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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응시라는 불후의 명작 - 임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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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196회 작성일 10-11-21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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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 감독을 보면서 나는 문득 40대의 한 남자가 상담실에서 절규하듯 내뱉은 한마디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럴 수만 있다면 지우개로 다 지우고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대기업의 중역으로 자식농사에 성공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살 만한 삶을 영위하던 사람이었지만, 갑자기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홍역을 앓게 된 것이다. 지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정말 잘할 수 있고, 잘해보고 싶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한숨짓는 사람들. 중년의 시기에 그런 욕망은 더 절실해진다. 그러나 물리적인 해결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리적인 해결을 시도한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특별한 게 있겠는가’ 유의 자기합리화가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권택은 확실히 다르다.

2001년 임권택은 “내 인생의 목표는 칸영화제가 아니다. 작품을 통해 거듭나는 삶이야말로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꿈이자 목표”라고 했다. 얼핏 장인정신의 한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나는 그의 말에서 ‘인간 임권택’의 삶의 고갱이를 발견한다. 그의 삶에는 깡패가 전도사가 되는 것처럼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다.

그가 오직 끼니를 해결할 목적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이후 거의 20여 년 동안 제작자의 주문에 맞춰 그의 표현대로 ‘싸구려 영화’들을 정신없이 찍어댄 것도 잘 알려져 있다. 감독으로보다는 술꾼으로 유명했던 시절이었고, 수전증으로 고개까지 심하게 떨려 대폿잔을 두 손으로 들어도 너무 흔들려서 아예 잔을 놓고 마실 정도였단다.

그러다가 40대 초반의 어느 순간 임권택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과 함께 그동안 자신이 찍은 ‘싸구려 영화’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싶다는 자기혐오감에 휩싸인다. 자신의 서화작품을 모두 거두어 들여 불 질러버리고 숨을 거두는 소설 속 한 예인의 생애를 연상케 하는 고백이다. 이후의 세월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영화계의 우뚝한 산맥 임권택으로 거듭나는 시간이었다.

‘죽음과 중년의 위기’라는 논문을 통해 예술가 수백 명의 생애를 분석한 정신분석가 라캉에 의하면 예술가 대부분이 중년에 심리적 위기를 맞았으며, 그것을 극복한 뒤에 그들의 사생활과 작품의 방향이 달라졌고, 내용 면에서도 더욱 깊어지고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임권택처럼 ‘자기응시력’이 뛰어난 예술가들은 더 그렇다. 삶의 구원은 ‘자기응시력’에서 시작된다. 자기응시력이란 언덕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다. 자신을 깊이 응시하다보면 자기혐오 같은 격렬한 감정을 피하기 어렵다. 사람의 행동은 고통을 피하는 쪽으로 그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강력한 자기응시 뒤에는 자기변화가 따르게 마련이다.

마케팅 전문가에 따르면 시장에 이미 나와 있는 제품을 리포지셔닝하는 작업이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진입시키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고 한다. 자기응시를 통해 거듭나는 일은 그래서 더 어렵다.

몇 년 전부터 임권택은 ‘나이가 먹었으니까 나이 먹은 값을 해야 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을 토로하곤 했다. 나 같은 사람에겐 그 말이 자신의 대표작을 ‘다음 작품’이라고 말한다는 감독들의 결기 어린 다짐 이상으로 들린다.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그가 지닌 최고의 나이값은,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취화선’ 같은 작품이 아니라 ‘임권택식 자기응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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