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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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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3,245회 작성일 10-11-22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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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구조 조정기에 살아 남은 조직원들이 겪는 심리적 공황상태

손대지 않고 버려두어 거칠고 황폐해진 땅, 「황무지」. 생명의 태동 자체가 거추장스럽고 괴롭게 느껴지며, 그래서 더 이상 열정이나 감정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음의 땅이다.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은 후 기업내 남은 조직 구성원들이 현재 앓고 있는 「ADD 증후군(After Downsizing Desertification Syndrome)」은 바로 그런 정신적 황무지다.

「정신의 황무지화」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have no hope, have no emotion, have no energy, have no credit, have no vision」(희망도 정서도 에너지도 창조성도 미래에 대한 전망도 없다)으로 요약되는 「정신적인 무감각(psychic numbness)」 상태를 말한다. 이는 예측이 불가능하고 위협적인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을 때 종국(終局)에 나타나는 심각한 정신병리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그저 행복하라는 것, 단 한 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의무를 수행하기가 이토록 힘들어지는 것은, 더 고단해지기만 하는 우리의 삶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영혼의 황폐함 때문이 아닐까.


살아남은 자의 고통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김대중 대통령은 『10명 중에 7명만 남아 열심히 일해서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자. 그러고 나서 나간 3명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자』며 국민에게 구조조정의 당위성을 설득했다. 그리고 기업들은 사상 초유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30대 기업의 경우 98년 초 약 90만명에 이르던 고용인원이 98년 연말까지 60만명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특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5대 재벌기업간 「빅딜」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던 재벌기업 사무직 직장인들도 해고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이다.

직업이 정신과 의사인 필자로서는 기업 구조조정의 당위성이나 그로 인한 부작용을 경제학이나 경영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할 만한 지식이 없다. 그러나 구조조정이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자리잡은 이때에, 해고되지 않고 살아남은 직장인들조차 집단적으로 「정신의 황무지화」 단계를 밟아가는 것을 보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필자는 지난 5개월 동안 직장인들의 집단 심층면접, 개별 인터뷰, 임상사례,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5개 기업(K그룹, S그룹, A시멘트, H그룹, H중공업) 사무직 근로자 417명을 대상으로 한 ADD 증후군 체크리스트 등을 종합해본결과, 현재 융단폭격식으로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 인원 감축 후 기업에 남은 사무직 근로자 10명 중 8명이 정신의학적으로 유의미한 「정신의 황무지화 증후군」을 겪고 있는 것을 알았다.

정신과 찾는 직장인들

그 구체적 사례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극도의 무력감과 의욕 감퇴를 호소하며 병원을 찾은 대기업의 K차장(39)은 최근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한다.
『회사의 목표와 내 목표가 전혀 별개라는 걸 깨달았다. 요즘은 회사를 다니는 것이나 그만두는 것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먼저 나간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나도 피해자다』

이것이 실직자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살아남은 「행복한(?)」 직장인의 입에서 나온 예외적인 말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단적인 예로 요즘 필자가 운영하는 정신과 의원을 찾는 직장 남성들이 1년 전에 비해서 2~3배 가량 늘었다. 진료실을 찾은 그들은 대부분 K차장과 같은 정신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한정된 상황이 아니다. 미국의 연구자들은 대량 감원 사태를 겪고 살아남은 직장인들의 절망, 심장마비, 기타 관련 질환을 고려할 때 이런 스트레스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연간 3000억 달러로 추정했다.
또 의학전문지 『Lancet』에 보고된 핀란드의 한 연구에 따르면 대량 감원과 질병으로 인한 결근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량 감원 이후에 장기 결근자가 2.3배 늘었는데, 40대이며 대기업 근무자였고 고소득자였던 사람들에게 특히 많이 나타나는 양상을 보였다. 감원 후에 생긴 기업의 이득 중 8~13%가 생존자들의 결근이나 안전 사고로 인한 치료비에 다시 쓰였다고 한다(치료비 외에 그로 인해 파급된 손실까지 감안한다면 그 액수는 더 늘어난다).

