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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망상병 - 정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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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192회 작성일 10-11-21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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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인간을 이해하는 일은 단순과 복잡의 극단을 오간다. 특히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관한 인식에 이르면 ‘복잡한’ 인간의 ‘단순함’을 극명하게 경험한다. 나는 정운찬 서울대 신임 총장의 “지역별 신입생 안배 고려” 발언의 파문을 보며 다시금 그 사실을 실감한다.

정운찬 총장은 서울대 입시제도에 지역별 할당제(쿼터제)를 도입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강원, 영남, 호남 등 지역별로 인구 비례에 따라 입시 정원을 할당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생각일 뿐’이라는 전제가 있었지만 그 발언은 곧바로 격렬한 찬반논란으로 이어졌다. 찬반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한 신문의 사설에서 지적했듯이 ‘자유경쟁의 훼손’ ‘서울에 대한 역차별’ 등 비판적 반응이 주류를 이루고, 찬성 의견은 ‘국립 서울대에서 한번 시도해볼 만한 아이디어’라는 정도다. 이런 부정적 흐름의 근원에는 망국병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지역감정’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지역할당제’라는 단어에서 비롯한 연상작용이 ‘지역감정’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을 자극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해석의 비약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지역감정’은 논리적 개연성 없이 사소한 실마리만 가지고도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망상‘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망상은 잘못된 신념(false belief)으로, 평소의 인품이나 교육 정도와도 전혀 관계없이 나타나며 어떠한 논리적 설득에도 망상을 포기하지 않는 특징을 가진다. 흔히 의처증, 의부증으로 대변되는 망상질환자는 단순히 배우자의 옷에 단추가 떨어진 것만 가지고도 배우자의 외도를 상상한다.

있지도 않은 부정을 밝혀내려고 배우자를 감금하기도 하며 심지어 가상의 정부(情夫)를 공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망상과 관련된 한 부분만 제외하면 여타의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일도 잘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다. 의처증에 시달리던 여자가 친정엄마에게 자신의 괴로움을 호소해도 “김서방이 그럴 리가 있느냐”며 오히려 딸을 나무라는 경우가 적지 않을 정도다. 이때의 망상은 ‘나름대로의’ 그럴듯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 ‘체계화된 망상(systematized delusion)’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역감정 문제가 바로 그렇다. 멀쩡한 지식인조차 지역감정 문제에 관한 한 나름의 논리로 무장하여 망상질환자 같은 어처구니없는 언행을 곧잘 보인다. 만일 우리나라 ‘지역감정’이 망상의 수준이라는 나의 진단이 맞는다면 지역감정은 감정의 장애가 아닌 사고(思考) 장애다. ‘지역감정’이 아니라 ‘지역망상’이라고 불러야 옳다.

정신과적으로 망상의 치료는 약물치료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망상질환자의 심리 내적 변화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외부적․물리적 개입에 의해서만 망상의 수정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여 누가 ‘지역망상 조장 발언 및 행위를 금지’하는 한시법(限時法)같은 특단의 물리적 조치를 제안하거든 그런 인위적인 방법이 무슨 소용이냐며 무조건 혀만 차지 말고 그 속마음을 먼저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지역감정은 우리의 무의식을 넓게 장악한 망상적 사고체계이기 때문이다.

2001년 신입생의 4분의 3이 대도시 출신이라는 서울대의 현실에서 ‘신입생 지역 안배 고려’라는 정총장의 개인적 제안도 그런 외부적․물리적 개입에 해당하는 특단의 조치의 하나가 아닐까.

‘좀더 다양한 입시제도의 도입’이라는 발언의 진의를 엉뚱하게(?) ‘지역감정’ 문제로까지 확대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정운찬 정도의 인물이라면 너그럽게 양해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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