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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이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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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231회 작성일 10-11-2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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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순간 해결책이 나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다. 시간의 중요성에 관한 문제라면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11가지 방법’을 제시하기보다 ‘시간이 왜 중요한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방점을 찍는 스타일이다. 본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허접한 방법론을 무색케 하는 해결책이 저절로 찾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스타일이 원시적으로 존재하던 정신과 수련의 시절, 나는 선배와 스승으로부터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충고를 많이 들었다. 의사로서 명확하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 순간에도 원론적인 문제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었다.

정신과 병동에서는 환자들의 부적절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서 ‘토큰 이코노미’라는 방식을 자주 사용한다. 환자가 ‘바람직한 행동’을 했을 경우 그에 걸맞는 ‘상(토큰)’을 주는 일종의 행동요법이다. 방을 잘 정리하면 집에 전화를 걸게 해준다거나 양치질을 잘하면 외출을 시켜주는 식으로 ‘저차원의 경제학’이지만, 효과는 의외로 크다. 그래서 치료자들이 ‘바람직한 행동’과 ‘토큰’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일은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경우에는 원론보다 실제가 즉 디테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부주의한 행태를 보면서 디테일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국정원 간부 얼굴 공개 사건이나 청와대 직원이 도청 소방헬기에 가족을 태우는 등의 스캔들은 안타깝다. 적을 이롭게 하거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고의성은 없었을 것이라고 믿지만 그들의 행동은 인터넷 유행어처럼 ‘졸라 개념 없어’ 보인다. 정책결정자나 공무집행자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디테일’이 보이지 않아서다.

캐나다에는 음주 관련 규칙이 5,800개나 되는데 음주장소, 술을 파는 방법 등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규정하다 보니 그렇단다. 전투기 조종사 중에서 최고의 사격술을 자랑하는 탑건은 6킬로미터 상공에서 9백 킬로미터로 날아가면서 반경 3미터에 불과한 지상목표물을 정확하게 명중시킨다. 양털 1그램으로 실 150미터를 뽑아낸다는 150수 양복지는 양모기술의 결정체다. 정교한 방법론과 엄격한 반복 훈련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잘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누구나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마음이 잘 분화된 형태의 디테일로 표현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02년 ‘대선여성연대’는 대선 후보들의 보육공약을 분석해서 발표했는데, 그에 따르면 당시 노무현 후보를 제외한 세 명의 후보들은 이미 시행 중인 보육정책을 새로운 공약으로 제시했단다. 마음만 앞서다 보니 디테일이 부족해서 헛구호를 날린 셈이다. 그때의 노무현맨들의 디테일이 새삼 아쉽다.

‘본질은 방법론보다 우선한다’는 명제가 늘 참[眞]인 건 아닐 것이다. 때로는 ‘어떻게’가 ‘왜’를 앞서기도 해야 한다. 주제넘게 참여정부의 실수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정신과의사로서 무엇보다 내 스스로에게 먼저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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