미국경영자협회(AMA)의 보고서(91~ 94년)도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기업의 경영성과를 제고하기 위해 정리해고를 단행한 이후에 생산성이 증가한 곳은 34.4%밖에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직원들의 사기 저하로 문제가 된 기업은 86.1%에 달했다고 한다.
우리 정부는 「10명 중 7명만 남아 경쟁력을 높여서 먼저 나간 3명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자는 것이 구조조정의 참뜻」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갑자기 동료들이 일터를 떠나게 되는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접하면서,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7명의 「생존자」들에게 그런 의욕이 남아 있기나 할까?

혹자는 『기업에서 어떻게 개개인의 심리까지 헤아려가며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런 문제가 나타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ADD증후군에 대한 연구 결과는 그러한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첫째, ADD증후군은 구조조정을 겪고 있는 직장인 10명 중 8명이 겪는 집단적인 현상으로 개인의 적응문제가 아니다(이번 연구조사 결과 기업내 생존자 80.6%에게서 ADD증후군이 나타났다).

둘째, ADD증후군은 지금까지 기업이 당면했던 문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문제라는 점이다. 그 전까지는 경영자가 조직의 모든 문제를 심리적 측면에서 고려해볼 필요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직-개인 간의 기본적인 신뢰 자체가 심각하게 손상받았고, 그로 인해 개인의 심리적인 기반이 붕괴되는 병리적인 상황이다. 즉 경영자가 「준(準) 의사」의 마인드를 가지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응급상황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이 해결된 후에야 비로소 직장인들은 회사가 제시하는 새로운 계획이나 비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내적(內的)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존엄성이나 자아실현과 조직의 발전이 병행할 수 있는 방법은 있는가. 그것을 위해서는 앞으로 개인과 조직 사이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계약에 아주 심리적이고 개별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휴머니즘을 근간으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ADD증후군은 정신의학적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이라고 하는 질병군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또 ADD증후군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중에서도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집단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살아난 사람들이나, 월남전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걸 보며 끝까지 살아남았던 생존 병사들의 심리 변화 과정과도 거의 같은 양상을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 온 가족이 끌려왔다가 모두 처형되고 혼자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 끌려온 사람의 95%가 죽임을 당했던 아우슈비츠에서 1942년에서 45년까지 강제노역을 하며 지내던 그는 동료 포로들과 자신의 심리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가 바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초기 이론 수립에 큰 공헌을 했고, 「의미 치료」라는 정신의학적 치료의 한 분야를 개척한 유태인 출신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Victor Flankl)이다. 프랭클이 기술한 포로들의 변화 과정을 요약해 보면 이렇다.

『같이 끌려온 사람의 90%가 30분 내에 가스실에서 죽는다. 그것을 보면서 포로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지는 1단계에 진입한다. 이들은 극도의 불안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너무 두려워 자살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혹시 나만은 끝까지 살아남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기도 하지만 하루하루 처참하게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점차 이런 환상도 포기하게 된다.

이렇게 지내던 포로들도 한 달 정도 지나면 처음과는 다른 상태로 변한다(2단계로 이행). 이때부터는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일념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 불안과 공포도 덜 느끼게 된다. 일주일을 빵 한 조각으로 연명하며 얇은 천조각만 몸에 걸친 채 영하의 혹한에 철로공사를 하고도 감기 한번 안 걸리는 기이(奇異)한 현상이 벌어진다. 이때는 수용소 생활 초기와 달리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없다. 한겨울에 찬바닥에서 젖은 신발을 베고 이불 없이 자도 모두 깊은 잠에 빠진다.

