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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고뇌에 찬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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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101회 작성일 10-11-21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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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고뇌의 계절이다. 대선을 앞두고는 늘 그렇다. 정치권의 이합집산과 폭로전이 가열되고 관련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고백한다. 객관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당적이탈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5공 인사의 출마의 변에도, 뜬금없이 어느 후보의 비리설을 주장하는 폭로전에도 ‘고뇌에 찬 결단’이란 문구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누가 물어봤냐고?” 식의 속된 질문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다. 필요 이상으로 ‘고뇌’를 강조하는 그들의 속내가 뻔히 보이는 까닭이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새삼 ‘고뇌’의 의미를 되새김질한다.

괴로움과 번뇌는 철저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이다. 자살할 만큼 절박한 젊은 베르테르의 고뇌와 슬픔이 어떤 이에겐 유치한 감정놀음으로 비치거나 심지어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낳은 정이냐 기른 정이냐’ 유의 인간적 고뇌도 실상 당사자가 아니면 그 고통의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다. 문제는 이처럼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감정의 문제를 인간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대치하려는 욕심과 무지다. 짜장면과 짬뽕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순간 그 사람의 인식구조 속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과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이분된다. 내부적인 생각의 회로가 형성되면 외부적 상황이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식사 후의 포만감을 즐기는 사람이나 애초에 짜장면이나 짬뽕을 싫어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들의 고민이나 논리가 실감으로 와닿지 않는다. 더구나 자신의 식성 같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를 세계 식량문제로 연결시켜 ‘고뇌에 찬 결단’ 운운하면 어안이 벙벙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고뇌하지 않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지만,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 공식처럼 반복되는 고뇌타령엔 선뜻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들은 그럴듯한 자기합리화의 과정을 ‘고뇌’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상식에서 많이 벗어나 자기설득이 쉽지 않은 일일수록 ‘고뇌의 무게’를 강조하는 목소리는 자꾸 높아진다. 헤드폰을 낀 채 말을 하는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상대방의 청취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자기 목소리가 안 들리니까 그런 것과 같은 원리다.

그렇지만 영화 스태프들에게 ‘경제적 여유’와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명예’만을 강조하는 일이 선뜻 납득이 안 되는 것처럼, 어떤 면에선 정치인에게 권력문제에 초연하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의 주문일 수 있다.

지난 시절 권력 핵심에 있던 한 인사의 말에 의하면 “권력이나 권력자의 껍질을 벗기고 나면 그 본질은 결국 ‘자신이 최후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권력의 향배에 따라 ‘고뇌에 찬 결단’을 거듭하는 정치인의 행보를 이해 못할 바도 없다. 생존이 걸린 문제에 고민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당부하고 싶은 것은 개인의 생존적 고민을 국가나 민족의 문제로 환치하여 호들갑을 떨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일에서 개인적 고뇌를 강조하면 할수록 “내가 아니면 이 지구를 누가 지키랴” 식의 황당개그가 될 가능성은 더 높아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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