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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기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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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370회 작성일 10-11-2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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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시절에 남자의 늦은 귀가 때문에 다툼이 생기는 경우 주위사람들의 조언은 남자쪽이냐 여자쪽이냐에 따라 완전히 상반된다. 아내쪽 조언자들은 여자가 확실하게 남편을 조여놔야 시작부터 나쁜 버릇이 안생긴다고 하고, 반대로 남편쪽 조언자들은 아내가 바가지를 긁을수록 일부러라도 늦게 들어가 초장에 아내의 기를 꺽어놔야 한다고 충고한다. 양쪽 모두 상대방을 자신의 주도권하에 길들여 놓아야 한다는 주문일 것이다. 그 말속에는 그래야 향후의 결혼생활이 자기 뜻대로 편안하게 지속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그런 신혼의 길들임이 성공적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본 일이 있는가. 잠시만 물러나 생각해 보면 ‘길들이기’ 행태만큼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도 다시 없다. 너무 ‘빤’하고 무뇌아같은 발상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청남대에서 언론문제와 관련해 ‘길들이기’ 설전을 벌였다. 노대통령이 “언론이 정권을 길들이기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하자 박대표는 “언론이 정권을 길들이는 것인지 정권이 언론을 길들이는 것인지 그런 인식의 차가 있다”고 맞받았다. 노무현 정부하에서 언론과 정권은 상대방이 나를 길들이려 한다는 의구심을 거두지 않는 눈치다. 참여정부의 언론관도 그렇고 “군사정권보다 더한 언론 길들이기 의도”라는 식의 제목을 양산해 내는 조중동도 그렇다.

어느 언론인의 말처럼 ‘정부도 문제, 언론도 문제’라는 식의 양비론을 펴자는 게 아니다. 나는 언론과 정권이 각각 “니네가 날 길들이려고 한다면 난 그렇게 되어버릴지도 몰라”라는 듯 비장한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언론과 정권이 서로에 대해 극도의 반발심이나 갈등의 골이 있을 수도 있고 어느 한쪽이 명백하게 비열하고 강압적일 수도 있지만, 상대방이 나를 길들이려 한다는 생각은 부적절하다. 그 말은 ‘상대의 의도에 따라선 나는 길들여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길들이려는 듯한 의도로 자행되는 어떤 왜곡이나 부당함이 있을 경우 그에 합당하게 대응하면서, 길들여지지 않으면 된다. 자기중심을 잃지 않으면 된다. 인간은 파블로프의 개가 아니다. 파블로브의 개 실험이후 일부 학자들은 인간의 정신도 조작이 가능할 것이라 믿었지만 그것이 착각이었음은, 이미 밝혀진 대로다. 당근과 채찍이 인간의 정신을 흔들고 주눅들게 할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그것이 정신의 길들이기로 이어지진 않는다. 폭력조직에 의해 강제로 마약을 맞아 중독자가 되거나 성격장애를 가진 아버지의 끔찍한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예닐곱살 아이처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언론과 정권이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자극은 그 정도로 불가항력적이지 않다. 스스로 불가항력적인 자극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그럴 뿐이다.

정권의 혹독한 탄압과 해직으로 인한 고통속에서도 길들여지지 않고 꼿꼿하게 살아온 언론인은 얼마든지 있다. 군수시절, 지방언론의 병폐를 비판하며 군청 기자실을 폐쇄하는 등의 파격적 조치로 지방언론으로부터 길들이기 뭇매를 무수히 맞은 김두관같은 사람은 행정자치부의 수장까지 지냈고 아직도 개혁성향이 누구보다 강하다. 노무현 대통령도 오랜 세월 악의적이고 의도적인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은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의 의도대로 길들여진 적이 있었던가. 정신을 꼿꼿하게 곧추 세우고 있는 한 인간은 길들여지지 않는다.

은퇴를 앞둔 농구선수 허재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다. 나는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허재가 ‘인간은 세월이나 환경에 어쩔 수 없이 길들여지는 존재’라는 속설을 보기좋게 깨부순데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야생마 기질이 펄펄 느껴지는 허재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는 말이다.

언론과 정권은 노대통령의 말처럼 “각기 불신이 있지만 자기 갈 길을 가면 된다”. 길들이기 걱정은 괜한 에너지 소모다. 내가 길들지 않으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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