지금껏 배워왔던 의학 교과서가 다 거짓투성이였다는 걸 깨달으면서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에 전율을 느낀다. 노동력이 있어야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기 때문에 포로들은 아침이면 돌을 주워다 면도를 한다. 면도를 하면 젊어 보이기 때문이다. 혹시 면도를 하다가 베어서 피가 나면 핏기가 있어 보인다며 오히려 안심한다. 병약자를 골라 가스실로 보내는 명단을 작성할 때면 자기 이름을 빼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넣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그러나 이렇게 치열한 생존경쟁을 치르며 살아가던 포로들의 마음에 또 다른 변화가 온다(3단계 진입). 「우리 중에 훌륭한 자는 이미 죽은 자들뿐이다」라는 자괴심과 그로 인한 무력감을 느끼면서 포로들은 점차 「정신적 무감각(psychic numbness)」 상태에 빠진다. 이때부터는 동료의 시체를 봐도 아무 느낌이 없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게 된다(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공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못 느끼는 것이다). 살겠다는 열망도 없어지고 죽겠다는 생각도 없어지는 정서적인 자멸 상태가 된다.

이런 정서적인 자멸 상태로 종전(終戰)을 맞은 대부분의 포로들은 그들이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지만 99%가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조차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해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불가능했고, 적절한 대인관계를 갖지 못하는 등 새로운 환경과 시대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자 또는 이상 성격자가 되었다』

이것이 예측 불가능하고 위협적인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을 때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설명하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단적인 예다.
혹자는 아우슈비츠라는 극단적인 상황과 지금의 기업내 생존 문제를 같은 관점에서 보는 것이 지나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고통에 양적인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필자의 연구는 양자의 정신적 변화과정이 의학적으로 동일한 메커니즘하에 움직인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아우슈비츠에서 생명을 잃는 동료들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던 포로들의 삶과, 생계의 끈을 잃어가는 동료들을 지켜보면서 살아가는 이 시대 직장인들의 삶의 작동원리는 놀라울 만큼 일치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황무지화 단계별 증상

ADD증후군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1단계 정신적 혼돈기, 2단계 정신적 억압기 또는 놀라운 적응기, 3단계 정신의 황무지화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단계에 따라 구조조정을 겪는 직장인들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자.

1단계 「정신적 혼돈기」
필자가 조사한 ADD증후군 환자의 11.3%가 1단계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구조조정 초기의 반응이다. 「나도 결국 감원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시달리고, 회사에 대해서 강한 분노와 배신감을 갖게 된다. 불안, 두려움, 분노가 혼재하여 말 그대로 정신적인 혼돈이 극에 달하는 시기다.
쉽게 흥분하게 되고, 이유없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서 대인관계가 악화되기도 한다. 실직한 동료들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스스로를 비난하는 심리적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강한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중견기업 L대리의 말.

『요즘 회사 게시판을 자꾸 살피게 되고 나도 모르게 소문에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늘 긴장돼 있고 뒷목이 항상 뻣뻣하다. 그리고 퇴사한 동료들의 빈 자리를 볼 때마다 심리적으로 무척 괴롭다. 그러면서 회사에 대한 까닭모를 분노가 치솟아 혼자라도 술을 마셔야만 가라앉는다』

이렇게 정신적인 소모가 과다하다 보니 쉽게 피로감을 느끼게 되고, 기억력이나 집중력이 떨어지며, 섹스에 대한 욕구도 떨어진다. 실제로 L대리는 내원 당시 이미 6개월 가량 부부관계를 갖지 않았고 그로 인해서 부인과의 관계도 악화돼 있었다. 전형적인 1단계의 경우다.

2단계 진입한 직장인들 심리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구조조정의 회오리는 가라앉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더 지속되기만 한다. 그렇다 보니 1단계의 정신적 혼돈과 고통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돼 사람들은 고통을 무조건 「억누르고(repression)」 「회피하여(avoidance)」 일시적으로나마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2단계인 「정신적 억압기(또는 놀라운 적응기)」에 돌입한다. 지금 현재 우리 나라 직장인의 대부분은 이러한 「놀라운 적응기」에 몰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조사 결과 전체 ADD증후군의 66.5%를 차지했다).

