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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멸렬 화법 -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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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382회 작성일 10-11-21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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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실에서 내담자의 얘기를 듣다 보면 유난히 졸릴 때가 있다. 특별히 피로하지도 않고 식곤증 같은 물리적 이유가 없는데도 그렇다. 택시 기사의 졸음운전을 연상하며 정신과 의사로서의 안이한 직업의식을 질타할 사람도 있겠지만, 물론 내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그런 직업의식이 아니다.

정신의학에서는 특정 내담자의 말을 들을 때 상담자가 졸게 되는 현상이 자꾸 반복되면 그 자체를 하나의 중요한 단서로 인식한다. 그 사람을 이해하는 한 코드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임상적으로 보면 지나치게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는 사람이나 사고장애가 있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이런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사고장애가 있는 사람은 별로 연관이 없는 말을 의미 있게 연결시키거나 이 주제에서 갑자기 저 주제로 말이 옮아간다. 중심축이 없는 그들의 특징적 언어패턴을 ‘지리멸렬(loosenig of association)’이라 한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사람들도 얘기를 하다가 곁가지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든 자세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본질에서 벗어나게 되고, 맥이 끊기는 듯한 얘기는 듣는 사람의 집중력을 떨어뜨려 졸음을 유발하게 된다. 초보자들이 스토리 라인이 따로 없는 이미지연극 등을 볼 때 졸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휴가 한철 장사로 1년 먹거리를 장만한다는 피서지 상인들처럼 대선이 코앞에 닥치니 다시 JP의 언행이 화제에 오른다. 그런데 나는 완벽하다기보다 오히려 낭만적인 성향에 가깝다는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말을 들을 때마다 지루한 느낌을 떨쳐내기 어렵다. 늘 본질보다 지나치게 곁가지에 치우친 듯한 그의 언행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도 어렵거니와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말에 계속 방점(傍點)을 찍는 걸 보자면 지루하고 졸립고 ‘지리멸렬'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자신의 나이가 오십만 됐어도 ‘또 한번 꼬리를 치겠’는데 이젠 나이가 많아서 그럴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피력하면서 대선후보들에 대해 “조국을 어떻게 알기에 아무나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느냐”고 비난했단다. 아마도 JP는 남자를 유혹하려고 과장되게 엉덩이를 살랑거리는 여인네의 몸짓이나 먹이를 보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의 행동만 ‘꼬리를 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직도 최고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완전히 꺽지 않은 듯한 일흔일곱 살의 노인을 보면서 ‘꼬리를 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어째서 꿈에도 해보지 않는 것일까. 작가 김수현이 좋은 말을 했다. “과장이 심해서 악 소리가 나오려는 탤런트가, 난 죽어도 과장은 못해, 하거든요. 며느리 지독하게 부리는 시어머니가, 난 보수적이질 못해서 며느리 힘들게 못하겠어, 하는 것들이 다 자신을 몰라서 만드는 코미디예요.” 그런 점에서 ‘변화무쌍한 수사의 달인’ ‘교언영색의 대가’로 찬탄과 비아냥을 동시에 받는 JP의 파편화된 인식은 코미디 그 자체다.

혹 있을지도 모르는 JP와의 막판 공조를 염두에 둔 대선후보들은 지분협상 대신 ‘JP 정치인생의 명예로운 마무리’를 말하고 있다지만, 그는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이대로 주저앉지는 않겠다’고 결의를 다지고 있단다.

한때 정치권의 숙제 중 하나는 ‘김종필의 마음읽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JP의 말을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JP는 아직 자신의 말이 풀어야 할 가치가 있는 숙제라고 믿는 눈치다. 한술 더 떠 그것을 풀지 못하는 사람들을 답답해하고 분노한다. 그러다 르네상스적 인간이라는 극찬을 받아온 JP의 삶 자체가 지리멸렬하게 끝날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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