며 한 논설위원이 들려주는 에피소드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과거 어느 정권에서의 일이란다.

정상외교에서 돌아온 대통령이 자기가 없는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 화를 내면서 내각과 여당은 뭘 했느냐고 질책하자 회의에 참석한 몇몇 고위인사가 너무 죄송하다고 엉엉 울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 출입하는 사람들 누구나가 그랬던 것처럼 ‘가슴에 ID카드를 달고’ 있었을 그 고위인사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자기정체성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디든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는 만능 ID카드, 그게 바로 ‘자기정체성’이다. 당신 마음속에 있는 ID카드는 어떤 종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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