언뜻 보면 모든 갈등을 다 털어버리고 새로운 상황에 놀랍게 적응하는 양 비치기도 한다. 그들은 『지금은 70년대식 헝그리 정신이 필요하다』 『상황에 따라서 감봉이나 휴가도 반납할 수 있다』 『새로운 인사고과 정책에 맞추기 위해서 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사에게 대들지도 않으며 시키지 않은 일도 경쟁적으로 찾아서 하는 시기다. 어느 기업의 과장은 상사의 지시도 없었는데, 자기 스스로 「(동종업계에서 최고 매출을 올리는 회사인) ××회사에 관한 시장 점유율 분석」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하기도 했다. 속으로야 어떻든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환경에 놀랄 만큼 빨리 적응 해서 열심히 일을 하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 기업의 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 일 시키기가 아주 편합니다. 일은 전보다 더 열심히 하는데 불평은 거의 없거든요. 직원들의 서비스 정신도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정신적 억압기는 폭발 직전의 휴화산처럼 위험한 시기다. 내적인 불안과 공포심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는, 그 외줄타기 같은 균형이 언제 깨질지 아무도(심지어 본인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있는 사람들은 과(過)할 정도로 일을 하지만 실제로는 합리적이지 못한 의사결정을 할 가능성이 높고 사고에 유연성이 감소돼 업무 효율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인 손실보다 더 중대한 문제는 한 인간의 정신세계가 물밑에서 서서히 황폐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진료실에서 마음을 열고 말하는 진실은 이렇다.

『내가 조직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은 단지 외형적으로만 그럴 뿐이다. 회사에 대한 반발심이나 배신감은 여전하다』

그는 요즘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하지만, 그것이 결코 회사를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것이며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일 뿐이라고 스스로 두번 세번 강조했다. 이처럼 2단계 정신적 억압기에 있는 개인은 표면적으론 매우 긍정적인 적응 상태를 보이나 이들의 내부에는 부정적 요소가 강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우리가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감 형성이다. 갓난아기가 어머니와 반복적인 스킨십을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깨닫는 것은 「엄마(세상)가 나를 사랑으로 받아들여 주었다」는 어머니(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basic trust)이다. 세상에 태어나 이 첫 번째 신뢰감 형성에 어떤 이유로든 문제가 생길 때, 그 아기는 나중에 정신분열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이 고전 정신분석학 이론이다.
조직과 개인간의 기본적인 신뢰에 금이 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기업에 남아 있는 생존자들 스스로의 자기 분열과 조직과 개인 사이의 상호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나를 위한 것이 동시에 회사를 위한 것이고, 회사를 위한 일이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 기업들은 늘 「승(勝)-승(勝)식」 사고, 상생(相生)이론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왔고 또 사람이 제일 중요한 회사의 자산이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쳐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얘길 해도 더 이상 믿지 않는 분위기가 되는 것 같다.

ADD증후군에서 흔히 보이는 「나도 피해자」라는 인식과 충동적인 행동화 경향, 회사에 대한 배신감들이 외부 상황과 결합되면 산업스파이 같은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산업스파이는 실정법상으로도 형사처벌이 될 만큼 명백한 범죄행위지만 스파이 노릇을 하는 당사자들은 죄의식을 별로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도 결국은 피해자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의식이 점차 확산된다면 우리를 IMF 위기로 몰아넣은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라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더 확산될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마음까지 생긴다. 언론사에 다니는 한 직장인의 말.
『요즘 컴퓨터를 배우고 어학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전에 안 보던 전문지도 정기구독하고 있다.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새로운 정보에 대해서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 같다. 동료끼리 정보를 나누는 것보다 먼저 위에 보고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도 역시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어쩔 수 없이 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가 원하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들고, 일을 열심히 하긴 하지만 전혀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며 괴로워했다.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도 자신이 살아남으려고 치사할 정도로 안간힘을 써왔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 커진다. 그래서 3단계인 「정신의 황무지화 단계」로 이행하게 된다. 이때부터는 치열한 생존경쟁도 부질없어 보이고, 해고당하는 동료를 봐도 무감각해지고, 실직에 대한 공포도 서서히 없어지며 매사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된다.


