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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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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2,420회 작성일 10-11-22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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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문득’이라는 말은 대체로 회한으로 가득찬 깨달음이나 뒤늦은 안타까움을 동반한다.

어느날 문득 자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다 이미 가버리고 없는 아버지의 실체를 깨닫기도 하며, 어느날 문득 낯설게 다가오는 중년의 내 모습에 가만히 한숨짓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자아’를 만나고 있다는 또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성장을 정지해야 중요한 마디가 생겨나는 대나무처럼 ‘나를 들여다 보는’ 시간은 늘 쉼표와 함께 한다. 인간에게 절대고독이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심심할 겨를이 없는, 더 정확히 말해서 심심한 것을 조금도 참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절대고독’이란 사어(死語)에 다름아니다.

사람들은 ‘힘을 제압하는 것은 속도’라는 말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뛰듯이 걷고 빠른 동작으로 핸드폰을 두드린다.
보지않더라도 TV나 컴퓨터를 켜놓고 있어야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성취하고 전진하지 않는 삶이란 애초부터 고려대상이 아니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무 것도 하지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는 조증무드의 진단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상황에서 ‘절대고독’이란 죽어버린 말을 생생하게 뜻풀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철학자의 표현을 빌자면 고독이란 묻고 답하는 자신과 자신, 즉 자신이 자신에게 묻고 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고독이란 ‘자아’를 가장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가끔 유체이탈을 경험했다는 사람의 얘기를 듣는다. 그들의 경험담에 의하면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와 자신의 주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지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고 한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경험담의 진위여부를 떠나 ‘절대고독’과 마주하는 한 인간의 영혼을 느끼곤 한다. 이승과 이별하는 자의 목이 메이는 슬픔, 익숙한 모든 것에 다가설 수 없는 안타까움, 철저하게 홀로일 수밖에 없다는 쓸쓸함.......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부모형제, 배우자 그리고 아이들에게까지 적용되는 비정하리만큼 무심한 객관화. 저 사람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 때로 인간은 본능적인 연대의식조차 끊은 연후에야 진아(眞我)와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살을 발라내어 뼈만 남기는 숙수(熟手)처럼 그렇게 완전히 발가벗겨진 자신의 모습과 마주한 적이 있는가. 그렇게 되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한 적이 있는가.

한 화가는 진짜배기 예술가란 남의 도움없이 모든 것을 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잘 짜여진 팀웍을 강조하는 예술이란 애초에 인간이 홀로 되었을 때 뿜어져 나오는 가장 원초적이고 강렬한 예술혼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아니므로 고갱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좀 과격한 예술관이긴 하지만 동의못할 바도 없다.

‘대체재’와 ‘보완재’라는 경제학 용어가 있다. 주제넘게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런 얘기다. 만년필이 없을 때는 볼펜으로 대체하면 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만년필과 볼펜은 대체재의 관계다. 그러나 만년필에 잉크가 없으면, 다시 말해 서로 보완해 주지 않으면 그 각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만년필과 잉크는 보완재의 관계다.

사람들이 모여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는 ‘보완재’의 미덕이 유난히 강조된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사람은 ‘보완재적 인간’일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보자면 ‘대체재적인 인간’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절대고독을 마주할 수 있는 사람만이 대체재적인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문득’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았을 때 절대고독의 순간들이 적지않게 떠오를 수 있었으면 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 누구보다 우선 내 자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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