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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자의 물은 나를 위해 끓는다 - 최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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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388회 작성일 10-11-2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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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선 씨 개인의 독특한 캐릭터와 기묘한 언행이 연일 화제다. 검찰 출두를 앞두고 녹음했다는 ‘최규선 테이프’에는 대통령과 그의 아들, 재벌회장, 청와대 비서관, 국정원 직원, 경찰간부 등 대중의 흥미를 돋울 만한 인물들이 고루 등장한다. 최규선 씨는 이 독백녹취록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이 자신을 ‘나라를 살리고 IMF를 극복하는 대통령을 만든 정권의 2인자’로 불렀다고 주장한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판단해볼 때 상당 부분 픽션과 과장이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이다. 대다수의 언론들도 최씨의 말을 100% 신뢰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녹음테이프에 거론된 인사들이 한결같이 최규선 씨를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정신병자쯤으로 매도하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린다 김 사건 때처럼 이번 일도 로비스트라는 특수한 직업에 대한 우리의 인식부재에서 기인하는 부정적 부풀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규선 씨를 ‘미국식 로비방식을 풍토가 다른 한국에서 써먹으려다 망가진 경우’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최규선 테이프’가 담고 있는 사실의 개연성을 역설한다. 실제로 ‘1백만 원짜리 수표 3백 장을 김홍걸 씨에게 주었다’는 녹음테이프의 내용이 검찰의 계좌추적 결과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렇게 극단의 평가가 혼재할 경우 제3자는 메시지 그 자체보다 메신저에 더 주목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최규선 씨처럼 ‘특이한’ 스타일을 가진 메신저일 경우는 더 그렇다. 심리적으로 최규선은 어떤 사람일까.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공개된 자료만을 토대로 한 사람의 ‘성향’이나 ‘가치관’을 유추한다는 게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의 육성이 담긴 녹음테이프는 최규선이라는 인물의 내면적 실체를 비교적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를 ‘인적 네트워크의 귀재’라고 부른다. ‘국제 사교무대에서 통하는 인맥과 단 하나의 작은 인연이라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00% 이상 활용하는 집념’을 가졌고, 마이클잭슨, 조지 소로스, 알 왈리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자,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 등과 개인적 교분을 쌓는 데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권력층에 접근하는데 늘 자신의 그러한 국제적인 인맥을 120% 활용했다. 그러나 나는 최규선 씨의 대인관계가 한없이 취약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그의 ‘자기애적 성격’과 맞물려 있다.

자기애적 성격을 가진 사람의 정신세계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이들은 ‘우주의 중심은 나’라는 전제를 가진다. 주전자에 물이 끓으면 섭씨 100도가 되어서 물이 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커피를 마시고 싶기 때문에 끓는다고 생각한다. 최규선씨가 녹음테이프에서 DJ를 ‘자신(최규선)과 같이 나라를 살린 사람’, 이 나라를 ‘자신이 세운 국민의 정부’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0% 허황된 말이라고 단정하면 제3자의 처지에서는 매몰찬 느낌이 들겠지만 다분히 자의적 해석의 혐의가 짙은 대목들로, 그의 정신적 에너지가 세상이나 타인에게로 이동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만 향한다는 하나의 증거다. 그때 타인이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이용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대인관계는 착취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사회생활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고, 전략적 차원에서 몇몇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자기애적 성향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일관되게, 누구와의 관계에서든 착취적인 경향을 보이는 특징이 있다.

이번 사건이 터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도 최규선 씨의 가혹한 처사에 분노를 느낀 그의 비서가 폭로를 한 것이 그 시작이며, 마이클 잭슨의 엄마에게 치밀하게 접근하여 어렵사리 관계를 맺은 마이클 잭슨과 불화가 생긴 것도 한국 공연과 관련된 계약서를 그가 마이클 잭슨에게 부적절하게 강요하면서 한밤중 싸움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후보 국제담당 보좌역으로 정계에 입문한 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보좌역으로 활동했지만 엘리트 비서 5인방 중 최씨만 청와대에 입성하지 못했고, 마이클 잭슨 공연 사기혐의로 경찰청 조사를 받고 쫓기듯 외국으로 나가야 했으며, 당대의 실세 권노갑 씨의 비서로 재직 중에는 청와대 직원 전용카드를 무단으로 소지하고 VIP 행세를 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해임되기도 했다.

어느 지인의 말처럼 “천성적으로 자기가 가진 능력을 과시하고 폼잡기를 좋아하는” 최씨의 입장에서는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최규선 씨는 녹음테이프에서 “경찰청 수사 이후 ‘피해망상증’에 걸렸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당시 정황이나 권력 내의 내밀한 역학관계를 감안하면 그의 피해의식을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피해망상은 과대망상을 기반으로 발생한다는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보면 그의 피해망상은 상황적이라기보다 그의 심리 내적인 것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

“누군가 나를 죽이려한다”며 공포에 떠는 피해망상증 환자는 “내가 무척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없애려한다”는 생각을 품고 산다. 최규선 씨는 자기의 정신세계 안에서 자신의 재능, 성취, 자신의 특출함에 몰두하여 자신이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고 확신하며 특별한 대우를 기대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현재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의 궤적’이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것, 특히 자신이 돈에 눈이 먼 파렴치범으로 몰리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다. 검찰 출두시 기자들에게 “조국을 위해 일관되게 헌신한 나의 모습은 부각되지 않고 언론에서 허구와 픽션만을 강조하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정신과에서 치료가 가장 어려운 질환 중 하나가 ‘자기애적 성격장애’다. 자기애적 성향의 사람은 ‘자아동조적(ego-syntonic)‘이어서 남들은 이상하다고 할 만한 언행에도 자신은 하등의 갈등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늘 자신만만하다. 자기애적 성격장애의 치료법 중에 연극을 함께 하면서 환자로 하여금 주연이 아닌 조연의 역할에만 충실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 자기 속에 남을 위한 공간이 생기면서 비로소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최규선 씨는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에서도 풀이 죽지 않고 재소자들에게 경제학에 대한 열강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거기서도 여전히 그는 주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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