나는 갤러리 직장인

요즘 「갤러리 직장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골프장의 구경꾼처럼 직장에서 철저한 방관자적 입장에 있는 직장인이 날로 늘어난다는 얘기다. 예전에는 승진을 자아실현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했었지만, 지금은 승진에 대한 의욕도 없고 계속 직장에 남아 있겠다는 마음도 없어졌으며 업무에 대한 성취감도 없어진, 그저 구경꾼 같은 직장인이다.

예전에는 승진에서 누락한 50대 이후의 직장인들에게서나 나타나던 이런 현상이, 지금은 20대 신입사원부터 40~50대의 중견 관리자까지 거의 전연령층에서 고루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서로 속마음을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할 뿐이다. 언제든 사직서를 쓸 준비가 돼 있는 그들의 꿈은 내 사업을 하면서 마음 편히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인 상황이 너무 어려워 그것이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을 짓누른다.

「세상은 믿을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며, 타인은 위험하고 나를 해치려고 하며, 나는 무가치한 존재다」
이것이 ADD증후군의 3단계인 정신의 황무지화 단계에서 나타나는, 세상과 타인과 자신에 대한 변질된 신념체계다. 이렇게 전과 달라진 신념이 일상 생활에까지 일반화되면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냉소적인 사람으로 변해간다. 한 번 변화된 신념체계는 쉽게 이전으로 돌아오기 힘들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런데 이번 연구 결과는 3단계인 정신의 황무지화 단계에까지 도달한 직장인은 무려 22%에 이르렀다.

남아 있는 직장인들은 자신이 왜 살아남았으며, 실직한 동료들은 왜 실직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이번 조사결과를 보면 퇴사한 동료들의 실직 이유를 「상사에게 잘못 보였거나 운이 나빠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43.6%로 가장 많았고, 둘째가 「업무 성격이 전문성을 요하지 않아서」가 31.3%였으며, 「능력이 없어서」라고 답한 사람은 10.4%에 불과했다. 업무 외적인 요인으로 동료들이 실직했다고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자신들의 생존 이유도 역시 「상사에게 잘 보였거나 운이 좋아서」가 44.3%로 가장 많았고, 둘째가 「보직이 좋아서」가 21.2%, 「능력이 뛰어나서」는 8.5%로 최하위였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보직배치도 「운」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결국 자신의 생존 이유를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하는 직장인이 10명중 6명꼴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살아남은 직장인들도 스스로 직장에 남아 있는 당위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능력이 있어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10명 중 1명도 안 되니(8.5%), 그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긍지나 업무에 대한 자신감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기업들은 감원시에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기준을 적용한다며 그 기준을 공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이라는 것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직장인의 입장에서는 냉혹하고 이기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주관에 의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한 인식(認識)의 차이가 생겼을 때의 해결은 객관적 사실을 재차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보다는 왜 그런 인식의 차이가 생겼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첫째로 외형적으로만 객관적인 규칙이 있었을 뿐이지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을 가능성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회사에 대한 배신감이나 피해의식 등과 같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사실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가능성이다. 이것은 감정적 갈등이 있는 사람에게서 흔히 일어나는 인지의 왜곡이다.

