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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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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1,670회 작성일 10-11-22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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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한 잡지에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더니 일부 언론들은 논문의 핵심 내용을 ‘노무현정부 질타, 강력비판’같은 요란한 헤드라인들로 요약한다. 노무현정부의 정책방향을 비판했다는 말은 맞지만, 이 논문의 핵심을 ‘노무현 정권 비판’이라는 단순한 범주로 묶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한 분야를 광범위하게 지적한 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최장집교수는 ‘민주주의 전도사’라 해도 좋을 정도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한국의 민주화에 관한 이론적 정립에 전력해왔고 그런 맥락에서 김영삼, 김대중정부 때도 그 정권의 한계와 문제점을 비판한 바 있다. 참여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학계에서 진보적 목소리를 내 온 최장집’이란 수식어를 맨 앞에 붙여가며 바로 그런 사람이 노무현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등식을 만들고 싶은 보수언론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호들갑이다. 더구나 나같은 일반 시민들도 쉽게 구해볼 수 있는 논문의 내용을 요약 보도하면서 그 전문全文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다른 매체의 기사를 인용하는 방법 또한 옹색하다.

나는 그들이 ‘고형적 사고(concrete thinking)'를 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자식 앞에서 자신의 종아리를 치며 ’내가 너를 잘못 키운 탓이다‘고 말하는 어미를 향해 철부지 아들이 ’맞아. 엄마가 잘못했네. 잘 좀 키우지 그랬어요‘라고 말하는 즉물적인 사고패턴, 그게 바로 고형적 사고다. 지극히 미성숙하거나 사고장애로 인해 추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로 나타난다. 이런 이들에게 ’죄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는 가르침은 헛되다. ’난 오늘은 죄짓지 않았거든‘하면서 그 여인에게 실제로 돌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가르침이 돌을 들고 있는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나는 참여정부가 혹독하게 비판받을 여지가 많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어떤 이의 애정어린 질타나 합리적 비판을 애정과 합리성은 뚝 잘라 버린채 분노만 가득찬 비방으로 변신시키는 보수언론의 고형적 사고방식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건전한 비판도 그로인한 자기고백이나 자기성찰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다보면 비판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가 몸을 사리는 것은 물론이고 합리적인 비판그룹마저 정파적 입장에 휘둘릴까 두려워 입을 다물게 된다. 노정권의 지지자 중 한 명은 최교수를 존경해 왔고 그의 말이 우리 사회를 걱정하는 진심어린 충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만, 그것이 거꾸로 불순한 수구세력에 의해 개혁세력을 포위하는 소재로 악용될 위험도 있다고 걱정한다.

흥미롭게도 같은 사안에 대해 노무현 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조선일보의 한 기자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비슷한 고민을 토로한다. 그 기자는 98년 월간조선의 사상검증 사건으로 시작된 ‘최장집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 문제에 관한 한 제가 판단하기에는 (조선일보보다) 최교수가 조금 더 피해자쪽인 것 같았다’는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그동안 ‘최장집 사건’을 조선일보를 공격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악용한 세력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면서 자신의 이런 글 또한 안티조선 세력에게 악용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고 말한다. 둘 다 지나친 걱정이지만, 고형적 사고가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방어적이 되고 순정한 비판은 자취를 감춘다. 멀쩡한 이들이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지점에서만 ’고형적 사고‘에 의존하는 듯한 모습은 의아하다. 정파적 사고가 우선하는 까닭일 것이다.

정신과에서는 환자들의 개인력을 기술하는 란의 첫줄에 ‘출생시 환영받지못한 아기(unwanted baby)’였는지 ‘환영받은 아기(wanted baby)’였는지의 여부를 기록하게 되어있다. 한 인간이 받은 심리적 상처의 근원을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때문이다. 아들을 간절히 원하는 집의 넷째 딸로 태어나는 경우처럼 출생시부터 ‘환영받지 못한 아기’들은 살아가는 내내 부모의 뒤틀린 감정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미움을 받을만한 구체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삼가하는 노력으로 미움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존재자체가 상대에게 불쾌감을 일으킨다면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얼마나 난감하겠는가.

민주사회에서는 어느 정권이 출범하든 ‘환영받지 못한 아기’가 되는 반대세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일상속에서 반복적으로 정신과 상담실속의 풍경을 재연하는 것은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 또 대부분의 민주사회에서는 그러지도 않는다. 나는 참여정부를 ‘환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초지일관 이 정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에서 벗어나 건강한 비판세력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이 또한 정파적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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