사실 ADD증후군의 과정에는 개인에게 지극히 부정적이고 왜곡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것같은 두려움,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외감, 권위적인 인물에 대한 적개심, 자기 비하감, 죄의식과 수치심 등이 바로 그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런 인식차를 좁히지 못하면 앞으로 그 양(量)만큼 회사와 직원들 간에 대화가 안 될 것이며 회사 정책에 대한 직원들의 신뢰도나 호응도가 떨어지리라는 점이다. 또 그만큼 개인과 사회의 분열도 깊어질 것이다.


ADD처방을 위한 6대 전제

이러한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모두가 공유해야 할 기본 전제가 있다. 첫째, ADD증후군은 집단적인 병리현상이라는 것이다. ADD증후군은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개인에게만 오는 적응 장애가 아니고, 직장인의 80% 이상에게서 나타나는 집단적인 병리현상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ADD증후군을 일으키는 원인은 외부적 상황에 기인(起因)한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그간 전문성이나 경쟁력을 키우지 못했던 개인이 새로운 시대를 만나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좌절이라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상황을 개인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피해자 탓하기(blame-the-victim)」의 오류에 빠져서 상황을 균형있게 바라보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마치 강간 사건을 조사하면서 강간당한 여자에게 『네가 짧은 치마를 입어서 남자가 달려든 것 아니냐』고 비난하는 격이다. 이런 식의 접근은 직장인들에게 더 많은 분노와 비협조를 유발할 뿐이다.

셋째, ADD증후군을 겪은 직장인들은 그 이전의 사고방식으로 완전하게 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직장인들은 일단 자신의 세계가 뒤흔들려버렸기에 이전과 정확하게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다. 전과 똑같아지길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 ADD증후군의 증상을 비정상적인 것들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대다수 직장인들이 자신에게 나타나는 불안, 초조, 죄책감, 분노 등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스스로를 「나는 참 못났다」거나 「무능하고 약하다」는 식으로 비난하기 쉽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러한 심리상태는 자신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므로 스스로를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몰아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 사실 하나만 마음속에 받아들여도 어느 정도 마음에 평정을 되찾을 수가 있다.

다섯째, 기업은 직원들에게 먼저 회사의 상황을 이해해줄 것을 설득하면 안 된다. 회사가 먼저 직원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충분히 듣고 이해해주어야 직원들이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일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 다음에 회사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먼저 구조조정의 불가피성, 당위성을 자꾸 강조하는 것은 그들에게 짜증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왜냐하면 이해받길 원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상대를 이해하라는 버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기업은 장밋빛 청사진보다는 미래를 좀더 「예측 가능한」 것으로 인식시켜야 한다. 정신의학적으로 사람이 가장 두려움을 느낄 때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때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란 사람에게 여러 가지 경우를 가정(假定)하게 하고 그에 대한 모든 대처 방법들을 반복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또 불안을 유발시켜서 뇌의 정보처리 용량을 감소시킨다. 그러므로 예측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알려주어서 불안을 감소시키면 뇌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업무 효율성이 증가하게 된다.

흔히 직장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기업의 목표나 미래를 다소 과장되게 설정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지금 그들이 혼란에 빠진 것은 미래가 없어서가 아니다. 미래를 예측할 만한 현실 기반들이 모두 무너져버리고 완전히 바뀌어서 불안한 것이다.


휴식과 이완이 필수

필자는 정신과 의사의 위치에서 지금까지의 ADD증후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에 관한 처방을 제시하고자 한다. 처방은 우선 단계별로 차이가 있다. 그때마다의 심리적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1단계의 정신적 혼돈기는 혼돈스러운 상황에서의 다양한 정보와 자극들로 인해 뇌에 과부하(過負荷)가 걸린 상태이므로 이를 감소시키는 방향의 시도들이 필요하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외적인 활동을 가능한 줄이는 것이 좋다.

개인적으로는 휴식과 이완이 필요하다. 직장 내에서 소그룹 단위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만들어 보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여기서 리더는 회사의 대변인이 아니라 선배나 동료 같은 개인적인 관계에 서는 것이 바람직하다. 원론적인 충고나 설득보다는 심리적 어려움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치유 효과를 볼 수 있다.
비슷한 경험과 문제를 가진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들에게 상당한 안도감을 주며 이를 통해서 집단 구성원들간에 두터운 신뢰감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에 조직의 결속력을 높일 수 있다.

2단계의 정신적 억압기 또는 놀라운 적응기에는 표면적으로만 적응을 잘하는 것으로 문제를 부정하고 본질을 잊고 있는 시기이므로 1단계와는 반대로 좀더 심도있게 문제를 대하게 해야 한다. 상처와 관련된 모든 것을 회피해버린다면 이 경험 자체가 내부에 유해한 채로 남게 되고 더 악화된 상태로 3단계로 이행하게 된다.
전문적인 접근으로는 심리극이나 예술요법 등을 통해서 연상을 촉진시키고 가장 중요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등 재구성 기법을 활용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황무지화 단계에서의 치료 전략은 이미 신념체계가 바뀐 사람들의 인식체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황무지화 단계에 이르기 전에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다. 이때가 되면 이미 가치관이나 자아상이 부정적으로 변해 일상생활에까지 확산되어서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은 외적인 어떤 시도에도 냉소적이거나 반응을 하지 않으므로 혼돈기나 억압기에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게 해 이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가능한 한 자신의 견해를 여러 사람 앞에서 피력하게 하고, 타인들의 반응을 통해서 자신의 독특한 신념체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물리적․정신적으로 자신만의 공간에 칩거하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를 막는 것도 중요하다.

지구 저편에 있는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이 내 앞에서 폭풍을 일으키는 현상을 과학자들은 카오스(chaos, 혼돈)라고 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혼돈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현상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는 그런 현상들이 더 심화될 것이라고 미래학자들이나 과학자, 경제학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그들의 미래에 대한 처방은 각자의 학문적 가치나 주관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미래는 불확실성의 법칙이 지배할 것이라는 점에서는 모두의 의견이 일치한다.


경영진의 공허한 구호

그러나 표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무의식의 문제들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을 업(業)으로 살아온 나로서는 미래가 혼돈스러움과 불확실성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잣대로 보면 혼란스러운 것이지만 무의식의 세계 속에는 그 나름대로 독특한 법칙이 존재하고 있다. 그와 같이 카오스란 것도 겉으로 보면(상식적인 수준에서는) 혼돈이지만 그 표면의 밑으로는 어떤 유형이 있고 동기(動機)가 있는 것이다.

외형적인 방법만 강구하는 것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총성 없는 전쟁터와 같은 상황의 이면에 깔려 있는 「혼돈의 법칙」을 알아야 한다. 혼돈의 법칙은 다름아닌 마음의 법칙이다. 만일 기업경영의 요체가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전제가 옳다고 믿는다면, 또한 기업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경제논리에 따라 경영성과를 제고하려고 한다면 이 법칙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의 의욕 감퇴와 무기력을 해소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직원 기살리기 운동도 해보고, 고충처리센터도 만들어서 운영해보기도 한다. 가족까지 동원해서 가장(家長)을 신바람나게 해주자고 설득도 해본다. 앞으로는 회사 이익을 직원들에게도 분배하는 제도를 만들겠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반응이 없다며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경영진을 많이 접하게 된다.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일을 하자. 지금이 여러분의 구태의연한 사고를 바꾸고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것이 지금 대부분의 기업에서 직원들에게 외치는 구호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불의의 사고로 아내와 자식을 한꺼번에 잃은 사람에게 『당신은 지금 더 좋은 여자를 만나 더 나은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라고 위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필자가 정신과 의사여서 문제를 지나치게 편협한 시각으로만 바라보았다는 비난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영혼을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할 정신의 황무지로 만들어도 좋을 만큼 더 시급하고 최우선적인 가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ADD증후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객관적이고도 일치된 인식의 틀을 가지기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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